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볕처럼, 풀잎처럼…자연의 순리를 배우며 우리들은 자란다
농사짓는 일은 미래를 조금 미리 사는 일이다. 씨를 틔울 때는 싹이 나는 걸 그려보고, 싹이 나면 키가 커질 모습을, 그 후에 열매가 달릴 모습을 생각한다. 맨땅에서도 빼곡함을 보고, 빼곡함에서는 다시 수확 후의 맨땅을 본다. 내일의 햇볕, 비, 구름을 가늠하고 염려한다. 농부는 내일을 생각하며 오늘 땅을 돌보고, 땅이 내어주는 것을 얻는다.전남 곡성군 겸면 회화마을에 사는 볕뉘(35), 풀(32), 연어(28)는 올해로 5년 차, 4년 차, 3년 차 농부다. 키워서 파는 직업인으로서의 농부보다는 농사를 삶의 지향점으로 삼는 것에 가깝다. 필요한 만큼 길러 먹고, 소비보다는 자급자족을 목표로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기계가 아닌 손으로 심고 거둔다. 지역협동조합인 항꾸네협동조합의 청년 귀농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농사를 배웠고, 프로그램을 마친 후 곡성에 정착했다. 이제 비가 오면 벼가 쓰러졌을 것이고, 물에 닿은 벼에서 싹이 나기 전에 얼른 일으켜 세워주어야 한다는 ... -
‘채취’라는 명목의 ‘착취’…산도 지역민도 무너졌다
우리나라의 산림이 토석 채취장과 광산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토목 공사나 아파트 건축에 사용되는 골재인 토석의 40%는 산림에서 채취하고 있는 실정. 하지만 채취로 인해 파괴된 자연을 복구하는 예치금 부족, 환경영향평가와 실효성에 문제가 있는 법을 이용하는 일부 사업주, 그리고 해당 지자체와 산림청의 부실한 관리 감독으로 백두대간을 비롯한 전국의 산이 파헤쳐지고 있다.지난달 25일부터 사흘동안 전국의 토석 채취장과 광산 6곳을 찾았다. 5년전 허가 기간이 만료된 전남 해남군의 한 토석 채취장은 폭격을 맞은 듯 푹 파여 있었다.복구와 안전상의 이유로 채석 과정에서 산을 계단식으로 깎아야 하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버려진 중장비와 기름통도 허름한 건물 주위에 방치돼 있었다.“저렇게 하고 갈 거 알았으면 다 반대했죠.” 채취장을 바라보는 한 주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에 다른 업체가 이어서 사업을 하고 복구하겠다고 한 적도... -
‘선수될 결심? 축구에 진심!’…창원 명서초 여자축구부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정신을 한 곳에 기울이면 어떤 일이라도 이룰 수 있다)!”지난달 22일 오후 7시 경남 합천의 한 축구장, 질끈 묶은 머리를 맞댄 아이들이 외치는 구호가 굵은 빗방울을 뚫고 운동장에 울렸다. 경기를 앞둔 창원 명서초등학교(교장 박정화) 여자 축구팀 주전 여덟명의 기세가 제법 등등했다. 제32회 여왕기 전국여자축구대회 초등부 3조 예선전 마지막 경기, 이틀 전 대구 상인초와의 1차전에서 0대4로 패배한 명서초는 전국소년체전에서 준우승한 강원 강릉FC U12를 이겨야 조 2위까지 진출하는 8강을 기대할 수 있었다.“우리 애들이 비오는 날 경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잘 적응 할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명서초 이진희 감독(40)이 비를 맞으며 뛰는 선수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축구 경력이 길다면 다양한 환경에서 경기를 했을... -
80년 세월 붓에 적셔 ‘슥슥’…이젤 앞에 앉은 할망들
