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하나 달겠다고 ‘재봉틀과 씨름’…멍청한 싸움이 안겨준 값진 선물

이숙명

이숙명의 ‘유유자적’

인도네시아에는 국제 섬유 기업들의 공장이 많다. 그래서 원단 구하기도 쉽고 봉제 단가도 싸지만 외국인의 소량 주문 건이라면 어김없이 비싸진다. 커튼 가격에 놀라 재봉틀을 사버렸다.

인도네시아에는 국제 섬유 기업들의 공장이 많다. 그래서 원단 구하기도 쉽고 봉제 단가도 싸지만 외국인의 소량 주문 건이라면 어김없이 비싸진다. 커튼 가격에 놀라 재봉틀을 사버렸다.

재봉틀을 샀다. 내가 생각해도 ‘가지가지 하는구나’ 싶다. 발리에서 정원 가꾸고 재봉하는 삶이라니 일본 힐링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다. 이게 유튜브나 생활소품 브랜드나 에세이 판매를 위한 설정이면 좋겠다. 하지만 재봉틀은 내 인생에 날아든 또 한 그루 파파야 나무일 뿐이다. 심지 않아도 어디선가 날아와 뿌리를 내리는 그 나무 말이다.

적도 남쪽인 발리, 이 곳의 거실은 온종일 ‘지글지글’ 끓는다
기절초풍하게 비싼 커튼값에 놀라 불쑥 주문한 재봉틀은 처음부터 먹통
지리한 밀당 끝에 새 것을 받고…미친 사람처럼 매달려 마침내 ‘완성’
은은하게 스미는 노을 속 평온…순수한 몰입은 정신건강에 좋더라

나는 한 달 전까지 재봉틀을 만져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한 달 사이 거실 커튼을 완성하고 스쿠버다이빙센터의 망가진 그물 가방들을 수선하고 이제는 친구네 호텔 커튼까지 주문받아 만들게 생겼다. 내가 커튼을 만든다는 건 동네 농담거리가 되었다. 이 섬에 가득한 해양 스포츠 전문가들이 보기에 재봉은 할머니들이나 하는 취미다. 친구들은 나를 ‘뚜깡 고르덴(커튼 기술자)’이라 놀리기 시작했다. 나는 “과찬의 말씀이다. 아직은 ‘닥터 프랑켄소어’다”라고 자조한다. 이것저것 꿰매서 얼렁뚱땅 기능은 하지만 보기엔 흉측한 뭔가를 만드는 사람.

섬에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온 독일인 손님은 내게 물었다.

“당신은 어쩌다가 누사프니다에서 커튼을 만들게 되었습니까? 그게 진짜 직업입니까?”

“짧은 버전을 원합니까, 긴 버전을 원합니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긴 버전은 2018년경으로 거슬러갑니다. 나는 작가였고,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을 나면서 책을 쓰기 위해 발리에 왔습니다. 그러다 누군가를 만났고 별생각 없이 눌러앉았습니다. 짧은 버전은 2020년 말에 시작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지루해진 나는 집을 짓겠다는 금단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맙니다. 더 짧은 버전은 두 달 요약본입니다.”

“이미 많은 것이 설명된 것 같네요. 그럼 짧은 버전을 들어봅시다.”

재봉틀을 주문할 때 나는 화가 나 있었다. 세상 모든 것에 화가 났다. 하자 투성이 집에서 물 한 번 쓸 때마다 수동으로 펌프를 껐다 켰다 하면서 도움 줄 사람을 찾아다니느라 한 달, 외부에서 온 기술자들과 먼지투성이 집에서 합숙하기를 한 달이었다. 세상 문제에는 대략 네 가지 종류가 있다.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 시간으로 해결되는 것, 돈으로 해결되는 것, 해결될 수 없으니 마음을 바꿔야 할 것. 이번 문제는 대개 돈이면 해결될 일이었다. 돈으로 해결할 일을 괜히 성질 부리다가 노력과 시간과 마음까지 들일 일로 키우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럼에도 자꾸 여기저기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화가 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 손해보고 말면 될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후회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 자신에 실망하고 지긋지긋해질 즈음 커튼을 주문하러 갔다.

