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침략 증거 지키는 일본인 “한국은 왜 스스로 피해 증거를 파괴하나”

김찬호 기자
기쿠치 미노루 중국 허베이 외국어대 교수 / 기쿠치 미노루 제공

기쿠치 미노루 중국 허베이 외국어대 교수 / 기쿠치 미노루 제공

밝은 역사는 부각하고 어두운 역사를 감추고 싶은 것은 민족국가의 숙명이다. 국민이 자국 역사에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국가 존립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역사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이 작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작업을 주변국과의 마찰도 불사하고 추진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 수정주의’, ‘역사왜곡’이라 부른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우경화하고 있는 일본은 해당 사례의 대표적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돕는 것이 ‘한국’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정부기관이 앞장서 일제강점기 수탈의 증거를 조사 한번 없이 파괴하려는 것이 현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경향신문이 연속 보도한 ‘인천 일본육군조병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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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위기에 직면한 인천 조병창을 지키려는 것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토론회, 기자회견, 시위 등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인천 조병창을 힘겹게 지키고 있다. 하지만 개발 논리는 이들의 의지를 무겁게 짓누른다. ‘역사’보다 귀한 것은 현시대 사람들의 ‘이익’이라는 논리가 모든 문제의식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존’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어쩌면 조병창이 아닌 ‘피해국의 자존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을 돕는 사람 중에는 ‘일본인’ 기쿠치 미노루 중국 허베이 외국어대 교수가 있다.

기쿠치 교수는 국내 문화유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름이다. 일본 군마현 매장문화재조사사업단에서 34년간 일하며 일본 내 전쟁유적 보존에 앞장섰다. “일본인이 남의 나라를 침략했던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지적은 이미 국경을 초월해 있다. 또, “일본인의 전쟁기억이 한국, 중국과 다르다”는 비판은 역사문제를 감정이 아닌 객관적 시각으로 봐야 할 필요성을 잘 보여준다.

인천 조병창 철거에 반대해 국내 강연에도 나서고 있는 기쿠치 교수와 지난 10월 26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쿠치 미노루 제공

기쿠치 미노루 제공

-일본인의 ‘전쟁에 대한 기억’이 다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기쿠치 “일본에서 전후 70년을 이야기할 때는 일본 본토(내지)와 본토 외 지역(외지)을 구분해 말한다. 본토의 경우 1944년 6월부터 본격화된 미군 B-29 폭격기에 의한 공습 피해 기억이 주가 된다. 1945년 3월부터 시작된 오키나와전, 육해군 항공기에 의한 특공작전 그리고 본토 결전 준비 등도 대표적인 전쟁기억이다. 외지의 경우에는 1942년 미드웨이 해전부터 남태평양 최대의 격전지 중 하나인 과달카날전, 전후 시베리아 억류 기억 등이 대표적이다. 즉 전쟁을 직접 겪은 일본인들 대부분 ‘전쟁의 희생자’라는 감정기억 인식이 강하다.”

-이는 피해국인 한국, 중국의 ‘전쟁기억’과는 상당히 다른데.

기쿠치 “한국은 1910년부터 시작된 36년간의 식민지 지배 기억을 갖고 있다. 일제가 나라를 빼앗고 인간의 존엄을 박탈했으며 언어와 이름도 빼앗아갔다는 기억이다. 폭력적 지배와 토지수탈, 황민화 정책에 의한 조선어 금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도 1931년 만주사변 등의 침략전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기억이 있다. 일본인의 피해자 인식은 당시 일본 정부 특히 군부에 대한 혐오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가해자로서의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기억을 둘러싼 국가별 간극은 커지는 것 아닌가.

기쿠치 “그와 관련해 국가 차원의 토론회도 진행된 바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국가 차원의 합의를 기다리기보다 시민사회 차원에서 각 지역에 남은 전쟁유적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활동부터 시급히 시작해야 한다. 일본의 패전 이후 70여년이 지났다. 이 세월은 전쟁을 직접 체험한 세대가 남긴 ‘기억’이 풍화되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다. 결국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전쟁 실상을 다음 세대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방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전쟁기억’이 새겨져 있는 일본 각지와 해외의 ‘전쟁유적’을 보존하고 활용해야 한다. 전쟁유적은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 동북부에 수많은 전쟁유적이 남아 있고, 출토된 유물들은 중국의 문화재로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동남아시아 각국에도 일본군에 의한 현지주민 학살 기림비가 있다. 전쟁유적은 근대 일본의 역사와 아시아 각국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유적이다. 역사를 가해와 피해의 양면에서 바라보게 하고, 아시아 전체의 움직임 속에서 고민해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전쟁유적이다.”

