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해진 민중의 지팡이…이번엔 경찰개혁

정희완 기자

새 인권보호 규칙, 차별 금지 사유에

‘성별 정체성·임신 또는 출산’ 등 빠져 논란

수사업무 대폭 늘어 인력·예산 확충도 시급

경찰개혁네트워크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4월 14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경찰 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 제정안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경찰개혁네트워크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4월 14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경찰 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 제정안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검찰의 수사·기소 분리를 핵심으로 하는 개정 형사소송법·검찰청법이 지난 5월 9일 관보에 게재되면서 정식 공포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날이다. 지난 정부가 추구한 ‘검찰개혁’의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이들 법안은 오는 9월부터 시행된다.

이제 다시 경찰개혁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국가경찰-수사경찰-자치경찰’ 세 갈래로 경찰 사무 체계를 분리했다. 경찰 권한 분산의 기틀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각종 인권보호 대책을 통해 과거에 비해 ‘인권 경찰’로 진일보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비대한 조직’이라는 비판과 인권에 관한 논란이 존재한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백서도 “국민의 불신을 완전히 씻어내기 위한 개혁 작업은 지속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3월 17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충남 아산 경찰대에서 개최된 ‘신임 경찰 경위·경감 임용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3월 17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충남 아산 경찰대에서 개최된 ‘신임 경찰 경위·경감 임용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인권보호 규칙 제정 논란

경찰청은 지난 2월 15일 ‘경찰 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 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지난해 6·10 민주항쟁 기념일에 ‘인권 경찰 구현을 위한 경찰개혁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인권보호 규칙 마련을 주요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경찰은 “수사단계에서 준수해야 할 각종 인권보호 원칙을 총망라한 독자적 규정”이라고 밝혔다. 기존과 달리 경찰청 내부 훈령이 아닌 행정안전부령으로 규정해 대외적 구속력을 높였다.

규칙에는 가혹행위 및 자백 강요 금지, 사회적 약자 보호와 관련한 내용 등이 담겼다. 차별금지 사유 20여개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성별, 종교, 나이, 언어, 장애, 재산, 직업, 학력, 전과,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인종, 국적, 피부색, 외모 등 신체조건, 병력, 혼인 여부,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및 성적 지향 등이다.

경찰개혁네트워크 등 시민단체는 그러나 내용을 보완해야 한다고 경찰청에 요구했다. 차별금지 사유에 ‘성별 정체성, 고용형태, 임신 또는 출산, 출신 국가, 출신 민족, 건강상태’를 추가하라고 했다. 또 노인과 성소수자를 상대로 한 세부적인 보호 방안을 명시하고, 인권교육 관련 내용도 구체화하라고 촉구했다.

경찰청은 대부분 거부했다. 경찰청이 지난 4월 5일 단체에 보낸 답변서를 보면 차별금지 사유 확대 불가 이유를 두고 “법령에 모든 사항을 열거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구체적으로 열거되지 않더라도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모든 국민이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것은 실천의 문제”라고 했다. 성별 정체성 등을 포함할 수 없지만 누구든 차별받지 않도록 조치하겠다는 얘기다.

경찰개혁네트워크는 지난 4월 26일 김호철 국가경찰위원장을 면담한 자리에서 같은 요구를 전달했다. “김 위원장이 제정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세심하게 살펴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사과를 표했다. 그러나 내용을 변경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단체는 전했다.

