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없던 ‘하나’가 계속 생겨야 더 좋은 세상이 됩니다

김소영

미래의 사람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을 때 한 여성이 아기를 안고 들어섰다. 그러곤 잠시 두리번대더니 한쪽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청소복을 입은 여성 두 분에게 다가갔다.

“저, 죄송하지만 제가 화장실이 급해서요. 아기를 좀….”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하는 얼굴로 보던 두 분은 곧 “그래요, 그래.” “여기 주고 어서 들어가요.” 하며 아기를 받아 안았다.

“맞아. 화장실 간다고 아기를 모르는 사람한테 맡길 수는 없지.”

“아기가 너무 예쁘네. 울지도 않고.”

두 분은 아기 엄마가 들어간 화장실 문 바로 앞에서 아기를 어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두 분도 사실 ‘모르는 사람’이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아기 엄마를 안심시키려는 듯 일부러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도 보기 좋았다. 다급한 상황에서 거기서 일하는 분들에게 아기를 맡긴 것도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거기에 두 분이 계셔서 다행이었다. 내가 부탁을 받았어도 흔쾌히 들어 드렸겠지만 아무튼 나는 확실히 ‘모르는 사람’이니까. 따뜻한 장면이었다.

우리를 키운 세대가 새로운 것을 하나 두 개 만든 덕분에
우리가 달라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이제 ‘미래의 사람’ 어린이에게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다는
자부심도 우리가 갖게 되기를…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 ‘아기 아빠는 뭐하고 있지? 다른 가족들은? 같이 좀 봐주지’ 하는 생각이 지나갔다. 핵심은 그게 아닌데, 편협한 생각이었다. 아기 엄마(그러고 보니 그분이 엄마라는 보장도 없지만)가 아기와 단둘이 여행할 수도 있고, 중요한 건 그럴 때도 공공시설을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어서 어디선가 본 ‘가족화장실’이 생각났다. 나오면서 보니 그 휴게소에도 가족화장실이 있었고 그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가족도 있었다. 기다리는 가족에 비해 시설이 부족해 이용을 포기하는 가족들도 많을 것 같았다. 필요로 하는 사람의 수를 고려해 지은 걸까, 구색 맞추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아까 본 장면이 마냥 훈훈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분들은 “하나라도 있는 게 어디냐. 옛날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세상 좋아졌다.”고 할지 모르겠다. 어린이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많이 듣는 이야기다. 옛날에 비해 요즘은 어린이를 많이 “위해준다” “우리 자랄 때보다 많이 누린다”는 말. “솔직히 질투가 난다”는 분을 만난 적도 있다. 미술관, 연주회장처럼 문화예술을 즐기는 곳에서 어린이를 마주칠 때면 ‘나 어릴 때는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싶고, 조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 보면 ‘나도 어렸을 때 이런 걸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울컥해지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면서 “와, 요즘 어린이들 부럽다. 이렇게 좋은 책을 어렸을 때 읽었으면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같은 말을 농담 삼아 하곤 했다. 어린이들의 출발점이 나의 세대와 다르다는 게 좋기도 하고, 고백하자면 조금은 샘도 났다.

그래서일까? 어느 지면에서 처음 ‘어린이 시민’이라는 문구를 읽었을 때 솔직히 거부감이 들었다. 어린이를 ‘시민’이라고까지 하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나? 그렇다고 어린이의 권리를 제한하자는 건 아니지만… 알쏭달쏭했다.

아니, 사실은 알쏭달쏭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어린이를 시민으로 부르기 주저하는 것은 어린이가 사회활동(주로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책임으로부터도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마찬가지 상황의 어른, 예컨대 경제활동을 하지 않거나 어떤 의무를 다할 수 없는 형편의 어른을 두고 ‘시민이라니, 조금 지나친 말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린이도 시민이 되는 데 다른 조건은 필요없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 말고는. 어린이를 시민의 한 사람으로 의식하니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의 일반자료실 문 앞에 붙은 ‘어린이는 어린이자료실을 이용하라’는 안내가 눈에 띄었다. 어린이자료실에는 ‘어른은 일반자료실을 이용하라’는 안내가 없는데. ‘어린이자료실’은 어린이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 어린이의 공간을 제한하려고 만든 게 아니다. 어린이가 찾고 싶은 책이 일반자료실에 있을 수도 있고, 어린이도 나처럼 이 책 저 책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을 수 있다. 설마 어린이가 일반자료실에 들어가려고 할 때 실제로 막아서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 안내문을 보는 어린이의 마음은 어떨까? 공공시설에서 되도록 안 오기를 바라는 이용자가 되는 것은 분명 좋은 경험은 아닐 것이다.