-전쟁유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기쿠치 “전쟁기억이 각인된 전쟁유적이라 함은 근대 일본의 침략전쟁과 그 수행과정에서 형성된 것들을 말한다. 따라서 시대 범위로 따지면 일본의 막부 말·개국 무렵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결 때까지가 된다. 조사 연구 지역은 일본 국내에 한정되지 않고 한반도, 중국, 동남아시아, 서태평양지역, 즉 아시아·태평양 전 지역에 이른다. 일본을 예로 들면, 2021년 8월 기준 전쟁유적으로 국가 지정문화재 40건, 현 지정 18건, 시구정촌 지정 141건, 국가 등록문화재 94건, 시구정촌 등록문화재 15건, 도 유산·시민문화자산 11건 등 총 319건이 지정돼 있다. 1990년 오키나와현에서 처음으로 전쟁유적 ‘하에바루 육군병원’을 문화재로 지정했다. 5년 뒤 ‘특별 사적·명승 천연기념물 지정기준’ 일부가 개정돼 제2차 세계대전 종결까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에 걸친 주요 유적이 사적 지정 대상이 됐다. 이에 따라 히로시마 원폭 돔이 국가 사적이 됐고, 이듬해에는 세계유산에까지 등재됐다. 일본은 히로시마 원폭 돔으로 대표되는 피해 유적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조사와 보존을 진행해 왔지만 가해에 관한 유적, 예를 들면 당시 조선인이나 중국인의 강제동원 증거인 지하공장에 대해서는 대응이 소극적인 상황이다.”

지난 10월 14일 인천 일본육군조병창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모여 조병창 존치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시민대책위원회 제공

지난 10월 14일 인천 일본육군조병창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모여 조병창 존치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시민대책위원회 제공

-일본에는 과거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입장이 있지 않나.

기쿠치 “최근 일본에서도 전쟁 관련 유적과 유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역사적 유적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나타나면서 크고 작은 문제도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시마네현에 있는 구 일본 해군의 ‘다이샤 기지’와 히로시마시에 있는 구 일본 해군 ‘보충대 시설’ 터다. 보존을 주장하는 쪽은 다음 세대에게 전쟁의 참상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절실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최근 일본사회의 우경화와 ‘전쟁 포기’를 담은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일각에서 ‘전쟁유적’을 ‘군사유적’으로 부르는 움직임도 있다는데.

기쿠치 “군사유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다. 이런 인식은 매우 위험하다. 전쟁을 전체 틀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 군사부문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것이다. 실제로 전쟁유적이라고 하면 전쟁에 관련된 모든 유적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예를 들어, 일본 메이지 시대 이후 군 사단이나 연대에 관한 유적, 연안 요새, 육해군의 공창 터, 기지, 포로수용소 등이 다 포함된다. 그런데 군사유적이라고 하면 전쟁과 관련된 부정적 기억은 그 꼬리표를 떼고, 오직 군사활동만 소개하게 된다. 최근 일본 자위대 간부학교나 방위대학교 관계자들로부터 ‘근대 군사유산은 대동아전쟁 당시 우리들의 선조, 선배들이 일본을 지켜내려 했던 증거’라며 ‘지자체가 각각의 군사유산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보존에 힘써주길 바란다’는 말을 들었다. 이들은 오키나와의 전쟁유적이나 전국에 산재해 있는 공습 흔적 같은 비군사시설(민간시설)을 일본을 지키려 한 긍정적 군사활동으로 변모시키고, 강제동원 현장인 지하공장 같은 유적은 지워버리려고 한다. 쉽게 말해, 군사유적이라는 시점으로는 일본 국내외에 남겨진 전쟁 당시 유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기쿠치 미노루 교수가 참여한 한반도 전쟁유적 관련 심포지엄 포스터 / 부평문화원 제공

기쿠치 미노루 교수가 참여한 한반도 전쟁유적 관련 심포지엄 포스터 / 부평문화원 제공

-인천에 있는 일본육군조병창도 전쟁유적 아닌가.

기쿠치 “그렇다. 인천 조병창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알리는 주요 증거다. 일본에도 조병창과 관련된 시설이 일부 보존돼 있다. 인천 조병창이 보존된다면 한일 양국의 다음 세대들이 수학여행 같은 것을 통해 침략전쟁의 실상을 생생하게 확인하고 공부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천 조병창은 한국 지자체에 의해 철거될 위기에 놓였는데.

기쿠치 “그토록 쉽게 파괴해 버린다면 한국의 다음 세대에게 침략의 역사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지 않겠나. 일본인들이 남의 나라를 침략했던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같이 중요한 시설은 꼭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내에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 관심을 갖고 협력하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역사의 화해는 세대를 뛰어넘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조병창 같은 건물을 남겨 한일 양국의 다음 세대가 전쟁의 참상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궁극적으로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계기로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왜 일본에 부정적인 전쟁유적을 보존하려고 그토록 노력하나.

기쿠치 “전쟁유적들이 언젠가 우리 모두가 화해(가해와 피해, 사죄와 보상)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 일본이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로 아시아인들에게 치유하기 힘든 고통을 주었다는 것부터 알릴 필요가 있다. 전쟁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장소, 유적, 유물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계속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전쟁을 말하는 장소로써 전쟁유적을 끝까지 지켜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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