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곳'에서 꽃향기?...안될 말입니다

송윤경 기자
여성의 성기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은 정상이다. 안 좋은 냄새가 나거나 분비물이 지나치게 많다면 질염 치료를 하면 된다. 시판 중인 외음부 세정제로 닦아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여성의 성기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은 정상이다. 안 좋은 냄새가 나거나 분비물이 지나치게 많다면 질염 치료를 하면 된다. 시판 중인 외음부 세정제로 닦아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이라는 책에서 이런 식의 ‘뒤집기’를 제안했다. “남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월경을 하며, 생리량이 얼마나 많은지 자랑하며 떠들어댈 것이다. (중략) 의회는 국립월경불순연구소에 연구비를 지원한다. 의사들은 심장마비보다는 생리통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한다. 연방정부가 생리대를 무료로 배포한다.” 인류가 남성의 몸을 다루듯 여성의 몸을 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를 보여주는 통쾌한 상상이다.

“저의 그곳에서 꽃향기가 난대요.” 누구나 한 번쯤 보았을 법한 온라인 광고 문구다. 성관계를 암시하는 이 광고에서 ‘그곳’은 여성의 성기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식의 상상을 이어가 보자. 질은 스스로 pH(수소이온농도) 수치의 균형을 맞추며, 시큼한 냄새가 나야 정상이다. 만약 남자가 질을 가졌다면, 그 ‘시큼함’은 섹시하다는 증거가 될지 모른다. 혹시 악취가 나거나 가렵고 분비물이 많이 나온다면? 감기에 비견될 정도로 흔한 ‘질염’ 증상이다. 질이 남자의 것이었다면, 간단한 질염 치료제가 마치 소화제처럼 편의점에 진열돼 있을 수도 있다.

인류의 의학은 이제까지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놓고 연구한 결과를 여성에 적용해왔다. 최근 미국 등이 여성건강연구국(OWH)과 같은 기관을 세워 여성 건강연구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출산 정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진 unsplash

인류의 의학은 이제까지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놓고 연구한 결과를 여성에 적용해왔다. 최근 미국 등이 여성건강연구국(OWH)과 같은 기관을 세워 여성 건강연구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출산 정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진 unsplash

■아직도 모르는 ‘여성의 몸’

인류의 절반이 여성이건만, 여성의 몸은 오랫동안 의학계에서조차 부차적인 취급을 받아왔다. 저널리스트 마야 뒤센베리는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에서 “수십년간 의학이 채택한 유일한 모델은 몸무게 70㎏의 백인 남성”이었다고 지적한다. 여성과 소수자를 임상연구에 반드시 포함시키도록 하는 법은 미국에서도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졌다. 그는 “남성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추론해서 여성에게 적용한 세월의 잔재를 여전히 느낄 수 있다”면서 대표 사례로 심장병을 들었다. 미국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할 확률은 남성보다 여성이 높다. 그럼에도 심장마비가 온 젊은 여성이 응급실에 갔다가 집으로 돌려보내질 확률은 남성보다 7배 높다고 한다. 심장병은 ‘남성의 질병’으로 여겨지고, 전형적으로 여겨지는 증상 역시 남성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선진국은 최근 ‘여성의 몸’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여성건강연구국(The office of Women’s Health)을, 캐나다는 젠더와 건강연구소(Institute of Gender and Health)를 세웠다. 심혈관계 질환, 관절염 등 ‘여성만’ 앓는 질환이 아니지만, 여성에게서 남성과 다른 병증이 나타나는 사례들이 이곳에서 연구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여성건강을 다루는 부처는 보건복지부의 ‘출산정책과’ 정도다. 여성을 여전히 ‘출산하는 존재’로 취급하는 시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박현영 국립보건연구원 미래의료연구부장은 “여성건강은 출산 전후뿐 아니라 연구해야 할 주제가 광범위하다”면서 “신체활동이 적은 한국의 여성 청소년들이나, 노년기 여성 연구 등이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이를 위해선 선진국처럼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성의 성기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은 정상이다. 안 좋은 냄새가 나거나 분비물이 지나치게 많다면 질염 치료를 하면 된다. 시판 중인 외음부 세정제로 닦아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외음부 세정제의 광고문구들

