추상적 뉘우침은 대중의 분노만 더 키우는 ‘실패한 사과’일 뿐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기관리 필수 요소 ‘사과문’…어떤 문법적 꼼수가 쓰이나

육하원칙의 특정 요소를 슬쩍 지운 사과문은 그 목적과 취지조차 흐트러뜨린다. 최근 화제가 된 <정글의 법칙> 제작진·가수 강타·웹툰작가 기안84·공연기획사 페이크버진의 사과문(왼쪽부터).

육하원칙의 특정 요소를 슬쩍 지운 사과문은 그 목적과 취지조차 흐트러뜨린다. 최근 화제가 된 <정글의 법칙> 제작진·가수 강타·웹툰작가 기안84·공연기획사 페이크버진의 사과문(왼쪽부터).

한국 대중문화계는 다분히 산업화되고 전문화됐다. 하지만 이러한 전문화 속에서도 장르 불문 도통 발전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사과문이다. 문화 소비자들의 불만이나 의혹이 엄청난 속도로 확산될 수 있는 인터넷 환경에서, 대중문화 종사자 및 사업 주체들의 위기관리는 필수 요소가 되었다. 그중 사과문은 이미 벌어진 위기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형태의 대응이다. 잘 쓴 사과문이 잘못을 축소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잘못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실망감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는 동시에 사과의 주체가 적어도 잘못을 인지하고 반성 중이라는 신뢰를 줄 수는 있다. 문제는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다음의 공식 사과문들처럼. 이들 사과문은 사과를 하면서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다양한 꼼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해볼 만하다.

■ ‘누구’ 책임인지 말하지 않는 사과

지난 7월, SBS <정글의 법칙>에서 멸종위기종인 대왕조개를 채취한 것에 대해 촬영 국가인 태국 측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국내에서도 논란이 이어지자 SBS 측은 7월18일 다음과 같은 최종 입장문을 내놓았다. “SBS는 (중략) 인사위원회를 개최하여 예능본부장, 해당 CP, 프로듀서에 대해 각각 경고, 근신, 감봉을 조치하고, 해당 프로듀서는 <정글의 법칙> 연출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략) 오는 20일 <정글의 법칙>을 통해 시청자 사과문도 방송할 예정입니다. 향후 철저한 사전 조사와 ‘해외 제작 시 유사 사건 재발 방지 및 법적 리스크 예방을 위한 매뉴얼(가칭)’을 마련하여 재발 방지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분명 SBS는 책임자에 대한 징계를 내렸다. 대책도 마련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이 입장문에서 SBS는 사과의 주체가 아니라 잘못한 조직원을 벌하는 징벌의 주체다. 입장문 말미 “(방송에 나올) 시청자 사과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며, “SBS는 <정글의 법칙 in 로스트 아일랜드> 태국 편에서 대왕조개 채취 및 촬영과 관련, 현지 규정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점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립니다”라고 공식 입장과 사과문을 교묘히 분리하는 동시에 다시 한번 해당 회차와 해당 제작진의 문제로 축소했다. 이것은 일종의 유체이탈 화법이다. 대중은 자연을 다루는 지상파 예능에서 최소한의 생태윤리와 현지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이에 대해 SBS는 재발 방지를 논하기 전에 조직 내 제작윤리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원인을 분석하고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했어야 한다. 조직원의 개인적 책임만 강조하는 조직이 구조적 차원의 반성과 개선을 하리라 기대하기란 어렵다. SBS는 <정글의 법칙> 새 시즌을 준비 중이고, 여론은 여전히 좋지 않다.

대왕조개 논란 빚은 ‘정글의 법칙’
징벌 주체 ‘SBS’ 뺀 채 문제 축소
‘유체이탈 화법’ 탓 여론만 나빠져

기상 악화로 앤 마리 등 공연 취소
주최 측 ‘뮤지션 때문’ 책임 떠넘겨
궁색한 변명 그쳐 관객은 ‘울화통’

