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함께 채우는 나눔냉장고
한살림제주 조합원 활동으로 시작
제주시 4개동 5곳에 ‘곳간’ 만들고
텃밭서 키운 채소·기부품 등 채워
“호미다, 호미!” “여기 애벌레 있다!”
휑하던 밭에 아이들 소리가 흘러넘쳤다. 어린이집에서 고구마 캐기 체험 활동을 하러 왔다.
“한창 곤충에 관심이 많은 시기라 밭에 나오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아이들을 데리고 온 이경희 큰숲어린이집 교사는 “실내에서 기성 제품으로 놀던 아이들이 밭에 나오면 흙을 만지며 놀 거리를 직접 만들어낸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10월13일 방문한 이곳은 한살림제주 담을센터 앞 공동체 텃밭이다. 제주시의 ‘신도심’에 해당하는 노형동에 자리하고 있다. 텃밭은 인근 광평마을 어르신들이 주도적으로 관리한다. 텃밭에서 나온 수확물은 취약계층을 위한 ‘나눔냉장고’와 ‘반찬 나눔’에 쓰도록 기부한다.
한살림제주생활협동조합(한살림제주)은 2016년부터 조합원 활동의 주요 의제로 ‘돌봄’을 내세우고 있다. 처음에는 조합원이 모여 반찬을 만들고 취약계층에 기부하는 단순한 형태로 시작했다가, 점차 복잡한 형태로 활동 내용이 늘었다. 김자경 한살림제주 이사는 “협동조합의 담을 넘어 지역사회 전체가 같이해야 먹거리 돌봄의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지역자원을 연계해 만든 대표적인 사업이 ‘나눔냉장고’다. 한살림 자체 예산과 조합원·생산자의 기부에 더해, 지난해 확보한 주민참여예산을 마중물 삼아 사업을 벌여왔다. 한살림제주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체가 함께 채우는 ‘곳간’을 만들고, 필요한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운영한다. 나눔냉장고는 현재 제주시 4개 동 5곳에 설치돼 있다.
음식은 사람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하는 좋은 매개체다. 나눔냉장고는 혼자 사는 노인들을 경로당에 나오게 하고, 이주민 가정을 지역공동체로 끌어들이며,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경제적 약자에게 활동의 기회를 부여한다.
400여가구가 2주마다 찾아가 수령
경로당에서 직접 조리·배달하기도
주민센터 문턱을 낮추는 냉장고
“솜뽁살레를 채우는 데는 별도의 예산이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주민, 기업, 자원봉사단체, 한살림에서 기부한 물품으로 채우고 있어요.” 지난 10월12일 제주시 노형동주민센터에서 만난 이영림 맞춤형복지팀장은 주민센터 입구 근처에 설치된 나눔냉장고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솜뽁살레’는 노형동주민센터에 설치한 나눔냉장고의 별칭이다. ‘수북하다’는 뜻의 제주 방언 ‘솜뽁’과 ‘찬장’을 의미하는 ‘살레’를 더해 이름을 붙였다. 냉장고와 찬장에는 밭에서 막 수확한 누런 호박부터 채소, 고기와 양념류, 냉동식품까지 다양한 식재료가 갖춰져 있었다.
첫 나눔 물품은 한살림제주에서 기부한 쌀이었다. 지금은 한살림에서 보내오는 각종 기부물품에 더해 근처 동장들이 500평 텃밭을 일궈 수확한 채소와 이 채소로 담근 김치, 지역 라이온스클럽과 지역 기업(제주 드림타워) 기부까지 더해져 곳간이 점점 커지고 있다. 복지 공무원과 동네 주민이 함께 찾아낸 먹거리 취약계층 400여가구가 2주에 한 번, 주민센터를 직접 방문해 먹거리를 가져간다. 볼일이 있어 주민센터를 찾았던 주민들이 솜뽁살레에 관심을 가지면서 개인 기부도 늘고 있다.
이영림 팀장은 “솜뽁살레 덕분에 주민센터 문턱이 낮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집에 은둔해 동주민센터를 이용할 생각도 안 하던 분들이 냉장고 덕분에 외출하시기도 해요. 2주가 지났는데도 물품을 받으러 오시지 않으면 안부 전화를 드립니다. 대부분 입원 중이신 경우죠.”