여성의 성기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은 정상이다. 안 좋은 냄새가 나거나 분비물이 지나치게 많다면 질염 치료를 하면 된다. 시판 중인 외음부 세정제로 닦아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외음부 세정제의 광고문구들

■그곳에서 꽃향기는… 나지 않는 게 정상이다

‘여성건강’의 소외는 의학계만의 얘기가 아니다. 정부의 ‘안전관리’ 측면에서도 여성용품은 방치되기 일쑤다. 대표 사례가 ‘외음부 세정제’다. 성기에서 꽃향기가 나도록 해준다는 광고 문구를 내세운 세정제가 몸에 좋을까. 향을 첨가하게 되면 알레르기가 생기기 쉽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게다가 ‘청결 강박’을 자극하는 광고가 넘쳐나는 탓에 외음부뿐 아니라 ‘질 내부’를 닦아내려는 여성들도 있다. 실제로 여성용품 브랜드를 출시한 한 스타트업 대표는 “소비자 인터뷰를 하다가 질 안을 닦아내는 제품을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많아 당황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세계보건기구는 어떤 경우에도 처방 없이 질 내부 세정을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외음부만 가볍게 씻어내야 한다”면서 “‘바디 이미지’에 민감한 청소년층을 표적으로 음부 세정과 향 뿌리기를 권하는 광고가 많아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외음부 세정제는 질 점막에 영향을 끼치는 제품임에도 정부는 2008년부터 외음부 세정제(여성청결제)를 허가 심사를 거쳐야 하는 의약외품에서 제외하고, 화장품으로 분류했다. “화장품으로 분류해도 안전상 문제가 없다”는 업계 요청을 반영한 ‘규제완화’였다. ‘질 내부 세정금지’ ‘알레르기 유발 가능성’ 등의 주의사항 표기 또한 의무화돼 있지 않다. 외음부 세정제 시장은 점차 커지고 있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안전관리 차원의 주의 조치에 나선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다. ‘질 면역력 강화’, ‘항염’ 같은 의학적 표현을 사용한 469건의 광고를 적발해 ‘사이트 접속 차단’을 한 정도였다.

한국은 외음부 세정제뿐 아니라 성 윤활제까지 화장품으로 분류하고 별도의 안전검사 절차도 두지 않고 있다. 윤활제는 성관계 때 여성 성기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기 때문에 외음부 세정제보다 더 꼼꼼한 관리가 필요하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소비자가 안전한 제품을 고를 수 있도록 별도의 승인절차를 운영한다.

단종된 에스트로겐 크림. 약학정보원.

단종된 에스트로겐 크림. 약학정보원.

■꼭 필요한 에스트로겐 연고는 ‘단종’

외음부 세정제나 성 윤활제가 안전관리 ‘사각지대’에 있는 반면, 여성의 질 관리에 유용한 약제는 단종되는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할까.

질 입구가 막히는 소음순협착증이 발생한 어린아이나 완경(폐경) 이후 여성이 겪는 질 통증을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에스트로겐 연고’는 2015년 한국 시장에서 사라졌다. 건강보험 적용 단가(건강보험 재정으로 충당하는 비용)가 너무 싸게 책정돼 제약사가 생산·판매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김새롬 젠더와 건강연구센터 연구원은 “정부는 외음부 세정제, 성 윤활제 같은 것은 아무렇게나 팔도록 놔두면서 에스트로겐 연고같이 외국에서 널리 쓰이고 여성에게 꼭 필요한 의약품은 제대로 공급되도록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서 “의사결정자들이 여성의 건강에 제대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데다 여전히 성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사회억압이 이런 모순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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