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짐’없는 삶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

김태훈 기자
서울의 한 대형마트를 방문한 소비자가 진열된 탈모 관련 제품을 보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울의 한 대형마트를 방문한 소비자가 진열된 탈모 관련 제품을 보고 있다. / 연합뉴스

방금 받아온 처방전이라고 했다. ‘L64.9’라는 질병분류기호가 찍혀 있다. ‘상세불명의 안드로젠탈모증’, 보다 일반적인 말로 풀어쓰면 남성형 탈모증이다.

서울 종로5가는 이와 같은 탈모증을 앓는 이들의 ‘성지’로 통한다. 전국에서 가장 싼 약값을 자랑한다는 이 거리 주변의 약국들과 대표적인 ‘탈모 처방 전문’ 의원 2곳을 순례하려 탈모인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30대 직장인 서모씨는 남성형 탈모증의 진행을 막아주는 ‘피나스테리드’ 성분이 들어간 3개월치를 의사로부터 처방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탈모인의 ‘성지’ 종로5가

“약을 먹은 지는 5년쯤 됐어요. 그 전엔 다들 그러듯이 탈모에 좋다는 샴푸도 써보고, 검은콩이 들어간 음식도 먹어보고 그랬죠.”

병원에서 나와 약을 사러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서씨는 익숙한 걸음으로 지척에 있는 약국에 들어가 약사에게 처방전을 내밀었다.

그에게 본격적인 탈모의 위기감이 찾아온 건 8년 전이었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보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5년 전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다. 종로5가의 의원과 약국을 알고 찾게 된 건 3년 전쯤부터였다.

서울은 물론 전국의 탈모인들이 종로5가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가격이다. 의원 2곳과 약국 2곳이 특히 유명하다. 남성형 탈모증 때문에 약 처방을 받으러 왔다고 하면 의원에선 짧게는 3개월부터 길게는 1년치까지 처방전을 발급해준다. 3개월 처방전을 끊으려면 5000원만 내면 된다. 탈모인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이보다 더 싼 가격으로 처방전을 발급하는 의원들도 찾아내 정보를 공유한다. 발급받은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면 최저가로 한알에 350원까지 내려간 피나스테리드 성분 함유 탈모치료제를 살 수 있다. 한달치 약값과 처방료를 더해도 1만원대 초반이면 해결할 수 있는 셈이다.

서울 종로구의 한 약국에서 약사가 시판 중인 탈모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의 한 약국에서 약사가 시판 중인 탈모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유력 대선후보가 탈모인들을 위한 공약을 내놓으면서 논쟁이 커지고 있다. 탈모가 단순히 미용상의 문제인지 적극적 치료가 필요한 질병인지를 따지는 논쟁이 가장 두드러진 양상이다. 탈모약을 건강보험 급여항목에 포함시킬지 여부를 놓고 ‘미용 대 질병’ 구도를 형성하고 있어서다. 탈모 논쟁이 건드리는 영역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일례로 탈모가 신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보다 탈모가 초래하는 사회적 차별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탈모 치료에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한다면 더 위급한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나, 혹은 탈모처럼 미용과 질병의 어느 한쪽으로 명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비만 등의 다른 질환은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표도 따라온다.

범위를 좁혀 ‘탈모 논쟁’부터 먼저 들여다보자. 탈모증 하면 일반적으로 안드로젠, 즉 남성호르몬의 일종이 체내에서 변환되면서 모낭을 자극해 머리카락 수를 줄이는 일반적인 남성형 탈모증을 일컫는다. 이는 외모 변화에 따른 심리적 충격과 그로 인한 사회적 불이익과 차별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지만 실제로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반해 전체 탈모 관련 질환 중 가장 높은 내원 비율을 차지하는 원형탈모증을 비롯해 신체적인 영향이 큰 여타의 탈모질환은 치료를 필요로 하기에 대부분 건강보험 급여 적용 대상이다.

■대권후보의 탈모 공약 화제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받지 못하는 탈모증 치료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답을 구하기 전에 최근 들어 탈모인들이 부담해야 할 치료비가 크게 낮아진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국내에서 탈모치료제 중 처방을 받아야만 구입·복용할 수 있는 전문의약품은 피나스테리드와 두타스테리드, 딱 두 종류뿐이다. 오리지널 약의 이름인 프로페시아와 아보다트로 유명한 두 약은 신약 특허 만료 이후 경쟁적으로 복제약(제네릭)이 쏟아져 나오면서 가격이 크게 낮아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시적으로나마 비대면 진료가 허용되면서 먼 거리를 이동해 직접 종로5가처럼 약값이 싼 지역을 방문하지 않아도 약값 부담을 낮출 수 있는 방법도 생겼다. 비대면 진료 앱을 설치한 뒤 화상 또는 음성으로 의사의 진료를 받고 처방받은 약을 약국에서 구매하는 일까지 앱을 통해 한 번에 처리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다양한 업체에서 내놓은 비대면 진료 앱들이 경쟁하고 있지만, 특히 탈모 치료의 비대면 수요가 높아 어떤 앱을 이용하더라도 해당 진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과 약국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탈모인 커뮤니티 등에서 인기가 높은 병원과 약국을 선택하면 종로5가의 탈모약 가격과 비슷한 선에서 치료비 해결도 가능하다.

