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 1월9일 35년 만에 아들 곁으로 떠났다. 82세의 나이로 영면에 든 그의 인생은 아들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송두리째 바뀌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1929~2011)와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고 박정기씨(1928~2018)와 함께 집회 현장을 지켰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때인 1998년부터 422일 동안 국회 앞 천막 농성을 벌여 민주화운동보상법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2009년에는 용산참사 범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아 피해자 가족들과 아픔을 함께했다. 민주화·인권 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2020년 6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국사건을 맡아 온 ‘1세대 인권변호사’ 한승헌 변호사가 4월20일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66년 소설 <분지> 사건부터 동백림 간첩단 연루 문인 사건, 김지하 시인의 <오적> 필화 사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론 탄압 사건 등 ‘필화 사건’을 많이 맡았다. 고인도 여성지 기고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변호사 자격을 정지당하기도 했다.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등 시국사건 전문 변호사 활동은 1980년대까지 숱하게 이어졌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산파로도 불린다. 1986년 시국사건 변호사들이 모여 만든 정법회(정의실천법조회)를 모태로 2년 뒤 민변이 발족했다. 정권에 ‘눈엣가시’로 찍혀 고초를 겪으면서도 늘 유머를 잃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감사원장을 지냈다.
또 다른 ‘1세대 인권변호사’ 홍성우 변호사는 3월16일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971년 군사정권의 탄압에 반발해 판사들이 집단 사표를 낸 ‘1차 사법파동’ 때 법복을 벗은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부터 1975년 김지하 시인 사건, 1976년 김대중·윤보선 긴급조치 위반 사건, 1979년 YH 노동조합 사건, 1985년 서울 미문화원 방화 사건,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8년 문귀동 성고문 재정신청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의 변호를 맡았다. 2004년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던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이 5월29일 79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1964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그는 옥살이로 인한 제적·복학을 반복하며 1984년에야 대학을 졸업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5·18광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 등을 지내며 5·18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을 위한 사회활동에 매진했다.
노옥희 울산시교육감이 12월8일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 고인은 1979년부터 울산에서 교단에 서다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활동을 이유로 해직됐다. 이후 민주노동당·진보신당에서 활동하면서 2006·2010년 지방선거와 2008년 총선에 도전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2018년 울산에서 첫 여성·진보 교육감으로 당선됐고, 올해 재선에 성공했다. 교육감으로서는 전국 최초 교육재난지원금 지급, 강제 야간자율학습 폐지 등의 족적을 남겼다.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자녀들이 울산지역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일부 학부모들이 반발하자 직접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했고, 등교 첫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등굣길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원로’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이 10월25일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73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1976∼1985년 한국노총 연구위원과 정책연구실장을 지냈다. 1995년 민주노총 지도위원으로 노조 출범을 도우면서 양대 노총을 모두 경험했다. 1986년 ‘한국노동교육협회’(현 한국노동사회연구소)를 만들어 노조 간부들을 대상으로 교육활동을 벌였고, 2003년까지 명예이사장으로 일했다. 2007년에는 노조 활동가를 대상으로 세계노동운동사 학습모임을 시작했다. 2020년 <세계노동운동사> 전 6권을 완간했다.
‘사법개혁’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 윤관 전 대법원장이 11월14일 87세로 타계했다. 1993년 대법원장 취임 첫해 사법제도발전위원회를 구성해 인권변호사들에게도 위원직을 개방했다. 대법원장 시절 판사가 피의자를 직접 심문해 구속 여부를 결정하는 영장실질심사 제도를 도입했고, 일선 판사실에 걸려 있던 대통령 사진을 떼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