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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랏찻찻! 모래판에 심은 소년장사의 꿈

문재원 기자
임종범 군(12)이 지난 달 29일 전북 정읍시 칠보면에 위치한 씨름훈련장에서 칠보중학교 최현진 선수(14)와 훈련을 하고 있다. 천진한 종범이의 눈빛이 모래판 위에서는 사뭇 진진해졌다.

임종범 군(12)이 지난 달 29일 전북 정읍시 칠보면에 위치한 씨름훈련장에서 칠보중학교 최현진 선수(14)와 훈련을 하고 있다. 천진한 종범이의 눈빛이 모래판 위에서는 사뭇 진진해졌다.

“저도 힘이 센데 동생들은 더 세요. 놀아주다 보면 제가 지쳐요.”

지난달 26일 전북 장수군 산서면 한 농가. 김장 준비에 바쁜 어른들 사이에서 임종범군(12)은 동생들과 놀아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종범 군(12)이 전북 장수군 산서면에 위치한 할아버지댁에서 둘째 종혁(8), 막내 예린(7)이와 놀아주고 있다.

종범 군(12)이 전북 장수군 산서면에 위치한 할아버지댁에서 둘째 종혁(8), 막내 예린(7)이와 놀아주고 있다.

종범 군이 전북 장수군 산서면에 위치한 할아버지댁에서 막내 예린이와 놀아주고 있다.

종범 군이 전북 장수군 산서면에 위치한 할아버지댁에서 막내 예린이와 놀아주고 있다.

종범이는 전북 정읍시 칠보초등학교 씨름부 선수다. 유치원 때부터 식탐과 발육이 남달랐다. 초등학교 입학 후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갔다. 1학년 겨울방학 무렵, 종범이는 할아버지 임정수씨(63)의 지인인 전 씨름단 감독의 권유로 입문했다.

할아버지 임정수 씨(63)가 동생 예린이를 안고 있는 동안 종범이가 사촌 형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 임정수 씨(63)가 동생 예린이를 안고 있는 동안 종범이가 사촌 형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처음 참가한 씨름부 전지훈련에서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두번째 훈련에서는 달랐다. 할아버지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애가 다녀오자마자 ‘할아버지 저 씨름하러 갈래요’라고 하더라고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할아버지에게 다부지게 답했다. 어린 나이에 힘들다는 내색도 없이 고학년 형들과 성실하게 훈련했다. 올해 제51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용사급 1위를 차지하는 등 ‘소년 장사’는 여러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다.

종범 군과 할아버지 임정수 씨가 전북 장수군 산서면에 위치한 영대산을 오르다 영등할매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고 있다.

종범 군과 할아버지 임정수 씨가 전북 장수군 산서면에 위치한 영대산을 오르다 영등할매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고 있다.

주말이면 종범이는 할아버지와 종종 마을 인근 영대산을 오른다. 약수를 마시고 숨을 돌린 할아버지와 손자는 영등할매바위 앞에 멈춰 서서 소원을 빈다. “우리 종범이 대회 나가서 다치지 말고 우승하게 해주세요.” 할아버지의 소원은 한결같다.

정상에 도착한 할아버지와 종범이가 풍광을 보고 있다. “할아버지처럼 땀 흘리지 말고 천천히 올라와야지. 빨리 올라간다고 좋은 게 아니야 종범아”

정상에 도착한 할아버지와 종범이가 풍광을 보고 있다. “할아버지처럼 땀 흘리지 말고 천천히 올라와야지. 빨리 올라간다고 좋은 게 아니야 종범아”

“이왕 시작했으니 천하장사까지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4학년 때인가 (종범이가) 한번 울더라고요. 그래서 감독하고 통화를 했어요. 혼났는지 물었더니, 애가 6학년 형들이랑 훈련하다 져서 울었더라고요. 그만큼 승부욕도 강해요.” 대회에 나가 우승하고 메달을 따면 마을에 현수막이 걸렸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 나가 자랑했다. “자가 내 손주여.”

종범 군 어머니 송지혜 씨(31)가 종범이 육아일기를 보여주고 있다. 지혜씨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종범이를 잘 챙겨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종범 군 어머니 송지혜 씨(31)가 종범이 육아일기를 보여주고 있다. 지혜씨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종범이를 잘 챙겨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어머니 송지혜씨(31)는 내심 걱정이다. “워낙 씨름을 좋아하고 잘하니까, 대견하기도 하지만 아이 아빠와 저는 아무래도 공부를 제대로 못하니…. 만약에 운동하다 다치거나, 선수생활을 이어가지 못한다면 애가 겪을 일들이 걱정되더라고요.” 그래도 메달을 따고 엄마한테 달려오는 아들을 보면 근심은 어느새 잊힌다고 한다.

