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떡' 백신휴가, 일방적인 접종일 지정...두 번 우는 택배노동자들

강은 기자
서울 송파구 서울복합물류센터에서 쌓여 있는 택배 물품들.

서울 송파구 서울복합물류센터에서 쌓여 있는 택배 물품들.

경기도 지역에서 일하는 택배노동자 이모씨(39)는 지난 19일 코로나19 백신을 맞고 다음날 평소와 똑같이 출근해 일하다 쓰러졌다. 오전 10시45분쯤 물류 분류작업을 하던 중 오한 증상을 보이며 현장에서 의식을 잃었다. 다행히 회복했지만 동료 노동자들은 ‘예견된 사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씨의 동료는 21일 경향신문과 통화에서 “정부에서 권고한 ‘백신휴가’를 택배노동자들이 누리지 못한 결과”라며 “이미 다른 동료들도 접종 후 발열과 오한 증상을 호소해 이러다 쓰러지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했는데 바로 주변에서 발생했다”고 말했다. 백신을 맞은 뒤 이상증상이 나타났지만 스스로 링거를 맞고 현장에 복귀한 택배노동자도 있다고 한다.

서울시·경기도는 지난 13일부터 택배노동자 등 고위험직군을 선별해 백신우선접종을 실시하고 있다. 정부는 ‘백신휴가’를 권고했지만 택배노동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택배노동자 한 명에게 할당된 택배물량은 하루 평균 300건이다. ‘백신휴가’를 가려면 스스로 ‘대체인력(용차)’을 구해 이 물량을 소화해야 한다. 이들이 계약을 맺고 있는 택배대리점도 본사로부터 당일 배송 압박을 받는다. 백신을 맞은 택배노동자가 다음날에도 울며 겨자먹기로 일터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문상욱 전국택배노조한진기흥지회장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상을 치르고 와도 용차 비용을 내라고 하는데 백신휴가를 쓸 엄두가 나겠느냐”며 “본사가 대체인력을 마련해두고 비상시 투입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택배 물량이 몰리는 날과 접종일자가 겹치는 경우도 흔하다. 언제 백신을 맞을 지 스스로 정할 수 없어 생기는 일이다.

서울 강남지역에서 택배노동자로 근무하는 박승환씨(37)는 “지역 예방접종센터에서 지난 화요일에 접종을 하라고 통보가 왔다. 화요일은 주말 동안 쏟아진 고객사 주문 배송을 완료해야 하는 가장 바쁜 날이어서 날짜를 변경하려고 센터에 100여 통 넘게 전화했는데 연결되지 않았다”며 “대리점을 통해 항의한 뒤에야 간신히 토요일로 날짜를 조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정사업본부 산하 기관 우체국물류지원단과 위탁계약을 맺고 일하는 A씨도 “아무런 상의 없이 월요일로 접종 예약이 잡혀 있었다”면서 “우체국물류지원단 측에도 이런 상황을 설명해봤지만 ‘알아서 하라’는 반응만 돌아왔다”고 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자치구별 예방접종센터에서 개개인의 사정을 다 고려해 접종일자를 정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며 “지역 예방접종센터에 과부화가 걸리다 보니 민원 전화를 일일이 응대하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전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정책국장은 “정부가 백신휴가를 권고만 하나보니 택배기사들처럼 불안정한 노동자들에게는 실효성 있는 제도가 되지 못하고 있다”며 “노동자들이 업무처리에 지장이 생길 것을 걱정하다 보면 백신 접종 자체를 꺼릴 수 있고, 결과적으로 접종률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