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스타트업이 수익 10% 성평등 활동에 쓰는 이유

주영재 기자
세이브앤코가 만든 콘돔 제품. 작고 세련된 틴케이스에 담아 여성들이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세이브앤코 제공

세이브앤코가 만든 콘돔 제품. 작고 세련된 틴케이스에 담아 여성들이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세이브앤코 제공

한국에서 성에 관한 물건은 모두 성인용품으로 취급받는다. 콘돔은 법적으로 의료기기이지만 사실상 성인용품 취급을 받는다. 포털에서는 성인인증을 해야 검색할 수 있다. 어른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성 경험은 성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2018년 ‘청소년 성관계 경험률’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학생 중 5.7%가 성관계 경험이 있고, 성관계를 시작한 평균 나이는 만 13.6세로 조사됐다. 터부시하기보다는 안전한 성관계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성 관련 용품은 누구나 친숙하게, 안전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남성의 관점에서 개발된 성생활품은 바뀔 필요가 있다. 콘돔에 사정 지연 효과를 노리고 국소마취성분인 벤조카인을 넣는 경우가 있지만 여성 입장에선 첨가하지 않는 게 좋다. 가려움증이나 붉은 반점 등 피부 과민 현상이 나타날 수 있고, 성관계 도중 마찰이 심하게 일어난 경우, 마취성분으로 인해 성기에 통증을 느끼지 못해 상처를 그대로 방치할 수도 있다.

성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고, 여성이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성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관심을 둔 회사가 있다. 창업 3년차를 맞은 세이브앤코이다. 이 회사는 한국사회에서 성을 바라보는 편견을 뒤집는다는 의미에서 영어의 편견을 뜻하는 ‘BIAS’를 거꾸로 쓴 ‘세이브(SAIB)’를 브랜드명으로 정했다.

■성에 대한 무지, 미덕 아냐

지난 3월 17일 서울 동작구 소재 여성창업공간 ‘스페이스 살림’에서 만난 박지원 대표(36)는 4년 전만 해도 자신이 성 관련 용품을 만드는 회사를 창업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전형적인 ‘한국형(K) 딸’로 자랐다고 말했다. “여고·여대를 나와 성에 관한 무지가 여성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환경에서 자랐다”는 뜻이다.

그랬던 그가 변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공부하고, 이어서 텍사스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에서 조교수로 6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스며든 변화였다. “미국에선 성인 여성이 성에 대해 무지한 건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무책임하고 창피할 일이지 전혀 미덕으로 강조되지 않는다. 그때 성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에 처음으로 굉장히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성생활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의 일부인데도 왜 부끄러워하고 금기시해야 하는지 의문을 갖게 됐다.”

한번 관심을 갖기 시작하니 성 관련 용품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는 걸 알았다. 먹는 것도, 화장품도 까다롭게 성분을 따지는 편인데 몸에서 가장 민감한 곳에 사용하는 성생활품은 알기도 어렵고, 선택지도 많지 않았다. 유해한 성분이 첨가된 제품이 유통되기도 했다. “여성 생식기는 점막으로 이뤄져 있어 화학성분이 피부보다 질 내에서 42배 더 흡수가 잘 된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먹었을 때보다 더 유해하다고 하는 전문가도 있다. 먹으면 소화 과정을 통해 유해성분을 걸러낼 수 있지만 질 내부에선 그런 해독작용 없이 바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성에 대해, 성 용품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해도 소비자의 입장에서였지, 사업을 벌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안식년을 맞아 2017년 한국에 돌아왔다. 한참 K뷰티가 해외에서 각광받으면서 화장품 브랜드가 우후죽순 생기던 때였다. 우연히 화장품 브랜드 종사자 모임에 끼게 됐는데 자신만 빼고 모두 남성이었다. 화장품 산업이 보기와 달리 남성 중심적으로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성평등 인식 개선과 제품 개발 함께 간다

결정적인 계기는 K뷰티는 이제 레드오션이 됐다면서 일본의 ‘수치시장’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수치시장은 여성이 그전까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수치스럽게 느끼게 해서 생겨난 시장을 말한다. 생식기나 유두가 나이가 들면 착색이 되는 건 당연한데도 이를 핑크빛으로 물들이는 크림 제품을 들 수 있다. 박 대표는 “민감한 부위를 염색하고 미백하는 게 좋을 리가 없다. 여성의 불안한 심리를 조장해 문제가 되지 않는 걸 문제로 인식하게 해 돈을 벌겠다는 발상에 몹시 화가 났다”고 말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실 진짜 필요한 건 여성 건강을 배려한 성생활용품이다. 좋은 성분의 제품을 만들면 만들었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국에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날 모임에 함께했던 친구가 연락했다. 문제의식에 공감하는데 콘셉트와 디자인을 정해주면 자신이 그에 맞춰 브랜드를 만들어보겠다는 제안이었다. 원하는 대로 해줬지만 다시 연락이 왔다. “‘네가 아니면 진정성이 전달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이었어요. 그때 잘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유통과 제조, 연구 분야에서 좋은 분들을 연결해줘 창업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이 몇년 사이에 훌쩍 성장해 전문 디자이너로 활약하는 걸 보고 자신도 30대가 지나가기 전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도 창업을 부추겼다.