구부정한 몸이 하얀 도화지 앞에 앉았다. 주름진 손이 도화지 위를 스치며 서걱이는 소리를 낸다. 목탄으로 흘린 선들은 이내 아카시아 나무가 되었다. 초록으로 물들인 나뭇가지 위에 연분홍빛 물감을 입히는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태풍에 부러지카 부댄 그림으로 바타준거주(태풍에 부러진 나무를 그림으로 받쳐준 거죠)”올해 여든다섯의 김인자 할망(할머니)이 연필을 들고 자신의 마음을 또박또박 눌러쓴다. 세 시간을 꼼짝 않고 그린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다.지난달 27일 제주 조천읍 선흘마을. 네 명의 할망들이 ‘그림 선생’ 집에 모였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마다 사는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다 선생이 “삼춘(남녀 구분 없이 동료나 이웃을 친근하게 부르는 제주 방언) 우리 이제 그림 그려볼까?” 하며 웃음 짓자 약속이나 한 듯 이젤(그림을 그릴 때 그림판을 놓는 틀)을 펼쳤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할망들의 그림 수업은 이곳에선 익숙한 풍경이다.... -
10년 전 너를 따라···시작하지 못한 여행을 떠났다
배우러 가는 여행이었다. 수학여행이었다. 배울 것은 차고 넘쳤다. 열여덟은 자고 일어나면 조금 크고, 자고 일어나면 조금 더 클 때였다. 길가에 핀 꽃 한 송이에서도, 햇볕에 반짝이는 바다에서도, 친구들과 소곤거리며 나누는 대화에서도 배울 때였다.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한 여행이었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든, 여행의 시작과 끝은 이미 상관없었다. 누구와 버스 옆자리 짝이 될지, 누구와 같은 방을 쓰게 될지를 더 고민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꺄르르 웃고, 해가 내리쬐면 또 그대로 꺄르르 웃는 여행이었다. 여행이어야 했다.2014년 4월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1·2·3반은 섭지코지·산굼부리·정방폭포에서, 4·5·6반은 섭지코지·용머리해안·정방폭포에서, 7·8·9·10반은 산굼부리·용머리해안·한림공원에서 도착하자마자 단체 사진을 찍기로 되어 있었다. 몇주 전 학교에 핀 ... -
팽목항···10년이 지났지만 기억해야할 이름들은 또렷이 살아있다
“기억해야 다시는 이런 아픔이반복되지 않습니다.하늘의 별이 된 아이들이외롭지 않게말을 걸어주세요...“전남 진도군 임회면 진도항 여객터미널 임시주차장 한 귀퉁이에 초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월호 팽목기억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볼 수 있는 ‘기억나무’에 대한 안내문이다. 하지만 희생자 304인의 얼굴사진들을 마주하고 서 있으면 말을 걸긴 쉽지 않다.출발에 앞서 스마트폰으로 내비게이션 어플을 켰다. 어디로 갈까요? 라는 입력창에 주저없이 ‘팽목항’이라는 단어를 입력한다. 검색 결과물 가장 윗자리는 진도항이다. 팽목마을과 팽목민박 등은 목록에 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팽목항이라는 위치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후 국민들이 추모를 위해 한번쯤은 찾아가고, 언젠가는 가려고 다짐했던 그 장소는 이제 ‘진도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팽목마을을 지나 항구 입구에서부터 마주하는 풍경... -
사람 200명, 사슴 1000마리 ‘불편한 동거’···영광 안마도의 내일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초록색 눈빛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남 영광군 계마항에서 배로 약 2시간 떨어진 안마도(鞍馬島)의 ‘사슴’ 이야기다. 안마도란 이름은 섬의 생김새가 말안장을 닮아서 붙여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이곳에서 말이 사육됐다.그런 안마도가 현재 사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주민 200여명이 사는 섬에는 사슴 1000여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사슴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산림과 농작물을 훼손하고 있다.섬에 머무는 나흘 동안 사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사슴은 야행성 동문인데, 이곳에서는 낮에도 무리 지어 다니다 사람과 마주치면 빤히 바라보다 피했다. 등산로와 휴교 상태인 마을 내 초등학교 운동장은 사슴의 배설물로 가득하다. 밤이 되자 본격적으로 사슴들의 시간이 시작됐다. 뒷산에서 내려온 사슴들은 들판에서 초록빛 안광을 빛내... -
