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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너를 따라···시작하지 못한 여행을 떠났다
배우러 가는 여행이었다. 수학여행이었다. 배울 것은 차고 넘쳤다. 열여덟은 자고 일어나면 조금 크고, 자고 일어나면 조금 더 클 때였다. 길가에 핀 꽃 한 송이에서도, 햇볕에 반짝이는 바다에서도, 친구들과 소곤거리며 나누는 대화에서도 배울 때였다.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한 여행이었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든, 여행의 시작과 끝은 이미 상관없었다. 누구와 버스 옆자리 짝이 될지, 누구와 같은 방을 쓰게 될지를 더 고민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꺄르르 웃고, 해가 내리쬐면 또 그대로 꺄르르 웃는 여행이었다. 여행이어야 했다.2014년 4월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1·2·3반은 섭지코지·산굼부리·정방폭포에서, 4·5·6반은 섭지코지·용머리해안·정방폭포에서, 7·8·9·10반은 산굼부리·용머리해안·한림공원에서 도착하자마자 단체 사진을 찍기로 되어 있었다. 몇주 전 학교에 핀 ... -
팽목항···10년이 지났지만 기억해야할 이름들은 또렷이 살아있다
“기억해야 다시는 이런 아픔이반복되지 않습니다.하늘의 별이 된 아이들이외롭지 않게말을 걸어주세요...“전남 진도군 임회면 진도항 여객터미널 임시주차장 한 귀퉁이에 초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월호 팽목기억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볼 수 있는 ‘기억나무’에 대한 안내문이다. 하지만 희생자 304인의 얼굴사진들을 마주하고 서 있으면 말을 걸긴 쉽지 않다.출발에 앞서 스마트폰으로 내비게이션 어플을 켰다. 어디로 갈까요? 라는 입력창에 주저없이 ‘팽목항’이라는 단어를 입력한다. 검색 결과물 가장 윗자리는 진도항이다. 팽목마을과 팽목민박 등은 목록에 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팽목항이라는 위치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후 국민들이 추모를 위해 한번쯤은 찾아가고, 언젠가는 가려고 다짐했던 그 장소는 이제 ‘진도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팽목마을을 지나 항구 입구에서부터 마주하는 풍경... -
사람 200명, 사슴 1000마리 ‘불편한 동거’···영광 안마도의 내일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초록색 눈빛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남 영광군 계마항에서 배로 약 2시간 떨어진 안마도(鞍馬島)의 ‘사슴’ 이야기다. 안마도란 이름은 섬의 생김새가 말안장을 닮아서 붙여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이곳에서 말이 사육됐다.그런 안마도가 현재 사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주민 200여명이 사는 섬에는 사슴 1000여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사슴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산림과 농작물을 훼손하고 있다.섬에 머무는 나흘 동안 사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사슴은 야행성 동문인데, 이곳에서는 낮에도 무리 지어 다니다 사람과 마주치면 빤히 바라보다 피했다. 등산로와 휴교 상태인 마을 내 초등학교 운동장은 사슴의 배설물로 가득하다. 밤이 되자 본격적으로 사슴들의 시간이 시작됐다. 뒷산에서 내려온 사슴들은 들판에서 초록빛 안광을 빛내... -
등록, 미등록···차별은 없어요, 기다림만 있어요
일요일인 지난 7일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경기 동두천시 상패동의 낡은 2층짜리 건물은 이주노동자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나이지리아·방글라데시·파키스탄 등 다양한 국적의 이주노동자 30여 명이 진료소 대기실에 앉아 진료 개시를 기다렸다. 의자에 앉아 졸거나 휴대전화로 자국의 뉴스를 검색하고,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는 등 기다리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오전 10시가 되자, 고요하던 공간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넘버 2 누구예요? 어디 있어요?” 자원봉사자가 외치면서 환자를 찾았다. “2번? 2번은 위에 있어요. 3번이 나예요.” 순서대로 번호표가 배부되면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된다. 그 사이 환자는 점점 늘어나 번호표 숫자는 50번에 이르렀다. 타국에서의 고단한 삶에 지친 노동자들이 무료진료를 받기 위해 찾는 라파엘클리닉 동두천진료소의 일요일 아침 풍경이다.이주노동자 무료 진료소 ‘라파엘클리닉’은 1997년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처음 진료를 시... -
인디뮤지션의 성지, ‘클럽빵’을 아시나요?
