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겨울방학…‘친구’를 잃지 않게 학교부터 열 순 없을까

김소영

팬데믹이 알려준 ‘친구’의 의미

[김소영의 어린이 가까이]끝나지 않는 겨울방학…‘친구’를 잃지 않게 학교부터 열 순 없을까

“선생님, 제가 뭐 입었는지 보이세요?”

지난주 줌 수업 시간, 노트북 화면 너머에서 현준이가 물었다. 현준이는 한겨울인데도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거 저희 반 티예요. 원래는 체육대회랑 체험학습 때 입는 건데요, 올해는 이거 입고 학교도 못 갔거든요. 너무 아쉬워서 그냥 오늘 입었어요.”

오죽하면 독서 선생님한테 반 티를 자랑할까. 떨어져 있지만 그 마음만은 나에게 절절히 와닿았다.

현준이는 워낙에도 친구를 무척 좋아한다. 나에게 들려주는 일상 이야기도 대부분 친구에 대한 것이다. 친구 누구랑 축구 한 일, 누구 생일에 영화 본 일, 친구들이 집에 와서 잔 일, 싸우는 친구들 말린 일과 자기가 싸운 일 등. 현준이는 지난해 4학년을 시작하면서 제일 기대되는 일이 새 친구들을 만나는 거라고 했다. 코로나19 때문에 개학 자체가 미루어지고 등교수업도 엄격한 방역수칙을 따라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조차 현준이는 살짝 들뜬 모습이었다.

“그래도 친구들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고, 다 같이 마스크 쓰고 수업하는 건 처음이니까 그 모습이 어떨지 조금 궁금하기도 해요.”

결과적으로 현준이의 4학년은 친구들과 몇 번 놀지도, 만나지도 못하고 지나가버렸다. 현준이가 5학년이 되면서 가장 바라는 건 여름에 친구들이랑 수영장에 가서 노는 것이다. 친구 사귀는 데 심드렁한 윤아도, 친구 문제로 골치 아파했던 예나도, 새해 소원은 코로나19가 끝나서 친구들과 마음껏 노는 것이다.

‘서로를 위해 떨어져 마음만 함께’
자신했던 것과 달리 쉽지 않았다
인간 관계 익숙한 어른도 이런데…
어린이에게 친구는 더 절실하다

이 긴 코로나 시대에 보고 싶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건 어른들에게도 꽤 힘든 일이다. 방역당국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연말연시 모임을 갖는 어른들이 뉴스와 SNS에서 자주 보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물론 평소 인간관계에 지쳐 있던 어른이라면 이 상황이 일면 반가울 수도 있다. 이참에 부담스러웠던 관계에 적당한 거리를 만들고, 정말 소중한 관계의 우선순위를 정리해보았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그런 편이었다. “상황이 좋아지면 만나자”는 말은 썩 내키지 않는 만남을 미룰 때 적당한 인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만나고 싶은 친구야말로 진정한 친구 아닐까 생각하면서, 또한 그런 친구야말로 내가 꼭 지켜주어야 할 사람들이니 만나지 않고도 참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머리로는 그랬다.

내 확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는 한 친구가 집 앞에 찾아온 어느 날 알게 되었다. 친구는 퇴근길에 들렀다면서 나를 불러내 복숭아 병조림과 쿠키를 주고 갔다. 방역지침에 따라 독서교실 문을 닫고 의기소침해 있던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단것 먹고 힘내자’는 친구의 쪽지를 읽고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서로 떨어져서 마음만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친구 얼굴을 마주한 뒤에야 깨달았다. 그동안 우리는 문자메시지도 주고받았고, 통화도 했고, SNS로 서로의 일상을 어느 정도 구경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얼굴을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인간관계에 대해 이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렇게 배우는 날이 오는구나, 앞으로도 계속 배워가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이에게 친구는 더욱 절실하다. 그런데 어떤 어른들은 이 문제를 가벼이 여기는 것 같다. 어린이에게 친구란 ‘만나서 노는 존재’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일지 모르겠다. 그러니 학습에 차질이 생기거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길어지는 문제에 비해 급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친구 대신 가족과 놀 수도 있고,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놀 수도 있으니 친구를 못 만나는 것쯤은 덜 걱정해도 되는 것일까? 어른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린 시절의 친구가 꼭 평생 친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어린이의 친구관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일까?

단순히 함께 놀기 위해라기보다
학교 생활 같은 일상을 공유하고
비슷한 경험·지식을 기반으로
감정과 생각을 나누는 사이니까

어린이에게 친구란 단순한 ‘놀이 대상’이 아니다. 어린이에게 친구는 경험과 지식 수준이 비슷한 사람, 학교생활 같은 중대한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 사회적인 위치가 비슷한 사람이다. 친구들끼리는 비슷한 것을 알고 비슷한 것을 모른다. 자기들만 아는 순간과 농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은 물론이고 형제자매와도 온전히 나눌 수 없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친구와는 나눌 수 있다. 어린이가 ‘친구’와 놀고 싶은 건 그래서다.