1년치로 기간을 늘려보자. 종로5가에 있는 의원과 약국에 직접 들러 진료를 받고 약을 사면 피나스테리드 성분 기준 1년치 약을 구하는 데 13만원 정도 들어간다. 비대면 진료 앱을 이용하면 14만원 정도에 1년치 약을 배송받을 수 있다. 대부분의 탈모인이 종로5가처럼 최저가에 가깝게 약을 살 수 있는 지역 가까이에 살고 있지 않아 근처 의원과 약국을 이용하느라 한달치 약값과 진료비에 보통 3만~5만원 지출하는 걸 감안하면 비대면 진료 앱의 경쟁력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향후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끝나면 이전처럼 비대면 진료에 제약이 따르겠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전국의 탈모인들이 값싼 탈모약을 배송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셈이다.

실제로 탈모인 중에서도 탈모약에 건강보험을 적용해 약값 부담을 낮추겠다는 공약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 공약이 과연 다른 공공보건 정책보다 더 무게 있게 다뤄야 할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탈모를 바라보는 사회 전반의 차별적인 시선 자체가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모발이식 수술을 위해 탈모증 환자의 머리에서 모낭을 채취하고 있는 모습 / 분당서울대병원 제공

모발이식 수술을 위해 탈모증 환자의 머리에서 모낭을 채취하고 있는 모습 / 분당서울대병원 제공

■“생존 위해 머리 심었어요”

“굳이 머리를 심은 이유는 연애와 결혼 때문이죠. 아무리 건강한 유전자라고 해도 후대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대에 끝나버리는 거니까.”

한 제약업체에서 일하는 직장인 이모씨(39)는 7년 전 모발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결심할 당시 남성형 탈모 때문에 이마와 모발 경계선은 이미 뒤로 한참 밀려나 있었다. 시중의 탈모약을 복용해도 이미 후퇴한 모발 경계는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의사의 얘기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는 앞서 20대 초반 군 복무 시절부터 정수리 부분을 중심으로 갑작스러운 탈모를 겪었다. 약을 복용하면서 상태가 호전되긴 했지만 이후 방심하고 약 복용을 중단했다가 이마가 넓어지는 이른바 ‘M자형 탈모’와 맞닥뜨려야 했다. 결국 해결방안은 가발 아니면 모발이식밖에 없었다.

이씨는 20대의 대부분을 탈모에서 비롯된 외모 고민으로 보냈다고 했다.

“진화는 어찌 됐든 생존에 성공하는 자연선택을 통해 이뤄지잖아요. 일단 한 생물 개체로서의 저는 생존에 문제는 없었지만 번식에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게 뻔해 보였어요. 성 선택 자체를 받을 수가 없을 것만 같더라고요. 대머리니까.”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했다는 그는 탈모가 이성과의 만남 자체를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위협이었다고 했다. 탈모인이라고 건강문제를 겪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보는 사회의 시선과 차별,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결코 간단치 않았다고 그는 호소했다.

“그런 면에서 약값을 좀 줄이는 것을 넘어 이번 논쟁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탈모를 바라보는 인식과 차별문제까지 폭넓게 논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이씨의 주장처럼 탈모인에게 쏟아지는 조롱 어린 시선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모인들이 겪는 차별과 불이익은 탈모를 치료 또는 교정해야 하는 문제로 보는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폭력적인’ 시선에서 생긴 문제라는 것이다.