객석이 텅텅 비어도 ‘주 5일 공연’은 엄격히 지킨다. 상업적 대관은 하지 않지만 해고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대관은 주저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내는 입장료 절반은 무대에 오른 뮤지션들에게 반드시 배분한다.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29길 12번지. 홍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라이브클럽, ‘빵’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들이다.‘Modern Rock Live Club BBang since 1994’라고 새겨진 입간판에 손으로 쓴 붉은색 글씨를 관객들은 먼저 마주한다. 라이브클럽 ‘빵’(이하 클럽빵) 무대에 오르는 그날의 뮤지션들 이름이다. 대부분은 생소한 이름의 인디음악가들이다. 40평 남짓한 지하 공간, 기타와 드럼의 강렬한 사운드가 귓가를 때린다. 특유의 어두침침한 불빛 너머 조명이 켜진 무대에서 뮤지션들이 준비한 음악을 쏟아낸다. 관객들은 의자에 앉거나 벽에 기대 선 채 맥주를 마시며 공연을 즐긴다.클럽빵은 1994년 이화여대 후문 근처에서 복... -
길냥이들의 천국 ‘통영 고양이학교’
“야~옹 야~옹…우다다다~”지난달 26일 아침, 경남 통영시 한산면의 섬인 용호도에 자리 잡은 ‘고양이 학교’에 들어서자, 뒷다리가 불편한 ‘코봉이’와 한쪽 눈을 잃은 ‘팡이’가 전력을 다해 달려와 품에 안긴다. 낯선 사람을 경계할 거라는 선입견이 무너졌다. 두 녀석은 이내 기자의 무릎 위에서 ‘골골송(고양이 특유의 그르렁 소리)’을 부른다.한산도를 지척에 두고 죽도, 비진도와 이웃하고 있는 용호도에 지난 9월 6일 ‘공공형 고양이 보호·분양센터’가 개소했다. 센터의 전신이었던 한산초등학교 용호분교는 인구 소멸로 2012년 3월 두 명의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폐교했고, 이후 11년 만에 길고양이들의 안식처로 탈바꿈했다. 이 섬은 용초마을과 호두마을이 동서로 나뉘어 있다. 학교는 당시 학생들의 접근성을 고려해 중간 지점에 지어졌다. 주위로 시원한 이국적 풍광이 펼쳐진다.현재 센터에는 고양이 26마리(10월 기준)가 지내고 ... -
손끝엔 땀, 발끝엔 꿈…그 끝엔 환희
5년 만에 열린 대회 때문인지 출전한 선수들이 쏟아내는 거친 호흡과 땀은 경기장을 뜨겁게 달궜다.1년을 미뤄 중국에서 열린 제19회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어느덧 종착지에 다다랐다. 아시아의 45개국 1만2500여명의 선수들이 40개 종목에서 나라를 대표해 아름다운 경쟁을 펼쳤다.29년 만에 중국을 물리치고 정상에 오른 여자 배드민턴 선수들, 21년 만에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낸 탁구 여자 복식 선수들, 금메달 6개를 포함해 22개의 메달을 획득한 수영 황금세대의 등장 등등. 엿새간의 추석 연휴에 국민들은 TV 앞에서 울고 웃었다.선수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환희가 어우러진 경기장에서 카메라 뷰파인더로 바라본 풍경은 경기의 승패와 상관없이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표정과 눈빛뿐 아니라 손끝, 발끝에서조차 간절함과 비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8일 폐회식을 끝으로 16일간의 대장정은 막을 내린다. 일본 아이치·나고야에서 다시 타오를 성... -
‘바다야,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울진 죽변항 어민들