어떤 어린이는 친구 덕분에 가정 바깥에 숨 쉴 자리가 생기기도 한다. 어린이에게 가정은 거의 절대적인 조건이지만 모든 어린이에게 가정이 이상적인 환경일 리 없다. 어린이는 친구와 어울리면서 잠시 가족의 사정을 잊을 수도 있고 위로를 얻거나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집안의 무거운 공기를 감지하고 있는 어린이라면 친구가 얼마나 필요할 것인가. 어린이에게 친구는 삶을 구성하는 실질적인 요소다.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어린이는 이렇게나 오랜 시간 친구와의 만남이 차단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런 고립은 차라리 벌에 가깝다. 규칙을 지키지 않아서, 부모님 말씀을 잘 듣지 않아서, 친구와 싸우거나 문제를 일으켜서 받는 벌. 명백히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며칠씩 이런 벌을 받는 것이 괴로울 텐데 1년여에 걸친 고립이 어린이에게 어떤 스트레스를 주고 있을까, 나는 걱정이 된다. 물론 어린이도 사회적인 위기 상황을 알겠지만, 감당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운 일일 것 같다.

오래전 독서교실의 한 어린이는 친구 때문에 한참 고민일 때 부모님으로부터 “졸업하면 다시 안 보는 사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어른 되어서 만나는 친구가 더 좋은 친구다” 하는 말씀을 듣고 오히려 속상해했다. 어린이 입장에서 졸업은 한참 뒤의 일이고 당장 내일 친구를 마주 보아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는데 중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 어떻게 더 좋은 친구를 만나겠느냐고 걱정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나는 그 어린이의 부모님이 “어른 되어서 만나는 친구가 더 좋은 친구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어렸을 때의 친구는 학교와 반, 동네 등이 우연히 겹쳐 만나게 마련이다. 그중에 마음이 맞는 친구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어쩌다 내키지 않는 아이와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여 지내야 할 때도 있다. 어렵게 관계망을 가꾸었는데 새 학년이 되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내년에도 ○○이랑 같은 반이 되고 싶다’는 어린이의 바람은 어쩌면 새 친구를 사귀는 긴장을 덜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뒤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친구가 될 사람을 알아볼 수도 있고 관계를 알맞게 유지하는 나름의 요령도 생긴다. 지금 내가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나와 나이도, 사는 곳도 다르지만 관심사나 삶의 지향점이 비슷해 친구가 된 사람들이다. 같이 책을 읽거나 공부하거나 글을 쓰면서 또는 놀면서 만나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기도 했고, 친구가 되고 싶어 내가 먼저 나서기도 했다. 어떤 친구와는 결국 멀어질 때도 있지만 적어도 학년이나 반이 바뀌는 식으로 일이 허망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전에는 그런 사실을 떠올리면서 어렸을 때 그토록 친구관계에 안달복달했던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정말 초등학교 때 친구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라고 묻는 어린이에게 해줄 말을 찾다가 깨달았다. 만일 내가 어렸을 때 그런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친구 때문에 애태우고 즐거워하고 실망하고 감동받고 천천히 잊어가고 추억해본 경험이 없다면, 나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내가 지금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오늘의 내 친구들은 어렸을 때 친구들이 만들어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 친구도 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을 했다. 전 학교에서의 마지막 날 수업을 마치고 엄마와 함께 택시를 탔는데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너무 좋아했던 친구, H와 헤어지는 것이 슬퍼서였다. 곱슬머리에 주황색 스웨터가 아주 잘 어울렸던 친구. 1학년 때 한 반이었던 H하고는 뭐가 그렇게 잘 맞았는지, 운동장 한구석에서 절대 헤어지지 말자고 손을 들고 선서도 했다. 내가 그 약속을 깨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옮긴 학교에 그럭저럭 적응하고 새 친구를 사귀어가면서도 ‘친구와는 헤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곤 했다. 그때 한두 살만 더 많았더라도 H의 주소를 적어 와 편지를 썼을 텐데. 어릴 땐 그런 요령조차 없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 퇴근길에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어른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이겠지.

시연이는 현지와 단짝이다. 학교는 같은데 서로 집이 멀기 때문에 따로 만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학교에서 만나는 시간 ‘1분 1초가 아깝다’고 했다. 둘이 공통으로 좋아하는 만화책 시리즈가 있어 서로 다른 편을 사서 바꿔 보기도 한다. 그런데 등교 인원수 제한 때문에 학교 가는 날이 어긋났다. 둘은 서로의 자리에 만화책을 가져다 놓으면서 바꿔 보았단다.

“현지가 놓고 갔다고 톡을 해요. 그래서 학교에 가면 진짜 있어요. 그것도 재미있어요.”

‘그것도 재미있어요’라는 시연이에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몰랐다.

어린이의 생활은 이미 3단계 수준의 거리 두기 상태다. 어린이들의 새해 소원대로 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좋겠지만, 그 전에라도 어린이가 친구를 만나면 좋겠다. 학교부터 열면 좋겠다. 그럴 수 있게 학교를 지원하면 좋겠다. 작년 이맘때부터 내내 겨울방학인 것만 같다. 자전거를 타고 친구와 몰려다니는 어린이도, 멀리 있는 친구를 소리쳐 부르는 어린이도, 편의점 앞에서 지갑을 열어 친구와 돈을 모으는 어린이도 보고 싶다. 나의 새해 소원은 그것이다.

▶김소영

[김소영의 어린이 가까이]끝나지 않는 겨울방학…‘친구’를 잃지 않게 학교부터 열 순 없을까

독서교실에서 어린이와 함께 읽고 쓰고 배우고 가르친다. 비양육자로서, 돌봄과 교육의 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린이’에 관심이 많다. 어린이에게 좋은 세상이 어른에게도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어린이책 읽는 법> <말하기 독서법> <어린이라는 세계>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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