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대구에서 권총 연쇄 살인 사건이 있었다 (하)

전현진 기자

(상편에 이어 계속됩니다.)

#할머니

장성한 김병집이 할머니를 잃은 것은 2014년 5월 24일이었다. 토요일이었던 그날, 막 외출해 버스를 타러 갈 때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응급실에 가야겠어.” 할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폐암 치료를 받아오던 할머니는 평소 기력이 없으면 동네 병원에 들러 영양제나 진통제 약을 처방받아 먹었다. 응급실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한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김병집이 할머니와 함께 산 지 30년째 되던 해였다. 그는 1984년 9월24일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는 그보다 석 달 전 세상을 떠났다. 아들과 며느리가 두고 간 생후 11개월의 사내아이 김병집을 품은 건 할머니 임춘자씨였다.

김병집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는 게 이상했지만, ‘왜 부모님이 안 계시냐’고 할머니에게 묻지 않았다. 방에서 흐느끼는 할머니의 울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물어봐선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을 다졌다.

할머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제사를 빼먹지 않았다. 아들과 며느리의 제사상을 빼지 않고 차리던 심정이 어땠을까. 어린 김병집은 제사상 앞에서 흐느끼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누구의 제사상인지 묻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김병집이 중학생이 된 뒤에는 ‘부모님이 미국에 돈 벌러 갔다’는 할머니의 거짓말을 믿지 않았다. ‘두 분 다 돌아가신 것이구나.’ 먼 친척의 차를 얻어 타고 할머니와 종종 가던 공동묘지는 아마 부모님이 묻혔던 곳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 깨달음 뒤에도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묻지 못했다.

김병집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TV에 나오는 가수들의 춤을 따라했고 브레이크 댄스에 빠져 춤을 추러 다녔다. 청소년 댄스 대회에 입상한 일은 사춘기 시절 자랑스러운 기억이다. 그래도 ‘비행청소년‘이라 불릴 행동은 하지 않았다.

경상도 남자 김병집은 말수가 많지 않았다.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살갑지 않았다. 그래도 성인이 된 뒤에는 할머니와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했다. 할머니를 안아주고 뽀뽀도 해주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지내자고,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와 그렇게 이야기했다.

할머니는 그 긴 세월 동안 조그만 선술집을 운영하며 힘겹게 손자를 키웠다. 할머니는 평소 즐겁게 노래도 부르며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쇠약해졌다. 폐암 진단을 받았고 수술뒤에도 힘들어하셨다. 할머니가 가슴에 쌓아둔 이야기를 꺼낸 게 그 무렵이다.

“니는 정말 운이 좋았다.”

할머니는 손자를 보면서 말했다. 갓난아이였던 그가 보모의 품에 안겨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어머니는 자신이 운영하던 식당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어머니는 1984년 9월 24일 벌어진 ‘대구 신암동 무장간첩 주민살해사건’ 피해자였다.

2004년 국방부군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대비정규전사(對非正規戰史)에 사건의 개요가 기록돼 있다. 정리하면 ‘(손님으로 위장한 간첩이) 식당 홀에서 맥주 한 병과 안주 한 접시를 시켜놓고 술을 마시던 중, 여종업원(강명자씨)과 언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재떨이를 집어 던졌으나 빗나갔고 맥주잔으로 그녀의 머리를 내리쳐 상처 입혔다. 가게 안 방으로 도망간 그녀를 따라가 발로 짓밟고 있을 때 이를 본 여주인(당시 29세였던 김병집의 어머니 전갑숙씨다)이 달려들자, 권총으로 여주인을 사살하고 여종업원도 사살했다.’

대구 동구 신암동에서 어머니가 운영하던 희민식당에 무장한 간첩이 찾아왔고, 식당 여종업원과 대화 도중 신분이 노출돼 목격자를 없애기 위해 살해한 것으로 보이며, 활동 자금으로 획득하기 위해 금고를 뒤져 현금 등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 간첩은 이후 다른 미용실에서도 살인 행각을 벌이려다 발각돼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할매 무슨 황당한 소리고.”

김병집은 할머니에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간첩이 총으로 어머니를 죽였다니. 그 말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황당했다. 할머니는 30년 가까이 품어둔 기록 몇 가지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유언처럼 말했다. “내가 그때는 아무런 보상도 못 받았는데,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니가 이거 가져다가 보상 받을 수 있을 거다.”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김병집의 할머니 임춘자씨는 1985년 6월 당시 대통령 전두환씨에게 고통을 호소하며 탄원서를 썼다. 김병집은 할머니가 보관하던 이 자료를 2014년 무렵 알게 돼 이후 법원에 제출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병집의 할머니 임춘자씨는 1985년 6월 당시 대통령 전두환씨에게 고통을 호소하며 탄원서를 썼다. 김병집은 할머니가 보관하던 이 자료를 2014년 무렵 알게 돼 이후 법원에 제출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할머니의 기록

“다사다난한 국정시무에 불철주야 하시고 헌신노고가 많으신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의 만수무강을 애심(哀心)으로 기도합니다. 탄원인은 몇 차례나 망설이다가 황송함을 무릅쓰고 감히 본 탄원서를 봉정(奉呈)하오니 불경불비(不敬不備)한 점 관용하시옵고 단장(斷腸)의 비통한 탄원인의 심정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할머니가 1985년 6월에 쓴 탄원서다.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씨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 내 아들·며느리를 살려내라고 하소연하고 싶었겠지만, 혹여라도 트집잡히지 않으려 상대를 한없이 높이고 자신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단어를 골라 쓴 흔적이 뚜렷했다.