주민이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냉장고
기부 물품을 받는 이용자들은 결코 수동적인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지역공동체의 기능을 잘 살리면, 주민이 수혜자인 동시에 시혜자가 되는 좋은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제주시 노형동의 국민임대주택 으뜸마을주공아파트(으뜸마을) 경로당에도 나눔냉장고가 설치돼 있다. 이곳에 들고 나는 물품은 경로당의 노인회와 부녀회에서 직접 관리한다.
지난 10월13일 오전. 으뜸마을 경로당에서는 점심 준비가 한창이었다. 으뜸마을 부녀회장 박삼순씨(74)와 총무 심오점씨(56)를 비롯한 주민 여럿이 손발을 맞춰가며 요리를 하는 동안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날의 주요리는 불고기. 한 달에 최소 한 번은 한살림에서 보낸 식재료로 ‘특식’을 준비한다.
오랜 시간 한동네에서 살아온 이들은 서로의 사정을 잘 안다. 부녀회원들은 한살림 기부 물품을 직접 소분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어떤 물품이 더 필요한지 한살림 쪽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는다.
식사 시간이 되자 고령의 주민이 속속 경로당에 모여들었다. 젊은 축에 속하는 중장년 주민들이 ‘어르신’들을 챙기는 동안, 박씨와 심씨는 몸이 불편해 못 나온 주민들의 식사를 직접 배달했다. “이 조그만 동네에서 서로 못 지내면 어쩌겠어. 우리는 손발이 잘 맞으니까!” 배달을 나가며 박씨가 쾌활하게 말했다.
복지 사각 메우는 건 결국 ‘공동체’
일방적 아닌 ‘서로 돌봄’ 고민해야
서로 돌보는 제주를 꿈꾼다
노형동이 제주시의 ‘신도심’에 해당한다면, 제주시소통협력센터(소통협력센터)가 위치한 일도1동 일대는 ‘원도심’이다. 인구가 줄고 동네가 노후화해 도움이 필요한 취약계층이 상대적으로 많다.
소통협력센터는 행정안전부가 추진하는 ‘지역거점별 소통협력공간 조성 및 운영’ 일환으로 설립됐다. 지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여러 분야 주체들이 협력할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을 벌인다.
소통협력센터 3층에도 나눔냉장고가 설치돼 있다. 소통협력센터는 원도심을 중심으로 탐라장애인복지관, 이주민 지원단체 ‘나오미센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건입동주민센터 등 인근의 다양한 기관들과 협력해 먹거리 돌봄이 필요한 주민을 찾아낸다.
지역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지역사회에 애정을 가진 주민들이 주체로 나설 때 보다 더 살뜰한 먹거리 돌봄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눔냉장고의 실험은 잘 보여준다. 강순원 한살림제주 전무는 “국가가 만든 복지 제도도 중요하지만 지역공동체의 노력 없이는 사각지대를 메울 수 없다”며 “지역주민이 주체로 서고 행정과 국가가 이를 지원하는 모델을 만들어나가야 진정한 의미의 복지사회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눔냉장고로 협력 중인 한살림제주와 소통협력센터는 공동체문화가 곳곳에 살아있는 제주에서 ‘느슨한 연대’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먹거리를 통한 돌봄이라고 하면 한쪽에선 돌봄을 주고 다른 쪽에선 받는 일방적 관계를 생각하기 쉽지만, 돌봄은 결국 ‘상호적인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반찬 나눔 등 먹거리 돌봄 활동을 벌이는 한살림제주 조합원 단체 ‘모심회’의 김영순 회장은 “우리가 나서서 돌봄 활동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 또한 누군가의 돌봄을 받지 않고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며 “전 생애에 걸쳐 필요한 ‘서로 돌봄’을 어떻게 공동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먹거리 취약계층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의 지자체에선 다양한 사업을 기획하고 이용자를 발굴한다. 하지만 이용자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맞춤형으로 서비스를 설계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는 누구나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정책을 제안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해 ‘국가식량계획’을 의결했고 올해는 ‘지역사회 먹거리 돌봄 활성화 방안’을 의결해 중앙정부와 지자체, 민간이 협업하는 방향성을 제시해왔다. 오세영 농특위 사무관은 “모든 국민이 안전한 우리 농수산물을 섭취하고, 동시에 농어민의 삶의 질도 향상될 수 있도록 앞으로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