얼마전에는 사망한 아동학대 피해자의 이름과 사진이 노출되는 뉴스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게시물을 보면서 피해자가 성인이어도 이만큼 적나라하게 사생활이 공개되었을까 생각했다. 사건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데 공감하면서도, 피해자가 얼마나 예쁘고 순진했는지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뉴스들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이 덕분에 보게 되는 건 어린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옐로카펫에서 기다려요”라는 표지를 보았다. 어린이들이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보도 안쪽에 서 있으라고 바닥에 큰 삼각형을 그린 것이다. 나는 어린이들에게 차도 가까이 서 있으면 위험하니 세 걸음 떨어지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렇게 시각적으로 안내된 걸 보니 반가웠다. 하지만 “노란 삼각형 안에서 기다려요”라고 하면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좋았을 것이다. 영문으로만 표기된 간판이나 ‘PULL, PUSH’ 같은 안내문을 볼 때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자주 다니던 길의 보도블록이 울퉁불퉁해졌다. 가로수의 뿌리가 넓게 뻗으며 땅이 솟아오른 것 같았다. 속으로 ‘세금을 어디다 쓰는 건지’ 같은 뻔한 불평을 하며 걷다가 길에서 넘어지는 어린이를 보았다. 아이 어머니는 한 손으로는 유아차를 붙잡고, 한 손으로 아이를 일으켰다. 이 길에서는 유아차를 끌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아차에 장본 것을 담고 가는 노년 여성도 눈에 들어왔다. 길이 좁아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길을 건너서 돌아가야 했다.

지하철에서는 휠체어 칸인데도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를 연결하는 어떤 장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발아래 틈이 넓은 문으로 아슬아슬하게 유아차를 끌고 타는 여성을 보고서였다. 어린이가 그 문을 이용할 때도 발이 빠질까 봐 무서울 것이다. 어렸을 때의 나처럼. 수년을 지하철로 출퇴근했고 지금도 제일 마음 편히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지하철인데 한번도 의식한 적이 없었다. 교통약자에 대해서는 뉴스에서 보고 들어서 나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더 가까이에서 봐야 했다. 장애인들의 ‘지하철 타기’가 곧 이동권 보장 ‘시위’가 되는 일도 그저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어린이와 가까이 지낸다는 것이 나에게는 세상을 새롭게 배우는 일이 되었다.

사실 이 글을 쓰려고 ‘고속도로 가족화장실’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다. 혹시 그사이에 수가 늘어났다거나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찾은 기사는 장애인 화장실을 ‘장애인도 사용할 수 있는 가족화장실’ 형태로 개조했는데 실제로는 휠체어가 움직이기 어려운 공간이라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름도 아예 ‘가족화장실’로 바뀌었고, 장애인들은 대기 시간이 더 길어져 불편을 겪는다고 기사에는 적혀 있었다. (에이블 뉴스, “장애인 불편 가족사랑화장실 재보수 약속 ‘어디로’ ” 2020·11·27) 장애인 화장실도, 가족화장실도 증설할 수는 없는 걸까? 둘을 합쳤으면 사용하기 더 편리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맥이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옛날에는 하나도 없던 그런 것’이 두 개, 세 개가 되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싶다. 우리를 키우고 가르친 세대가 그 없던 ‘하나’를 만든 덕분에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세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어린이에게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다는 데 자부심도 갖고 싶다. 촌스러운 말이지만 세상은 그런 식으로 좋아진다고 믿는다.

나는 특별히 의지가 강한 사람도, 낙천적인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앞날을 생각하면 캄캄해질 때가 더 많다. 그럴 때는 어린이처럼 오늘만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된다. 독서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빅 뉴스! 빅 뉴스가 있어요!”라더니 “오늘 학교에서 시력 검사 했는데 우리 반 ○○○이 이쩜영에 있는 새 맞혔어요!”라던 규민이처럼. “아까 놀이터에서 모기한테 두 군데나 물렸어요. 그래서 만져봤더니 기분이 엄청 좋았어요. 볼록볼록하고 통통해서 복숭아 같았어요” 하던 자람이처럼. 선생님들 앞에서 동아리 면접을 보고는 “잘하고 왔어요. 합격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그것보다 잘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걸로 일단 됐어요”라던 은규처럼. 요즘처럼 불안정한 때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을 때가 더 많다.

나는 평소에 어린이를 ‘미래의 희망’ ‘꿈나무’로 부르는 데 반대한다. 어린이의 오늘을 지우고 미래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연재를 마무리하는 이 글에서만큼은 조심스럽게 말해 보고 싶다. 어린이는 우리가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미래의 사람이다. 오늘의 어린이는 우리가 어릴 때 막연히 떠올렸던 그 미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을 때, 변화를 위해 싸울수록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미래에서 누군가가 와서 지금 이게 잘하고 있는 거라고, 미래에는 나아진다고 말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 미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어린이다. 어린이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고, 어린이가 ‘나답게’ 살 수 있게 격려하고 보호해야 한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 의견을 가질 수 있게 가르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시민으로서 존중하면서 어린이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어린이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미래가 바로 그러하듯이. <시리즈 끝>

▶김소영
[김소영의 어린이 가까이]옛날엔 없던 ‘하나’가 계속 생겨야 더 좋은 세상이 됩니다

독서교실에서 어린이와 함께 읽고 쓰고 배우고 가르친다. 비양육자로서, 돌봄과 교육의 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린이’에 관심이 많다. 어린이에게 좋은 세상이 어른에게도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어린이책 읽는 법> <말하기 독서법> <어린이라는 세계>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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