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애인 엄마의 딸입니다

정희완 기자

차별 없는 사회 만들기 위해 싸우는 엄마를 보고

딸 조은별씨는 장애인 운동 활동가가 됐다

조은별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오른쪽)과 이형숙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3월 21일 김포 운양동 거리를 걷고 있다. / 정희완 기자

조은별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오른쪽)과 이형숙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3월 21일 김포 운양동 거리를 걷고 있다. / 정희완 기자

엄마는 세 살쯤 소아마비를 앓은 뒤 장애를 가졌다. 걷는 게 불편했다. 그러나 휠체어를 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걸으려 했지만 수시로 넘어졌다. 장애가 지긋지긋했다. 엄마는 비장애인처럼 살기 위해 애썼다. 그게 인간다운 삶이라고 생각했다. 장애인에게 가해지는 제약은 ‘어쩔 수 없는 건가 보다’ 여겼다.

엄마는 컴퓨터를 배우러 장애인복지관에 갔다가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알게 됐다. 어쩌다 센터 소장을 맡았다. 마흔이 된 엄마는 그렇게 장애인 운동에 발을 들였다. 엄마는 휠체어를 타기 시작했다. 비장애인처럼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인 것 같았다. 15년이 지난 지금 엄마는 알아주는 장애인 운동가가 됐다. 최근 ‘출근길 지하철 타기’ 시위에서도 맨 앞에 섰다.

딸 조은별씨(28)는 비장애인이다. 그는 장애인 운동 활동가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해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와 다섯 살 터울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본래 조씨의 꿈은 “무조건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가난에서 벗어나 엄마 이형숙씨(55)를 호강시키고 싶었다.

■낙인의 두려움

엄마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다. 조씨가 어릴 때 주변에선 그를 ‘소년소녀 가장’이라고 불렀다. 엄마나 동생은 한번도 조씨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강제로 주입된 ‘가장’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조씨는 “개천의 용이 돼 집안을 살려야 한다”는 강박을 가졌다.

가족의 실질적인 생계는 엄마가 책임졌다. 한복 바느질, 보험 판매 등 짬짬이 부업을 하며 억세게 살았다. 조씨가 초등학교 때는 삼륜 오토바이를 타고 화장품을 팔기도 했다. 오토바이는 조씨의 안경을 맞추기 위해 처분했다.

조씨가 두 살쯤 됐을 때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기억이 없다. 아빠는 혈우병을 앓았다고 한다. 피가 멎지 않고 고여 관절이 펴지지 않는 장애를 가졌다. 아빠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조씨는 “사실 조금 야속하다. 엄마만 고생시켜서…”라고 했다. 새아빠도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엄마도 결혼 전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가난은 대물림됐고 굴레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조씨는 학창 시절 교내에서 일부러 무게를 많이 잡았다. 친구들과 편하게 지내지 못했다. 엄마의 장애와 재혼, 성이 다른 동생, 가난 등으로 낙인의 대상이 될까 두려웠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반장과 부반장을 지냈다. 조씨가 처한 환경을 이유로 괄시받지 않으려, 주류가 되려 부단히 노력한 결과였다.

엄마는 자신의 장애와 관련된 말은 잘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부끄럽고 불편했을 터. 괜스레 괜찮은 척하는 것 같기도 했다.

조은별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이 3월 21일 김포 운양동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 정희완 기자

조은별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이 3월 21일 김포 운양동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 정희완 기자

■휠체어를 타다

조씨가 중학생 때였다. 컴퓨터를 집에 설치하던 중이었다. 조씨는 엄마한테 “왜 컴퓨터를 못 하냐”고 면박을 줬다. 상처받은 엄마는 2006년 컴퓨터를 배우기 위해 경기 의정부 동네 장애인복지관에 다녔다. 그곳에서 주변의 권유로 장애여성 자조모임을 만들었고 회장을 맡았다. 그 덕에 엄마는 다른 많은 장애인과 교류하게 됐다. 모임은 활발하게 돌아갔다. 엄마가 이렇게 리더십이 강한 사람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는 이 과정에서 장애인자립생활센터도 알게 됐다.

엄마는 2008년 얼떨결에 센터 소장이 됐다. 장애인 권리를 주장하는 각종 집회·시위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행진도 했다. 조씨는 “걷기도 힘든데 무슨 행진이냐”며 엄마에게 화를 냈다.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

조씨는 엄마가 걷다가 넘어지는 모습을 숱하게 봤다. 발목이 부러지거나 계단에서 굴러 의식을 잃기도 했다. 엄마는 휠체어를 타지 않았다. 비장애인처럼 살고 싶어서, 그들과 잘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장애인보다 비장애인들을 만나려 했다. 휠체어를 탔을 때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의식했다.