종범 군이 전북 정읍시 칠보초등학교에서 수업 중 문제를 맞혀 좋아하고 있다.

종범 군이 전북 정읍시 칠보초등학교에서 수업 중 문제를 맞혀 좋아하고 있다.

종범군이 전북 정읍시 칠보초등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다.

종범군이 전북 정읍시 칠보초등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다.

다음날, 등굣길 종범이는 롤러 신발을 신고 학교에 들어섰다. 천진하게 노는 모습이 영락없는 초등학생이다. 전날 김장하는 것을 도와 피곤했는지 수업 중에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평소 식탐이 많은 종범 군이 전북 정읍시 칠보초등학교에서 급식판에 얼굴을 묻고 점심을 먹고 있다.

평소 식탐이 많은 종범 군이 전북 정읍시 칠보초등학교에서 급식판에 얼굴을 묻고 점심을 먹고 있다.

종범 군이 전북 정읍 칠보면에 위치한 씨름 훈련장에서 칠보초·중학교 선수들과 훈련을 하고 있다.

종범 군이 전북 정읍 칠보면에 위치한 씨름 훈련장에서 칠보초·중학교 선수들과 훈련을 하고 있다.

수업이 끝나고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씨름부 훈련이 시작됐다. 모래판에 오르자 종범이는 사뭇 진지해졌다. 칠보초·중학교 선후배가 함께하는 훈련장에서 종범이의 체구가 단연 눈에 띄었다.

종범 군이 전북 정읍 칠보면에 위치한 씨름 훈련장에서 동료들과 훈련을 하고 있다.

종범 군이 전북 정읍 칠보면에 위치한 씨름 훈련장에서 동료들과 훈련을 하고 있다.

“힘에서 나오는 오금 당기기 기술이 굉장히 강력해요. 근데 이 기술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게 쉽지는 않아요. 오금을 당기고 나서, 뒷무릎치기나 앞무릎치기를 이용해서 상대방을 넘기는 게 보통인데, 종범이는 워낙에 힘이 강하다 보니까 오금 당기기 하나로도 상대방을 제압해요.” 지도자 10년 차인 권도회 씨름부 감독(28)이 칭찬했다. 반면 “아직 어리기도 하지만 차분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항상 질 때는 본인이 서두르다가 져요. 마음을 다스린다면 더 큰 선수가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종범 군이 전북 정읍 칠보면에 위치한 씨름 훈련장에서 칠보중학교 정민수 선수(15)와 훈련을 하고 있다.

종범 군이 전북 정읍 칠보면에 위치한 씨름 훈련장에서 칠보중학교 정민수 선수(15)와 훈련을 하고 있다.

종범 군이 전북 정읍 칠보면에 위치한 씨름 훈련장에서 칠보고등학교 최람 선수(16)와 훈련을 하고 있다.

종범 군이 전북 정읍 칠보면에 위치한 씨름 훈련장에서 칠보고등학교 최람 선수(16)와 훈련을 하고 있다.

권 감독은 종범이가 첫 메달을 따는 순간을 떠올렸다. “어린 선수를 훈련하다 보면 자식 같을 때가 있거든요. 종범이는 울지 않았는데, 정작 제가 펑펑 울었어요.”

“맛있는 거 먹고 사람들이 칭찬해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종범이의 꿈은 다른 사람들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가끔 남들이 씨름 그런 걸 왜 하느냐고 말을 하면 힘이 빠지지만, 그냥 흘려버려요.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면 힘들었던 것들도 다 잊을 수 있어요”라며 종범이는 씨름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종범군이 전북 장수군 산서면 할아버지댁 자신의 벽화앞에서 메달을 목에 걸고 사진을 찍고 있다. 마을 환경 개선 사업 당시 할아버지는 손자의 사진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종범군이 전북 장수군 산서면 할아버지댁 자신의 벽화앞에서 메달을 목에 걸고 사진을 찍고 있다. 마을 환경 개선 사업 당시 할아버지는 손자의 사진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화려했던 198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씨름이 다시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다. 기술씨름의 쇠퇴로 긴 침체기를 겪으며 한동안 ‘비인기 종목’이었다. 하지만 ‘전통 스포츠’ 씨름에 대한 어르신들의 향수에 더해 젊은 팬들의 관심이 늘어나며 부활을 알리고 있다. 2017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됐고, 2018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씨름에 대한 국가 차원의 활성화 노력이 더해져 씨름 인구도 늘어나고 있다.

언제쯤 천하장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지 종범이에게 물었다. “한 10년 후쯤이요.” 소년 장사는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종범군이 관중으로 꽉 찬 모래판에서 포효하며 소리치는 머지않은 미래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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