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속 흥신소 클리셰, 이제는 바뀌거나 사라져야 할 때

칼럼니스트 위근우

뒷조사, 드라마로 치부하기엔 현실이 너무 무겁다

흥신소를 통해 누군가의 신원이나 행적을 파악하는 장면은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에도 나온다. tvN 드라마 <불가살>에서 ‘불가살’의 저주를 받은 단활(이진욱)은 흥신소 사장에게 금괴를 건네며 600년간 죽음과 환생을 반복해온 민상운(권나라)을 찾아달라고 요청한다.

흥신소를 통해 누군가의 신원이나 행적을 파악하는 장면은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에도 나온다. tvN 드라마 <불가살>에서 ‘불가살’의 저주를 받은 단활(이진욱)은 흥신소 사장에게 금괴를 건네며 600년간 죽음과 환생을 반복해온 민상운(권나라)을 찾아달라고 요청한다.

이번 칼럼에선 두괄식으로 미리 핵심 결론을 이야기하겠다. 앞으로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흥신소를 통해 누군가의 신원이나 행적을 파악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거나, 철저히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재현되거나,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합법적으로 처리되는 과정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현실 세계에서 한 스토킹 범죄자가 신변보호 중이던 여성의 거주지를 흥신소를 통해 알아내 그의 모친을 살해하고, 흥신소에 그 정보를 2만원에 팔았던 구청 직원은 2년간 같은 짓으로 3000만원이 넘는 돈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그러하다. 그동안 흥신소를 통해 불법적인 정보를 취득하는 과정은 한국 드라마 안에서 일종의 장르적인 클리셰로 통용되어왔다. 최고 시청률 40%를 넘겼던 KBS2 <내 딸 서영이>에서 주인공 이서영(이보영)의 비밀을 알기 위해 강우재(이상윤)는 흥신소를 통해 서영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받아보고 그가 여동생 강미경(박정아)의 애인이던 이상우(박해진)의 누나였음을 알게 된다. 그 증명서는 얼마짜리였을까. MBC 일일드라마 <엄마의 정원>에서도 김수진(엄현경)이 남편의 외도 상대인 나혜린(유영)의 신상명세서를 흥신소를 통해 전달받는 모습이 나온다. 그건 또 어떤 공무원의 손에서 전달된 걸까. 3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던 MBC <전설의 마녀>에선 마주란(변정수)이 흥신소 직원들을 통해 이복동생 약혼자의 조카가 실은 조카가 아닌 자식임을 유전자 검사로 알아낸다. 당사자 동의 없는 친자 확인이 불법이라는 건 밝혀진 출생의 비밀 앞에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외에도 흥신소 직원이 의뢰인 지시로 누군가를 미행해 밀회 사진을 찍어오는 장면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없이 재현됐다. 케이퍼 무비에서의 전능한 해커 캐릭터가 그러하듯, 드라마 속 흥신소 직원은 누군가의 숨겨진 개인정보를 밝히는 매우 편의적인 장치 역할을 해왔다.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과연 그 정보는 어디에서 왔던 것인지, 그래도 되는 것인지.

드라마 속 흥신소 의뢰 장면에서 흔히 등장하는 단서는 오래된 인물 사진이다.

드라마 속 흥신소 의뢰 장면에서 흔히 등장하는 단서는 오래된 인물 사진이다.

현실의 맥락에서 충분히 분리되어
부담 없이 사용되던 클리셰라 해도
새로운 경험 세계와 접촉할 때는
그 맥락 안에서 새로이 해석되고
전에 없던 책임을 져야 할 수도