조씨의 성화를 못 이긴 엄마는 결국 센터가 보유한 전동휠체어를 빌려 타고 집회에 나갔다. 2008년 의정부 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꾸려졌다. 교통약자 특별교통수단(장애인 콜택시) 도입을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엄마도 집회와 행진, 서명운동 등에 나섰다.

그해 11월 장애인들은 의정부시청 앞에 천막을 펼치고 농성을 벌였다. 중학교 3학년이던 조씨는 학교가 끝난 후 종종 엄마를 찾아 농성장으로 향했다. 장애인들은 그해 12월 1일 의정부시장실을 점거키로 했다. 시장실은 1.5층에 있었다. 이곳으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장애인들은 휠체어에서 내린 뒤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조씨는 생생한 차별의 현장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처참한 현실을 깨달은 순간”이라고 조씨는 회고했다. 엄마는 이 농성 이후 휠체어를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했다. 엄마는 센터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 마음 한편에 자리한 차별의 부당함과 억압을 발견했다. 장애인이라고 꼭 불편을 감수하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먼 길을 돌아 자신에게 맞는 자리에 온 듯 보였다.

조씨도 일상에서 행해지는 차별을 점점 인식하기 시작했다. 조씨 가족이 2012년 경기 김포로 이사한 뒤 시내에서 귀가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릴 때였다. 추운 겨울이었다. 엄마와 함께 이동하려면 저상버스를 타야 했다. 장애인은 탈 수 없는 이른바 ‘계단 버스’가 한대, 두대 계속 지나갔다. 그 사이 조씨는 아무렇지 않게 수다를 떨었다. 장애인이 감수해야 할 당연한 불편함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한시간째다. 계단 있는 버스여서 타지 못하고 그냥 보낸 게….”

조씨는 순간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계단 버스를 당연하게 여겼다. 엄마 눈에는 자기 앞을 지나가지만, 탈 수 없는 버스의 계단만 보였던 거다. 엄마가 느꼈을 상실감과 허탈감, 소외감 등이 그제야 와닿았다. 부끄러웠다. 조씨는 “이동권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제이다. 매 순간 차별받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내 처지가 너무 서럽다”

조씨는 엄마가 삭발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2020년 8월 부양의무제 기준 완전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 자리였다. 정부는 당시 생계급여의 부양의무제를 2021년 폐지하겠다면서도 의료급여는 유지한다는 계획을 밝힌 터였다.

기자회견 한달 전 조씨의 할머니, 즉 엄마의 엄마가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의사는 할머니가 이전부터 증상을 느꼈을 것이고 검사를 받았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할머니가 엄마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아파도 참은 거라며 엄마는 자책했다. 엄마는 할머니처럼 가난 때문에 치료도 못 받고 죽는 이들을 살려야 한다며 의료급여의 부양의무제 폐지를 외쳤다. 조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삭발을 말렸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엄마는 삭발 중 눈물을 흘렸다.

조씨는 엄마의 속내를 듣고 심장이 철렁하기도 했다. 2012년 파주에서 장애를 가진 남매가 화재로 사망했다. 앞서 한 중증장애인이 화재에도 집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한 사건도 발생했다. 이들은 활동지원사가 필요했지만 제한 시간이 넘거나 신청조차 하지 못해 도움을 받지 못했다.

엄마는 장애인 남매 추모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은 12층이다. 매일 밤 생각한다. 불이 나면 아이들에게 엄마를 두고 먼저 대피하라고 해야겠다. 나는 운이 좋다면 구조될 것이다. 아이들이라도 살리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처지가 너무 서럽고 슬프다.”

조씨도 서글펐다. 매일 밤 불이 나면 엄마와 어떻게 대피할지 머릿속에 그린다. 엄마를 두고 나간다는 건 선택지에 없다. 엄마가 혼자 있을 때 불이 나는 상황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이형숙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등 장애인들이 2018년 11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앞에서 몸에 사다리와 쇠사슬을 묶고 장애인 복지예산 확대와 수용시설 폐지 등을 요구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이형숙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등 장애인들이 2018년 11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앞에서 몸에 사다리와 쇠사슬을 묶고 장애인 복지예산 확대와 수용시설 폐지 등을 요구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사다리와 쇠사슬

장애인들의 시위가 가끔 거칠게 비치곤 한다. 사다리와 쇠사슬이 등장할 때다. 엄마도 사다리 칸에 머리를 넣고 쇠사슬로 몸을 묶은 채 시위를 했다. 조씨가 함께한 적도 있다. 어깨가 매우 아팠다. 사다리와 쇠사슬을 이용하는 이유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이 쉽게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서다. 시설이나 차별의 시선에 구속된 장애인들의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중을 분산시켜야 함께, 오래 할 수 있다. 조씨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면 불가능한 방식이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엄마는 법원에서 벌금을 부과받으면 노역을 선택하기도 했다. 2015년과 2017년, 2021년 세 차례이다. 장애인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집회·시위를 하다가 벌금형을 받았다. 벌금을 낼 형편도 안 됐지만 무엇보다 저항의 의미에서 노역을 살기로 했다. 구치소는 장애인이 지내기엔 매우 불편한 곳이다. 휠체어를 탈 수 없어서다. 화장실 가기가 불편해 일부러 식사를 하지 않거나 적게 하기도 했다.