규칙 제정안을 입법예고하기 직전인 지난 2월 7일 경찰위원회는 회의에서 내용을 검토한 뒤 차별금지 사유를 한차례 수정한 바 있다. 언어, 피부색,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사상 등 5가지 사유를 추가했다. 추가 이유를 두고 “차별금지법안 및 국가인권위원회법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국회에 발의된 차별금지법안들에는 성별 정체성이 담겨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법도 임신 또는 출산, 출신 국가, 출신 민족 등을 포함하고 있다. 경찰청이 경찰개혁네트워크의 요구안을 수용하지 않은 이유에 의문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랑희 공권력감시팀 활동가는 “나쁜 의도가 아니더라도 경찰이 소수자 차별과 인권침해를 잘 모를 수 있다”라며 “구체적인 상황에서 차별이 일어나기 때문에 인권보장 내용도 구체적으로 적시해야 현장에서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경찰의 수사권한이 확장되면 절차에 신경쓰기보다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성과만 중시할 수 있다”라며 “이런 상황이 인권침해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인권교육과 관련한 내용도 자세하게 담겨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경찰이 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건 여론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성별 정체성은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명시되지도 않았고 논란이 많은 이슈라 규칙에 넣는 게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라며 “입법예고 기간에도 차별금지 조항을 삭제하라는 의견이 굉장히 많아 곤혹스러운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구체적인 상황 및 대상자별 인권보호 방안은 실무지침에는 포함시킬 것”이라고 했다.

당초 2005년 제정된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에는 성소수자 보호 조항이 있었다. 2018년 ‘경찰 인권보호 규칙’으로 전면 개정하면서 성소수자 등 차별금지 조항이 빠졌다. 2020년 경찰 인권 행동강령에서도 마찬가지로 빠졌다. 랑희 활동가는 “이렇게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건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한다”라며 “지금이라도 다시 원래대로 돌리라는 취지에서 의견을 냈다”고 했다.

2019년 7월 26일 민갑룡 당시 경찰청장이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대청마루에서 열린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 권고 이행계획 보고회에 참석해 사과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9년 7월 26일 민갑룡 당시 경찰청장이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대청마루에서 열린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 권고 이행계획 보고회에 참석해 사과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찰위원회 실질화

경찰권 분산과 민주적 통제를 위한 방안들도 개혁 과제로 꼽힌다. 경찰위원회 실질화, 행정경찰과 수사경찰의 분리, 자치경찰제 실질화 등이다.

경찰위원회는 경찰의 주요 사안을 심의·의결하는 행안부 소속 기구다. 1991년 경찰의 정치적 중립과 민주성·공공성 확보 등을 목적으로 설치됐다. 실효성이 떨어져 형식적인 역할에 그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다. 2018년 경찰위원회의 심의·의결 대상을 확대하고 보고 요구권 등을 신설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개혁위원회도 2017년 11월 관련 개선안을 권고했다. 당시 경찰청은 이를 수용한다고 밝혔다. 관련 법안들도 국회에 발의돼 있다.

경찰위원회는 위원장 1명과 위원 6명 등 총 7명으로 구성된다. 모두 행안부 장관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행정부의 입장만 대변할 수 있는 구조라는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개선안은 경찰위원을 9명으로 늘리고 국회와 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임명토록 했다. 위상을 국무총리 소속 중앙행정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경찰위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도록 했다. 또 경찰위원회 산하에 경찰청을 둬 관리·감독을 맡긴다. 경찰청장 임명제청권, 감사·감찰·징계요구 등도 경찰위원회에 부여한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독립성을 담보하려는 취지다.

행정경찰과 수사경찰을 분리하기 위해 설립된 ‘국가수사본부(국수본)’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많다. 국수본은 지난해 검경 수사권을 조정하면서 함께 출범했다. 수사 전문성과 공정성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경찰청장이 일반적 지휘만 할 수 있고 구체적인 사건을 지휘할 수 없게 했다. 다만 예외적으로 구체적인 사건에 개입할 여지를 뒀다. 무엇보다 국수본이 경찰청 소속이다. 국수본부장도 경찰청장이 추천하면 행안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구조이다. 국수본부장이 수사경찰의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극히 제한된 수준에 머물렀다. 경찰청장을 정점으로 하는 수사체계에 사실상 큰 변화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 국수본부장 임명 과정에서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고 경찰청장이 아닌 후보추천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해 추천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자치경찰제도 ‘무늬만 자치경찰’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실정이다. 국가경찰에서 오롯이 독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경찰 중심의 ‘일원화 모델’이다. 자치경찰의 신분은 국가공무원이다. 시·도지사 소속 자치경찰위원회를 두고 자치경찰을 관리·감독하게 했지만, 시·도 경찰청장이 이를 무시해도 강제할 순 없다. 자치경찰위가 행사할 수 있는 인사권도 사실상 전무하다. 비판론자들은 자치경찰의 인사·예산을 독립해 ‘이원화 모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개특위 출범 언제쯤