내 집 거실은 삼면에 통창이 나있는데 그게 주로 북향이다. 적도 남쪽인 발리에선 종일 해가 떠 있는 방향이다. 압도적으로 싼 가격과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디자인 때문에 선택한 거실 타일은 하필 진회색. 그래서 거실은 일출부터 일몰까지 지글지글 끓는다. 커튼이 시급했다. 그런데 발리의 커튼 가게에서 받은 견적은 기절초풍하게 비쌌다. 명백한 ‘불레 프라이스(외국인 바가지)’였다. 공사 마무리 때문에 매일 계산기를 두드리고 견적을 비교하면서 돈타령을 하다 보니 불레 프라이스는 나의 분노 발작 버튼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충동적으로 재봉틀을 주문했다. 커튼, 내가 직접 만들고 만다.

처음 주문한 재봉틀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인터넷 쇼핑은 판매자 우위 시장이다. 반품이 대단히 어렵다. 분쟁이 발생하면 쇼핑몰에서 가장 먼저 소비자에게 요구하는 건 물품 개봉 영상이다. 상품 개봉부터 작동까지를 영상으로 찍어두지 않으면 반품은 불가하다. 영상을 보내면 상담사 중재하에 판매자와 협의가 개시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리 영상을 확인한 판매자가 최대한 빨리 도와주겠다며 반품을 하라고 했다. 쇼핑몰의 반품 배송 보조금 한도가 있어서 내가 추가금까지 내면서 물건을 보내야 했지만 판매자의 말을 믿고 안심했다. 그런데 물건을 받은 판매자는 시간 끌기에 들어갔다.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서 합의를 거부했다. 쇼핑몰은 그들이 낸 엉터리 자료들을 기각하는 대신 합의 시간을 자꾸 연장했다. 마감이 다가오면 판매자는 분쟁과 상관없는 영상을 올리고, 그럼 쇼핑몰은 다시 검토를 한답시고 마감을 연장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구매자가 한 번이라도 제때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돈과 물건을 떼어먹힌다. 그걸 아니까 판매자들이 시간 끌기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거의 한 달이 걸렸고,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쇼핑몰 앱을 켜고 분쟁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메일을 써야 했다. 가뜩이나 산적한 문제에 스스로 골칫거리를 더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입맛이 뚝 떨어질 정도의 긴장이 한 달 동안 지속됐다. 내가 한국에서 너무 곱게 살았다.

대문은 알아서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인부들이 한껏 멋을 부리고 있다.

대문은 알아서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인부들이 한껏 멋을 부리고 있다.

발리에서 온 젊은 인부들은 이곳 체류 한 달을 넘기면서 슬슬 문제를 드러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건성으로 하는 일들이 있었다. 먼저 일을 마친 목수는 사전 합의 없는 추가금을 요구했다. 목수를 섭외해왔던 전기 기술자는 “그 친구가 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곤란한 척했지만 결국 그 자신도 흐지부지 사라졌다. 구두로, 문자로, 서류로 거듭 약속한 일들에 대해 깜빡 잊은 척 “뭘 더 해야 한다고요? 아…그거…”라는 식으로 우물거리더니 응답을 회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친구들에게 미안하지만 전혀 놀랍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일 관계로 만난 사람들과의 마지막은 늘 이런 식이니까. 그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전기 깜빡임은 원인 조사에만 30만원이 들었지만 결국 내부 배선 문제로 드러나서 수리를 포기해야 했고, 새로 설치한 물탱크는 수압이 낮아서 쓸 수가 없었다.