■엘리베이터라는 사회

엄마는 이동할 때 주로 지하철을 이용한다. 이동하는 데 비장애인보다 기본적으로 많은 시간이 들 수밖에 없다.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지만 계단보다 동선이 멀다. 모든 출구에 있는 것도 아니다. 엘리베이터가 수리 중이면 반대편 승강장의 것을 타야 한다. 양방향 이용이 가능한 곳을 찾아 몇 정거장을 더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

“엘리베이터가 거의 모든 역사에 설치돼 있는데 뭘 더 바라냐”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엘리베이터 설치는 최소한의 요구라고 조씨는 말했다. “사회 차원의 장애인 배제를 숨이 턱턱 막히도록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엘리베이터 설치가 일상에서 느끼는 배제와 차별, 혐오까지 다 막아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조씨는 사례를 하나 들었다. 엄마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줄을 서 있으면 비장애인들이 휠체어 앞으로 끼어들어 탑승한다. 휠체어가 먼저 탄 뒤 문 쪽으로 몸을 돌려야 추후 안전하게 하차할 수 있다. 그러나 휠체어를 돌릴 공간을 내주지 않는다. 비장애인들은 모두 앞을 보고 있지만 장애인은 혼자서만 뒤를 보고 있다. 위에서 장애인을 내려다보는 비장애인들의 시선이 다가와 꽂힌다. 휠체어에 팔이나 몸을 기대는 비장애인들도 가끔 본다. 엘리베이터라는 협소한 공간에서도 지금의 사회현실은 고스란히 투영된다.

비장애인들은 배려 차원에서 장애인더러 먼저 내리라고 한다. 휠체어를 후진해 내리다 보면 비장애인들의 발을 밟기 일쑤다. 다른 비장애인들이 다 내리고 마지막에 휠체어가 몸을 앞으로 돌린 후 하차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 조씨는 말했다. “장애인들이 을의 입장에서 먹는 눈칫밥과 좌절감 등은 제도에 반영돼 있지 않다. 사회의 약자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 같다. 이 무게를 언젠가는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형숙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3월 24일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진행한 ‘출근길 지하철 타기’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 정희완 기자

이형숙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3월 24일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진행한 ‘출근길 지하철 타기’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 정희완 기자

■다시 출근길 지하철로

조씨는 대학에 입학한 뒤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장애인 운동 활동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전공도 철학에서 사회복지학으로 변경했다. 2008년 12월 의정부시청에서 기어서 계단을 오르는 장애인들의 모습을 목격한 뒤부터 장애인 운동을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조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2017년 2월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들어가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이전에는 가난에서 벗어나야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활동가로 일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조씨만 가난에서 도망쳐 나온다고 사회 빈곤이, 차별이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엄마를 보며 다같이 잘사는 걸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됐다. 순응하는 삶을 살았던 조씨는 이제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장애인 운동가들에게서 많이 배운 덕분이다.

엄마는 지난해 12월 3일 시작한 ‘출근길 지하철 타기’ 시위에 한번도 빠짐없이 나갔다.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준비를 하고 6시에는 집을 나섰다.

대통령선거 전에 중단했다가 3월 24일 재개한 시위에도 참가했다. 엄마는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부회장,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등 여러 직함을 가지고 있다. 엄마는 이날 선두에 서서 가장 먼저 열차에 탑승했다.

조씨는 엄마가 시민들의 욕설에 상처받지 않을지, 행여 어디서 해코지를 당하지는 않을지 늘 걱정이다. 민감한 출근길 지하철에서 시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그는 “정말 죄송하다. 이런 불편을 매일 느끼는 장애인들을 조금만이라도 생각해달라. 우리 함께 살아요”라고 시민들에게 부탁했다.

조씨는 지난해 12월 지하철 시위에 엄마와 함께 몇차례 참여했다. 지난 2월 출산해 지금은 아기를 돌보고 있다. 아기가 어른이 되면 세상은 변해 있을까. 차별 없는 미래는 올까. “가만히 있으면서 차별 없는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갓 태어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앞으로 적어도 20년은 쉬지 않고 부단히 노력할 생각이다. 목소리를 내야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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