남성형 탈모증이 질병분류기호가 부여된 일종의 질병이라는 점만 고려한다면 탈모 치료를 위해 건보 재정을 투입할지 여부만 결정하면 된다. 여기서 그치면 탈모인을 포함한 외모 차별 문제는 그대로 남고 만다. 인권활동가인 미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책임집행위원은 “차별금지법 제정은 탈모인들에게도 각자의 자유를 더 확장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장 치료제가 아쉬운 사람도 있는 반면 조금 더 자유롭고 자신답게 살고 싶어 굳이 탈모를 치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며 비슷한 문제인 비만을 들었다. 당사자가 건강상의 이유로 적극적으로 다이어트를 하기도 하지만 사회적 시선 때문에 감량을 강요받는 측면도 있어 얼마나 자발적으로 치료나 교정에 나서는지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차별을 방지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를 제도로 만들면 당사자에게는 이 경우 선택지가 더 넓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눈을 돌려보면 탈모 치료가 탈모인 당사자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대책인지 아닌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 있다. 세간에 탈모라고 흔히 부르는 신체적 현상 중 대부분은 의학적인 면만 보면 딱히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남성형 탈모가 차지한다. 실제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는 인원들만 보면 탈모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심각한 원인 때문에 탈모 증세가 나타난 환자들이 더 많다. 지난해 10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펴낸 <2020 건강보험통계연보>를 보면 2020년 한해 동안 질병분류기호 L63~66에 해당하는 다양한 탈모증 때문에 진료를 받은 인원은 23만3194명에 달했다. 이중 L63 원형탈모증으로 진료받은 인원이 17만29명으로 72.9%를 차지했고, 이어 L65 기타 비흉터성 모발손실 때문에 진료받은 인원이 2만8876명이었다. 분류기호가 L64인 남성형(안드로젠) 탈모증 진료가 전체 탈모증 진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0%도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남성형 아닌 다른 원인 탈모 지원이 우선

현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탈모인들은 대부분 건강상 문제가 없는 남성형 탈모인들이다. 보다 심각한 탈모 후유증을 겪는 다른 원인의 탈모증 환자들은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이들을 위한 지원이 더 시급한 셈이다. 특히 여성 탈모증 환자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형탈모증 환자들은 향후 더 심각한 질환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다. 약 10% 정도가 머리 전체나 온몸의 털이 다 빠지는 전신탈모증으로 발전하는가 하면, 회복과 치료 또한 여의치 않은 편이다. 여성 탈모인들에게 쏟아지는 더 따가운 시선에도 탈모를 가리는 데 필요한 가발 구입 비용은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된다. 항암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탈모 증상에 대해선 가발 구입비가 지원되는 현실과 비교된다.

탈모인들의 표를 노린 이번 공약과 비슷한 공약이 대선에서 논쟁을 부른 전력은 또 있었다.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노인 대상 치아 임플란트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바 있다. 가정의학과 의사인 김종명 내가만드는복지국가(내만복) 의료팀장은 “임플란트도 건강보험 보장에서는 후순위인데 박근혜 정부가 인기영합식 공약으로 내걸어 이행한 결과 한국이 지금 세계에서 임플란트를 제일 많이 하는 나라가 됐고 이번 오스템임플란트 같은 사태도 나왔다”며 “어느 질병이든 의학적 차원에서 우선순위가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탈모 전문 피부과 교수가 남성 탈모 환자에게 탈모증 증상과 유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강동경희대병원 제공

탈모 전문 피부과 교수가 남성 탈모 환자에게 탈모증 증상과 유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강동경희대병원 제공

■형평성 문제도 해결해야

범위를 넓혀 탈모 치료만 건보 지원을 받게 될 경우 외모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또 다른 대표적인 질환인 비만이나 여드름은 여전히 지원대상에서 제외되는 형평성의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의학 전문가들은 대체로 우선순위를 고려해 건강보험 재정 지원범위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종명 의료팀장은 “탈모나 비만 같은 질환도 순수 미용에 관련된 부분 외에는 장기적으로 건강보험 보장 범위 안에 들어가는 것이 맞기는 한데 그렇더라도 우선순위에 대한 논의는 당연히 필요하다”며 “다만 그렇다고 그 우선순위 결정에 전문가들의 시각만 옳다고 관철될 수도 없으니 탈모 당사자들이 현실에서 겪는 문제 역시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영전 한양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도 지엽적인 수준의 탈모 공약 논쟁이 정치화되면서 보다 큰 차원에서 보건정책을 논할 자리가 없어지는 현실을 우려했다. 신 교수는 “논쟁을 하려면 보건정책 전반을 갖고 논의하는 게 더욱 생산적이고, 그 과정에서 개별 정책이 적절하냐도 국민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명 내만복 의료팀장 역시 “암 질환 같은 큰병에 걸리면 건강보험 평균보장률이 85%가 돼도 첫해 나오는 병원비가 1억원 이상으로, 액수가 크기 때문에 환자가구가 부담하는 액수도 그만큼 커진다”며 “이렇듯 아직 한국의 건강보험 재정이 빈약하고 전체적으로 보장 영역의 구조가 합리적이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에 대선에선 이런 문제를 우선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Today`s HOT
불타는 해리포터 성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토네이도로 쑥대밭된 오클라호마 마을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시위대 향해 페퍼 스프레이 뿌리는 경관들
올림픽 성화 범선 타고 프랑스로 출발 인도 스리 파르타샤 전차 축제
이란 유명 래퍼 사형선고 반대 시위 아르메니아 국경 획정 반대 시위 틸라피아로 육수 만드는 브라질 주민들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이·팔 맞불 시위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