발리 인부들이 떠나던 날 새 재봉틀이 도착했다. 그때부터 나는 미친 사람처럼 커튼을 만들었다. 원단 40m를 빨고 말리고 자르고 바닥에 엎으려 재단선을 그리고 핀을 박고 꿰매고 레일에 걸었다가 다시 걷어서 꿰매고 또 걸었다가 걷어서 박았던 걸 뜯고 수정하고…밥도 안 먹고 잠도 거르고 계산기와 엑셀 파일도 잊고 커튼을 만들었다. 내가 왜 여기서 이 짓을 하고 있나, 왜 돈을 더 모아두고 은퇴를 하지 않았나, 왜 조그만 오두막이면 될 걸 이렇게 일을 키웠나, 진입로와 수영장과 창고는 어떻게 마무리할까, 그 프랑스인 공사업자 놈이 내게 저지른 무례는 인종차별인가 아닌가, 내가 인도네시아 인부들에게 갖게 된 편견은 그보다 심한 인종차별일까 아닐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돈이 필요하면 일이 굴러들어왔는데 이제는 나이 먹고 외국에 살아 그것도 여의치 않으니 뭘 해서 먹고살까 등등의 자문을 잊은 채, 나는 커튼을 만들었다. 허리가 뻐근해서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을 때만 침대에 누웠고, 쪽잠을 자다가 일어나면 눈곱도 안 떼고 커튼으로 달려들었다. 눈이 침침해서 실을 꿸 수 없을 때만 밥을 사먹으러 나갔고, 원단이나 재료가 떨어져서 일을 멈출 때면 중독자처럼 재봉 영상들을 보고 또 보았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며칠 전 나는 거실에서 노을을 보고 있었다. 리넨 커튼에 은은하게 빛이 투과되어 분위기가 고즈넉했다. 나는 마음속의 무언가가 씻겨내려간 걸 느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갔다. 바닥에 딱 맞게 늘어진 창 커튼과 옷장 가림막을 보았다. 인부들이 묵던 작은 방은 그날 낮에 대청소를 해서 세제 냄새가 남아 있었다. 욕실과 주방도 둘러보았다. 괜히 수도도 틀어보았다. 물탱크에 헛돈을 쓰긴 했지만 그걸 포기하고 저장소와 펌프로 돌아가니 물은 콸콸 잘 나왔다. 다시 거실로 나와 창밖을 내다보았다. 담장은 기초 공사를 마친 상태다. 우리는 돌고 돌아 맨 처음 집 공사를 맡기려던 이탈리아 건축기사에게 담장을 비롯한 공사 마무리를 부탁했다. 그의 인부들은 누사프니다 사람들이라 밤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현지인들답게, 새 인부들은 내가 몰랐던 이 집 나무들의 이름을 찾아주었다. 주차장의 키 큰 나무는 잭프루트였다.

“예에? 이 집에 잭프루트가 있다고요?”

놀라서 들여다보니 무성한 가지 속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물 저장소 옆의 큰 나무는 소노클링인데 현지인들이 그 이파리를 약용으로 쓴다고 했다.

그날 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애인에게 내가 말했다.

“이게 믿어져? 지금 이 집에 우리밖에 없고, 물건들은 대부분 정돈되었고, 낮이면 커튼으로 해를 가릴 수도 있어. 그리고 마당에는 잭프루트 나무가 있어.”

나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평온을 느꼈고,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했으며, 남은 일들은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누사프니다는 바빠졌다. 인도네시아가 입국자 격리 해제를 선언한 이후 4개월 동안 발리 관광업은 서서히 정상화되었다. 독립기념일 휴가를 기점으로 호텔과 여객선들은 예약 없이 이용하기 힘들어졌다. 누사프니다의 해변 카페는 외국인들로 북적이고 부둣가와 상업지대는 다시 교통 정체가 벌어지고 있다. 2년간 할 일 없는 이민자들이 색바랜 다이빙숍 티셔츠를 입고 직접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열던 클럽들은 바빠진 이민자들 대신 말쑥한 여행자들로 채워지고 있다. 스쿠버다이빙숍들은 자주 만선이다. 애인은 팬데믹 직전 공사를 끝내놓고 2년 동안 묵혀야 했던 2호점에 마침내 장비를 채워넣기 시작했다. 피곤에 지쳐있던 그가 그날은 이런 말을 했다.

“나도 시간이 생기면 바이크 수리를 시작하고 싶어. 네가 커튼을 만든 것처럼.”

그는 커튼을 만드는 동안 내게 생긴 변화들을 예민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순수한 몰입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몰입의 대상이 생산적이기까지 하면 더 좋다. 이러려고 재봉틀을 산 건 아닌데 본의 아니게 물심양면의 소득을 얻었다. 그렇게 닥터 프랑켄소어의 탄생과 함께 집짓기의 가장 길고 끔찍한 장은 끝이 났다.

▶이숙명

[다른 삶]커튼 하나 달겠다고 ‘재봉틀과 씨름’…멍청한 싸움이 안겨준 값진 선물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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