과거에 비해 비대해진 경찰을 견제·통제하기 위한 방안은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서도 다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국회는 최근 개정 형사소송법·검찰청법을 처리하면서 국회 사개특위 구성 결의안도 함께 통과시켰다. 사개특위는 향후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한국형 FBI) 신설과 수사기관의 권한 조정 등 후속 제도 마련을 논의한다. 사개특위는 구성 후 6개월 내 중수청 설치를 위한 입법을 완료하고, 이후 1년 이내 중수청 출범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구성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결의안은 더불어민주당 7명, 국민의힘 6명, 비교섭단체 1명으로 사개특위를 구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주당은 위원 명단을 제출했지만 국민의힘은 수사·기소 법안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국민의힘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에 ‘입법 강행’ 프레임을 덧씌우려는 시도를 이어가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수사·기소 분리 법안이 시행되는 9월부터 검찰의 직접 수사 범위는 기존 6대 범죄에서 부패·경제 등 2개로 줄어든다. 공직자·방위사업·대형참사 수사권은 사라진다. 선거범죄의 직접 수사권은 내년부터 없어진다. 6·1 지방선거와 6개월이라는 선거범죄의 공소시효를 고려한 조치다.

검찰의 보완수사도 제한된다. 경찰이 기소의견으로 송치한 사건은 지금처럼 보완수사할 수 있지만, 검찰이 경찰에 송치를 요구한 사건은 ‘동일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수사해야 한다. 무분별한 별건수사를 방지한다는 취지다. 다만 경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소속 공무원의 범죄는 검찰이 수사할 수 있다.

향후 법무부의 행보가 주목된다. 검찰의 수사권을 확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의 직접 수사 대상이 부패·경제 등 2가지로 제한되지만, 범죄 종류와 대상, 액수 등 세부적인 사항은 시행령(대통령령)과 법무부령에서 규정한다. 국회 논의 없이도 정부의 재량으로 검찰의 직접 수사 범위를 제한적으로나마 늘릴 수 있다는 얘기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도 수사·기소 분리 법안에 반대한다.

지난 5월 3일 개최된 국회 본회의에서 검찰의 수사·기소 분리가 핵심 내용인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가결됐다. / 국회사진기자단

지난 5월 3일 개최된 국회 본회의에서 검찰의 수사·기소 분리가 핵심 내용인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가결됐다. / 국회사진기자단

■경찰 인력·예산 어쩌나

경찰은 속앓이만 하고 있다. 당장 인력과 예산 확충이 시급한 문제다. 지난해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인해 수사업무가 대폭 증가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의 인프라 확보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수사·기소 분리 법안이 시행된다고 해서 당장 사건 수 자체가 급격하게 늘어나지는 않겠지만, 중수청이 출범하기 전까지는 검찰이 담당했던 대형 사건도 경찰이 떠안아야 한다.

경찰청은 조만간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인력·예산 재배치 등을 검토할 예정이다. 윤석열 정부하에서 경찰의 수사 인력·예산 확충을 낙관하기만은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사건 적체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재조정이라도 해보겠다는 의도다. 검찰 수사관을 경찰로 이관하는 방안도 거론되지만, 검찰이 반발하는 상황이어서 쉽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 수사업무는 늘었고 검찰은 줄었다. 그만큼 검찰 수사 인력을 경찰로 재배치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Today`s HOT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아르메니아 국경 획정 반대 시위 불타는 해리포터 성
틸라피아로 육수 만드는 브라질 주민들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이·팔 맞불 시위 인도 스리 파르타샤 전차 축제 시위대 향해 페퍼 스프레이 뿌리는 경관들 토네이도로 쑥대밭된 오클라호마 마을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