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진희 “질병권이란 ‘잘 아플 권리’…만성질환자에겐 건강권보다 소중”

김민아 선임기자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펴낸 활동가 조한진희

조한진희 “질병권이란 ‘잘 아플 권리’…만성질환자에겐 건강권보다 소중”

팔레스타인 다녀온 뒤 건강 악화
개인적 경험 바탕으로 질병 사유
책에서 ‘질병권’ 개념 제안해 주목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질병을 몸에서 삭제해야 하는 배설물 같은 존재로만 본다면, 만성질환자를 포함해 질병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아픈 몸은 불행한 패배자로 살 수밖에 없다. (…) 질병이나 죽음 자체가 비극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겪어낼 수 없을 때 비극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된 노동을 반복해도 결코 아프지 않은, 무한히 노동할 수 있는 몸이 아니다. 자연이 생명체에 부여한 생로병사를 낙인이나 차별 없이 겪을 수 있는 몸이 필요하다. 질병권이 보장되는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자 조한진희씨.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자 조한진희씨.

여성·평화·장애 운동을 넘나드는 전업활동가 조한진희(43·사진)는 지난해 펴낸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질병권’이란 개념을 제안해 주목받았다. 그가 질병에 관해 사유하기 시작한 건 개인적 경험 때문이다. 조한진희는 2009년 팔레스타인에 3개월간 현장활동을 다녀온 뒤 건강이 악화됐다. 서 있다가 이유 없이 쓰러지고 하혈도 이어졌다.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원인 불명이었다. 종합건강검진에서 발견한 병명은 갑상선암. 그러나 암이 현기증의 원인은 아니었다. 2~3년쯤 지나, 팔레스타인에서 접촉한 독성물질에 의한 것이란 진단을 받았다. 투병 생활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증세에 따라 대증요법 치료를 받았다. 지금은 “완치와 투병의 중간쯤”에 있다.

조한진희가 말하는 질병권은 ‘(잘) 아플 권리’를 의미한다. 건강권처럼 치료받을 권리를 포함하지만 초점이 다르다. 건강권이 사회 구성원 개개인을 어떻게 건강하게 만들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면, 질병권은 만성적으로 아픈 몸으로도 온전히 잘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의학 발달 전엔 회복 아니면 죽음
지금은 만성질환 안고 살아가…
빈부에 따른 건강 불평등 존재
질병의 개인화 막는 사회 돼야”

지난 25일 경향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과거 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질병에 걸릴 경우 ‘회복 아니면 죽음’이었다”며 “의학이 발달한 지금은 완치되지 않더라도 완화된 상태에서 만성질환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러한 만성질환자들의 몸을 이야기할 때 질병권이 건강권보다 더 적절한 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한진희는 특히 ‘질병의 개인화’를 비판하며 ‘건강 불평등’에 주목한다. “부촌 주민일수록 더 긴 건강수명을 누립니다. 우리의 건강은 사회 구조적 문제로서 몸에 드러나게 됩니다. 누구든지 노력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건 판타지에 불과합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문제가 된 ‘확진자 낙인찍기’는 질병을 개인화하는 대표적 사례다. 개개인의 주거환경이나 노동여건이 모두 다른데도 ‘조심 좀 하지’ ‘이런 시국에 꼭 돌아다녀야 하나’ 같은 비난이나 조롱이 쏟아졌다.

조한진희는 “거리 두기·손 씻기·마스크 착용 등 방역수칙은 필요하다”며 “다만 개인방역을 강조하는 단계를 지나 사회적 시스템 전환까지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프면 사나흘 집에서 쉬라는 ‘구호’를 넘어 유급병가·상병수당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직장갑질119’가 지난 9월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2%가 직장에 유급병가 제도가 없다고 답했다. 39.9%는 연차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직장갑질119는 “회사에서 하루 연차 사용 인원을 1명으로 제한한다. 원하는 날 연차를 쓰려면 가위바위보를 해 이겨야 한다”는 콜센터 노동자의 제보를 소개하기도 했다.

질병권이 보장되는 사회는 아픈 사람들에게만 유리할까. 조한진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에는 질병에 대해 자연스러운 두려움 이상의 공포가 있습니다. 질병 자체가 겁나기도 하지만, 아프면 가난해지고 직장과 학교 등에서 배제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내가 아파도 빈곤층으로 추락하지 않고 직장·학교에서 배제되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쌓인다면, 아픈 사람에 대한 혐오가 사라지고 건강에 대한 강박관념도 완화될 겁니다. 그만큼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 다가설 수 있습니다. 질병권을 보장하면 모든 시민의 삶이 나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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