그는 성에 관한 인식 개선과 여성이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든다는 두 단계로 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인식 개선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판매까지 이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이 회사는 수익금의 10%를 성평등과 건강한 성문화를 위한 활동에 쓰고 있다. 웹진 ‘세이브-세이드’(SAIB-SAID)를 발간해 여성에게 필요한 젠더 이슈와 알고 싶어도 부끄러워 물어보기 어렵거나 찾기 어려운 여성의 성에 관한 정보를 알려준다. 제품을 청소년 단체나 성교육 단체, 여성단체에 기부하는 활동도 하고 있다.

하지만 인식 개선에서 가장 큰 장벽은 피상적이고 원론적인 내용만 다루는 성교육이다. 미국에선 피임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콘돔을 올바로 착용하는 실습까지 포함하는데 한국에선 임신 과정을 설명하거나 성관계는 성인이 되기 전에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도덕 교육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피임에 필수적인 콘돔을 도덕적 잣대로 다루는 것은 특히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처음엔 법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법적으론 아무 제약이 없었다. 그럼에도 도덕적 잣대로 광고나 검색에서 제약이 많은데 그게 외려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성인인증을 해야 볼 수 있다면 아이들은 당연히 콘돔을 살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교복 입은 아이에게 부모된 마음으로 팔지 않겠다는 편의점주도 있다. 전 그게 안전한 성생활에 심각한 위협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세이브앤코는 여성을 위해 여성이 만든 제품을 표방한다. 기존 제품이 남성 위주로 제조되는 상황에서 우리만큼은 여성을 위한다고 외쳐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모든 의사결정 단계에서 여성의 건강을 중심에 두고 있다. 불필요한 화학성분과 첨가물을 빼고 포장도 최대한 간결하게 만든다. 콘돔도 천연 라텍스 성분 외에 안전성 검증이 안 된 첨가제는 다 뺐다. 외음부에 사용하는 여성 청결제도 10가지 천연 성분으로만 만들었다. 현재 출시를 준비하는 러브젤 제품에도 여성 질 건강에 좋은 락토바실러스균과 요도 건강에 좋은 안토시아닌을 함유한 크린베리를 혼합한 성분을 사용할 계획이다.

회사 직원 10명은 모두 여성이다. 브랜드의 목표 고객과 임직원의 구성이 정확히 일치한다. 밀레니얼 여성과 그보다 조금 어린 Z세대이다. 박 대표는 “상품을 기획할 때도 우리가 쓰고 싶은 제품인가, 우리가 친구에게 자신 있게 추천할 제품인가를 고민한다. 캠페인과 이벤트를 기획할 때도 우리가 참여하고 싶은가를 기준으로 잡는다”고 말했다.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앞줄 오른쪽 두번째)와 직원들이 함께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앞줄 오른쪽 두번째)와 직원들이 함께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밀레니얼 핑크

디자이너 출신답게 제품의 주요 디자인은 모두 박 대표 손끝에서 나왔다. 디자인 관련 수상 상패는 사무실 책장 하나를 꽉 채우고 있었다.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레드닷·IDEA·IF)에서 수상했고, 국내에서도 2019년 굿디자인(GD) 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박 대표는 “대통령상을 받은 LG전자 롤러블 TV에 이어 퍼시스 오피스형 소파와 공동으로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대기업 사이에서 우리같이 작은 스타트업이 큰 상을 받은 게 의미가 있었고, TV와 가구 사이에 콘돔이 딱 들어가 남달리 뿌듯했다. 시상식에 참여한 분들이 신기해하면서도 민망해하는 게 재미있었다”고 회상했다.

제품은 물론 사무실 공간을 지배하는 밀레니얼 핑크는 화사하면서도 촌스럽지 않은 세련미가 돋보였다. 초기의 페미니즘이 핑크빛을 고정된 여성성을 상징하는 색으로 거부했던 것과 달리 세이브앤코는 핑크를 전면에 내세운다. 박 대표는 “과거엔 여성스러움을 거부하고 남성처럼 보여야 남성과 동등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오히려 성숙한 단계로 진입해 내가 여성성을 좋아하면 여성성을 유지할 수 있고, 그걸 거부하고 싶으면 거부할 선택지도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는 남녀가 모두 좋아할 수 있는, 포괄적인 성을 상징하는 색이 밀레니얼 핑크라고 강조했다.

그는 세이브가 고객과 함께 나이를 들면서 그들의 다양한 필요를 해결해주는 브랜드로 성장하고 싶다는 바람을 표했다. 회사 내부적으론 여성이 일하기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회사의 성공을 평가하는 다양한 잣대가 있을 수 있지만 전 우리 회사에 취업했다고 할 때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이 ‘정말 좋은 곳에 취업했구나’라고 인정해주는 회사로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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