웹툰 ‘복학왕’ 청각장애인 희화화
근거 없이 ‘개선’ 신뢰성에 의구심

가수 강타 ‘양다리 연애’ 파문 일자
잘못한 사실 안 밝혀 ‘얍삽한’ 해명

■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대답 없는 사과

SBS의 유체이탈 사과문은 심지어 내용에 있어서도 제작진이 태국에서 사냥하는 모습을 촬영하지 않겠다고 태국 관광청에 제출한 서류 내용과 배치된다. 즉 현지 규정을 숙지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알면서 어겼다는 의혹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이 역시 망한 사과문의 특징 중 하나다. 지난 7월27~28일 양일간 열렸던 홀리데이랜드페스티벌에선 마지막 날 기상 악화로 앤 마리, 대니얼 시저 등 헤드라이너급 뮤지션 공연이 취소되었다. 이것만으로도 관객 입장에선 실망이 클 일이지만, 뮤지션 요구로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주최 측 공지와 달리 앤 마리 측은 본인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본인 뜻이 아니었다고 반박하고 개인적으로 호텔 로비에서 무료 공연을 펼쳤다. 페스티벌 주최 측에 대한 분노와 불신이 극에 이른 상황에서 다음날 기획사 페이크버진은 당시 공연 취소가 본인들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번호까지 붙여가며 장문의 입장문을 올렸다. 글의 구성은 1. 기상 악화 2. 일부 공연 취소 과정 3. 앤 마리 측에 안전사고에 대한 각서 요구한 적 없음 4. 공연 지연과 공지 미흡에 대한 사과 순서인데, 이 글의 가장 기본적인 잘못은 선 해명 후 사과 구조라는 것이다. 관객들의 허탈감을 달래기 전에 본인들의 결백부터 증명하려는 모습을 보며, 피해 관객들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토록 간단한 기본도 지키지 못한 것을 차치하더라도, 해당 입장문은 꽤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해명을 요구한 의혹에 대해선 별로 대답해주지 않는다. 왜 공지가 그토록 늦어졌는가, 왜 헤드라이너 공연 취소 과정에 대해 해당 뮤지션은 본인 요청이 아니라고 하는가, 관객들의 분노에 찬 질의는 꽤 명확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본인들이 궂은 날씨를 참고 기다렸음에도 어떤 이유로 공연을 보지 못했는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이들은 한번 더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멸종위기종 대왕조개 채취로 논란이 된 SBS <정글의 법칙>.

멸종위기종 대왕조개 채취로 논란이 된 SBS <정글의 법칙>.

■ ‘어떻게’ 고칠 건지 내용 없는 사과

지난 5월, 웹툰 <복학왕>에서 청각장애인을 희화화해 비판을 받았던 작가 기안84는 문제의 장면들을 수정하며 “원고에 많은 분들이 불쾌하실 수 있는 표현이 있었던 점에 사과 말씀 드립니다. 성별/장애/특정 직업군 등 캐릭터 묘사에 있어 많은 지적을 받았습니다. 작품을 재미있게 만들려고 캐릭터를 잘못된 방향으로 과장하고 묘사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사과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인정하는 사과다. 미안한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다만 청각장애인의 말뿐 아니라 독백까지 어눌하게 묘사하는 건, 재밌게 하려다 저지른 잘못이라기보단 특정 약자에 대한 편견을 재밌다고 생각해서 저지른 잘못에 가깝다. 즉 과장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사과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면, 이때 필요했던 건 본인의 묘사에서 어떠어떠한 차별 및 혐오표현의 맥락이 있었는지 명확히 인식 및 반성하고 신뢰할 만한 도덕적 입장을 제시하는 것이다. “불쾌하실 수 있는 표현”이 문제라면, 그 불쾌함의 도덕적 근거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진심으로 “앞으로는 더 신중하”겠다 말해도 그 결과를 신뢰하기란 어렵다.

■ ‘무엇’을 잘못했는지 적시 않는 사과

가수 강타는 소위 양다리 연애를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역시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개인적인 일로 깊은 실망과 상처를 드린 점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또한 저로 인해 상처받은 당사자분과 주변 사람들, 본의 아니게 언급되신 분들께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오랜 기간 사랑받으며 활동해온 만큼 개인적인 모습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이 모든 일은 변명의 여지 없이 저의 부족함과 불찰로 비롯”됐다고 사과문을 올렸다. 여기서 연애에 대한 도의를 지키지 않은 사실은 “개인적인 일”과 “부족함과 불찰”로 추상화한다. 개인적인 일도 맞고 인성의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도 맞다. 하지만 사과문만 봐선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전 연인의 폭로와 또 다른 전 연인의 해명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다들 대충은 알게 됐지만, 이처럼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이들이 힘겹게 기억을 더듬어 팩트를 재구성하고 입장을 밝히는 동안 정작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어떠한 사실 적시도 하지 않았다. 사과의 기본이 본인의 잘못을 제대로 인지하고 명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잘못된 사과이며, 구체적이지 않은 만큼 시간이 흐른 이후 얼마든지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얍삽한 사과다.

[위근우의 리플레이]추상적 뉘우침은 대중의 분노만 더 키우는 ‘실패한 사과’일 뿐

실패한 사과문은 공통적으로 잘못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기보단 최대한 추상화한다. 이러한 추상화를 위해 육하원칙의 특정 요소를 슬쩍 지우는 문법적 꼼수가 등장하는 것이다. 사과가 소통적 행위라면, 추상화된 사과는 의도적으로 소통을 왜곡시키는 행위다. 이러한 왜곡 안에서 침통한 어조의 사과문은 있어도 잘못한 일과 잘못한 사람은 사라지는 마술이 벌어진다. 사실 빤하고 조잡한 마술이다. 여전히 이런 트릭이 통할 거라 믿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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