픽션 속 흥신소의 모습이 그들의 불법 행위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보단 현실의 맥락으로부터 충분히 분리되어 부담 없이 사용되던 클리셰라 해도 새로운 경험 세계와 접촉할 때 그 맥락 안에서 새로이 해석될 수밖에 없고 전에 없던 윤리적 부담과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드라마 속 흥신소와 의뢰인의 모습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불법적이고 부도덕하지만, 그것이 충분히 현실과 괴리된 그저 장르적인 관습이라는 믿음 위에서 그럭저럭 불편함 없이 소비될 수 있었다. 어떤 클리셰가 빤하고 따분할지언정 서로 합의된 놀이 규칙으로서 매끄럽게 작동하기 위해선 그 놀이와 규칙이 서로에게 충분히 안전하다는 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감각은 주관적인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와 경험적 근거의 문제다. 가령 한국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성을 벽에 밀치거나 손을 잡아끄는 장면은 창작자가 아무 고민 없이 반복하는 공식이란 점에선 클리셰가 맞지만, 그저 로맨스 장르에서의 관습으로 허용해주기엔 현실에 상존하는 여성 대상 폭력과 밀접한 유사성을 보인다. 그럼에도 현실로부터 분리해 이것은 폭력이 아닌 과장된 낭만이라 말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탈맥락화가 아닌 기만에 불과하다. 흥신소의 활용도 마찬가지다. 쉽게 소비하고 쉽게 잊어도 됐던 전과 달리 이제는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를 의뢰인에게 불법적 과정으로 얻은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를 현실 맥락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해석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드라마 속 흥신소 활용도 마찬가지
어떤 일 저지를지 모를 의뢰인에게
불법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를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제는 해석의 무게 감당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한국 코미디 영화 중 손꼽히는 수작이라 생각하는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도 흥신소 클리셰는 반복된 바 있다. 남주인공 황대우(박용우)는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애인 이미나(최강희)에게 수상함을 느끼고 흥신소를 통해 그의 과거 결혼 사실과 남편 살해 혐의 및 무죄 판결에 대해 알게 된다. 관객들은 대충 알고 있지만 정확한 내막은 모르고, 대우는 아예 모르고 있었지만 어느 시점에 알아야만 하는 정보를 자연스럽게 노출하기에 흥신소는 매우 편리한 장치다. 하지만 이젠 그들이 과연 어떻게 정보를 입수했는지, 과연 그러한 정보가 대우처럼 까칠하지만 선한 인물에게만 전달될 것인지 생각하지 않고 보기란 어려워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생각하지 않고 보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현실의 사건과 실재하는 두려움만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세계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것이 너무 자기편의적인 해석임을 인정한다면, 이 스치듯 짧고 다분히 기능적인 장면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어느 정도 상호 구속적인 연인 관계라 해서 뒷조사를 통해 과거를 샅샅이 알 권리가 생기는가? 그런 뒷조사를 의뢰한 대우를 마냥 찌질하지만 순박한 인간으로만 보고 서사를 해석해도 되는가?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알고 배신감을 느낀 대우의 이후 행동을 우리는 긴장하지 않고 봐도 무방한가? 이러한 질문들이 단 한 신을 근거로 <달콤, 살벌한 연인>을 쓰레기나 보이콧의 대상으로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우리가 작품 해석을 위해 서로 공유한다고 생각했던 순진한 배경적 가정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작품은 말하고자 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실토하게 되며, 우리는 작품이 가르치려 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앞서 두괄식으로 내놓은 제언이 소위 ‘캔슬컬처(Cancel Culture)’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여져선 안 되는 건 그래서다. 흥신소 클리셰는 주관적으로 불편하니 치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창작자는 흥신소의 불법 행위를 더는 탈맥락화된 클리셰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 맥락의 변화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세계를 설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재하는 폭력을 재현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 폭력을 그저 허구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맥락 위에서 과연 어떤 실천적 효과가 생길지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면, 그게 소통에 참여하는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당연한 화용론적 부담이기 때문이다. KBS 코미디 서바이벌 프로그램 <개승자>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개그맨 김준호는 공개 코미디가 몰락한 이유에 대해 “개그는 개그일 뿐인데, 다 비하로 본다. 우리는 비하할 의도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창작자에게 유별나게 까다로운 기준이 제시되는 게 아니다. 창작자라고 해서 화용론적 맥락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도만으로 평가받는 특혜를 누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한국 드라마 속 흥신소든, 한국 코미디의 외모 비하 개그든, 박태준 만화에서의 일진 놀음이든,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의 타임슬립이나 환생이든, 수많은 장르적 문법이 각각의 세계 안에서 자체적으로 완결된 놀이 규칙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건, 장르적 세계가 현실과 온전히 분리된 허구여서가 아니라, 그래도 된다는 합의가 현실 세계에 암묵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흥신소와 불법 자료 유출 사건처럼, 그 합의 자체를 의문시할 강한 계기가 마련됐을 때 작품을 이해할 배경으로서의 세계는 재구성되며 작품의 의미 역시 변화한다. 클리셰는 근본적으로 게으른 것이지만, 이러한 변화마저 무시할 만큼 게을러지면 더는 소통이 불가능한 지경으로까지 도태된다. 그러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나는 애정이라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검열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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