등록, 미등록···차별은 없어요, 기다림만 있어요
일요일인 지난 7일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경기 동두천시 상패동의 낡은 2층짜리 건물은 이주노동자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나이지리아·방글라데시·파키스탄 등 다양한 국적의 이주노동자 30여 명이 진료소 대기실에 앉아 진료 개시를 기다렸다. 의자에 앉아 졸거나 휴대전화로 자국의 뉴스를 검색하고,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는 등 기다리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오전 10시가 되자, 고요하던 공간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넘버 2 누구예요? 어디 있어요?” 자원봉사자가 외치면서 환자를 찾았다. “2번? 2번은 위에 있어요. 3번이 나예요.” 순서대로 번호표가 배부되면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된다. 그 사이 환자는 점점 늘어나 번호표 숫자는 50번에 이르렀다. 타국에서의 고단한 삶에 지친 노동자들이 무료진료를 받기 위해 찾는 라파엘클리닉 동두천진료소의 일요일 아침 풍경이다.이주노동자 무료 진료소 ‘라파엘클리닉’은 1997년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처음 진료를 시... -
인디뮤지션의 성지, ‘클럽빵’을 아시나요?
객석이 텅텅 비어도 ‘주 5일 공연’은 엄격히 지킨다. 상업적 대관은 하지 않지만 해고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대관은 주저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내는 입장료 절반은 무대에 오른 뮤지션들에게 반드시 배분한다.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29길 12번지. 홍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라이브클럽, ‘빵’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들이다.‘Modern Rock Live Club BBang since 1994’라고 새겨진 입간판에 손으로 쓴 붉은색 글씨를 관객들은 먼저 마주한다. 라이브클럽 ‘빵’(이하 클럽빵) 무대에 오르는 그날의 뮤지션들 이름이다. 대부분은 생소한 이름의 인디음악가들이다. 40평 남짓한 지하 공간, 기타와 드럼의 강렬한 사운드가 귓가를 때린다. 특유의 어두침침한 불빛 너머 조명이 켜진 무대에서 뮤지션들이 준비한 음악을 쏟아낸다. 관객들은 의자에 앉거나 벽에 기대 선 채 맥주를 마시며 공연을 즐긴다.클럽빵은 1994년 이화여대 후문 근처에서 복... -
길냥이들의 천국 ‘통영 고양이학교’
“야~옹 야~옹…우다다다~”지난달 26일 아침, 경남 통영시 한산면의 섬인 용호도에 자리 잡은 ‘고양이 학교’에 들어서자, 뒷다리가 불편한 ‘코봉이’와 한쪽 눈을 잃은 ‘팡이’가 전력을 다해 달려와 품에 안긴다. 낯선 사람을 경계할 거라는 선입견이 무너졌다. 두 녀석은 이내 기자의 무릎 위에서 ‘골골송(고양이 특유의 그르렁 소리)’을 부른다.한산도를 지척에 두고 죽도, 비진도와 이웃하고 있는 용호도에 지난 9월 6일 ‘공공형 고양이 보호·분양센터’가 개소했다. 센터의 전신이었던 한산초등학교 용호분교는 인구 소멸로 2012년 3월 두 명의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폐교했고, 이후 11년 만에 길고양이들의 안식처로 탈바꿈했다. 이 섬은 용초마을과 호두마을이 동서로 나뉘어 있다. 학교는 당시 학생들의 접근성을 고려해 중간 지점에 지어졌다. 주위로 시원한 이국적 풍광이 펼쳐진다.현재 센터에는 고양이 26마리(10월 기준)가 지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