항구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세찬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가 바다와 하늘을 희미하게 갈라놓고 있었다. 짙은 바닷냄새가 가슴 깊숙이 들어왔다. 지난달 29일 경북 울진 죽변항에서 새벽 경매를 기다리다 눈이 감겼다.새벽 5시, 귀청을 울리는 호각 소리에 잠에서 깼다. 적막했던 항구는 수산물 경매 준비로 활기가 넘쳤다. 항구의 배들은 불을 밝혔다. 선원들은 잡은 물고기를 상자에 담아 부두에 깔았다. 붉은색 모자를 쓴 경매인들은 호각을 입에 문 채 빠른 걸음으로 물고기 상자 쪽으로 향했다. 하얀색 모자의 중매인들과 상인들은 경매인의 뒤를 따랐다. 중매인들은 손바닥만 한 나무판에 가격을 적어 경매인에게 전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경매인은 중매인들 모자에 쓰인 번호와 가격을 뜻하는 숫자를 연신 외치고 있었다. 어민들은 배에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낙찰이 끝나자, 경매인은 다시 호각을 입에 물고 다음 물고기 상자로 이동했다... -
실종자 수색, 티끌 같은 희망도 안 놓치는 ‘멍멍경찰’ 밍밍이가 간다
‘밍밍아! HERE!’수해 실종자 수색이 20일째 이어진 지난 3일 오전 9시. 폭 372m의 경북 예천군 내성천에서 실종자 수색에 나선 경북경찰청 과학수사대(이하 과수대) 소속 ‘핸들러’ 김육진 경위가 리콜 신호를 외치자 체취증거견(이하 체취견) ‘밍밍’이가 쏜살같이 김 경위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번 수색을 위해 전국에서 자원한 과수대 소속 핸들러 8명과 7마리의 체취견들은 이들과 함께 실종자를 찾고 있었다. 이날 예고된 기온은 35도. 사방에서 조여 오는 열기를 온몸으로 견디며 거친 지형을 수색하는 동안 핸들러와 체취견들의 몸은 땀과 모래 먼지로 뒤덮였다.“재난 현장에 가면 실종자 가족들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핸들러들은 실종자를 최대한 빨리 찾아 어떤 형태로든 가족 품으로 돌려보낸다는 마음으로 수색작업을 합니다. 우리 뒤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단단한 각오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희의 모습을 보며 가족들이 조금이라... -
꺾이고 접힌 누군가의 추억, 다시 펼칠 수 있게 치료해 드립니다
“우산은 사람 몸과 같아요. 조금의 오차가 있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죠.”서울 청계천 새벽다리 옆 우산 수리·도매점 ‘연흥사’에서 지난 11일 만난 김석환씨(61)는 ‘우산 의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산과 동행을 시작한지 올해로 42년째다. 그는 줄곧 이곳 방산시장에서 우산과 양산을 고치고 있다. 1980년대 방산시장은 우산 도매업을 하는 대표적인 곳이었다. 당시엔 10여 곳의 우산 가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김씨 가게가 유일하다. 수리 솜씨가 뛰어나 ‘우산 수리센터’ 운영을 시작한 지방자치단체에 실습 강의를 나가기도 하고, 백화점 내 판매점의 수리도 맡곤 한다.긴 세월 다양한 사연이 담긴 우산·양산이 김씨 손을 거쳐 갔다. 지인에게 빌렸다가 망가뜨린 우산, 시어머니가 물려준 양산,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이 선물해 준 우산을 들고 찾아온 부모도 있었다. 해외에서 한 달 전 미리 전화한 뒤 여행을 와서 수리 맡기는 교포도 있다고 했다. 흔한 우산과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