할머니는 탄원서에 간첩 사건으로 며느리가 숨졌지만, 오히려 간첩의 동조자와 관련자 색출 수사의 대상이 돼 3개월 전 병사한 아들의 유해까지 파헤쳐 부검했으며, 병사임이 확인되었고 오히려 며느리는 평소 반공정신이 투철해 간첩과 싸우다 피살된 것이 입증됐다고 적었다.

이후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된 손자를 자신이 양육하게 되었다는 사연도 적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 아들에게 생계를 의지하다 아들이 식중독으로 급사했고, 며느리에게 다시 생계를 의지하던 중 참변을 당해 살 길이 막막하다고 했다. 생활보호대상자이며 손자 양육이 벅차고, 장례와 부검에 큰 돈을 쓰는 바람에 사정이 더 어려워졌다고 했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탄원인의 딱한 사정을 통촉(洞燭)하시와 선처하여 주시옵기를 앙망(仰望)하는 바입니다”

탄원서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할머니는 마치 이 탄원서가 손자를 키워낼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조심하고 간절하게 적었던 것이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김병집은 할머니가 보관한 언론보도도 보았다. 대구 매일신문의 1991년 12월 21일자 보도 ‘이 고통·눈물은 누가 보상합니까’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기사 사진에는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초등학생인 자신이 할머니 옆에 앉아 있었다. 기사에는 할머니가 핏덩이 손자인 자신을 업고 행상을 하며 생계를 힘겹게 이어가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남북의 화해 물꼬가 조금씩 열리던 중에 북한의 도발로 벌어진 피해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할머니는 “너무 삶이 고달파 며느리가 묻힌 묘지에서 손자와 자살하려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라며 “그때마다 손자라도 잘 키워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을 다지고 지금까지 눈물 속에 살아왔다”라며 말했다.

“엄마가 미국에 돈 벌러 가서 병집이가 크면 돌아오신다고 속여왔는데, ‘엄마가 돌아오면 점퍼를 사달래야지’라고 좋아하던 손자가 최근 말을 잘 믿지 않으려 한다. 또 며느리 제사 때는 병집군에게 잔을 치게 했는데 올해는 ‘엄마가 죽어서 제사 지내는 것 아니냐’며 따지고 들어 아무 말 못하고 병집군을 안고 울었다.”

당시 대구시경(현 대구지방경찰청) 한 간부가 “정말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유족에 대한 보상을 수차례 상부에 건의했지만, 보상할 법적 근거가 없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법을 보완해서라도 보상을 해줬어야 마땅한데 안타까운 일”이라고 한 말도 있었다.

김병집은 30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의 죽음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1992년 12월21일자 매일신문에는 김병집의 할머니 임춘자씨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김병집은 할머니에게 신문 스크랩을 받아 복사한 뒤 손해배상 소송의 증거 자료로 제출했다. 사진은 국회도서관에 보관 중에 신문 스크랩. 전현진 기자

1992년 12월21일자 매일신문에는 김병집의 할머니 임춘자씨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김병집은 할머니에게 신문 스크랩을 받아 복사한 뒤 손해배상 소송의 증거 자료로 제출했다. 사진은 국회도서관에 보관 중에 신문 스크랩. 전현진 기자

#또 한 번 가족을 잃다

하지만 당장은 행동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건강은 날로 안 좋아졌다. 건강할 때 좋았던 노래 솜씨도 예전만 못 했다. 김병집은 할머니 손을 잡고 “할머니 죽으면 따라 죽는다”고 말했다. 할머니도 손자를 보고 힘을 냈다.

그러다 할머니가 응급실에 가겠다고 전화가 온 것이다. 할머니와 함께 응급실에 도착하니 각종 검사를 다 받아야 했다. 진통제나 영양제 한 번 맞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복잡한 과정이었다.

응급실 곳곳에 아파서 신음하는 소리가 울렸다. 오랜 투병으로 약해진 할머니는 정맥주사를 놓을 혈관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혈관이 가늘어진 탓이다. 바늘을 찌르고 빼고를 반복하다 할머니의 팔뚝에 멍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발목 부근의 혈관을 찾아 주사를 놓았다. 진통제를 계속 맞아도 할머니는 ‘아프다 아프다’ 했다.

“집에 가자.” 할머니가 말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았다.

“할매 집에 가고 싶어? 그럼 이거 주사만 다 맞고 빨리 가자.” 김병집은 할머니를 달랬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는 더 고통스러워했다. 의료진이 와 모르핀 주사를 맞을 수 있는데,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래도 맞겠다고 했다. 김병집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주사를 맞은 뒤 할머니는 정신을 잃었다. 김병집이 너무나 당황스러워할 때, 의료진은 심정지 상태가 되면 심폐소생술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고, 하지 않을 것이라면 미리 서명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김병집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서른 살이 넘은 성인이었지만, 아직 집안의 유일한 가족이자 어른은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가 정신을 잃고 병상에 누워있었다. 결국 심폐소생술의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서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소포화도가 계속 떨어졌다.

할머니가 누운 병상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계속해서 울렸다.

“여기요. 여기 봐주세요!”

김병집은 의료진을 부르면서 ‘할머니!’라고 계속 외쳤다. 아직 인사도 못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심정지 상태가 됐다.

사망 판정이 내려지고 나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침상은 복도로 옮겨졌다. 몇 없는 할머니의 친척과 친구에게 연락했다. 그렇게 도움을 받아 장례를 겨우 치렀다. 할머니는 그에게 가족 그 자체였다. 가족이 떠나고 그는 혼자 남았다.

40년 전 대구에서 권총 연쇄 살인 사건이 있었다 (하)
1984년 9월 24일 무장 간첩으로 파악된 남성이 김병집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희민식당(위 사진)에서 그의 어머니와 이 식당 여종업원을 총으로 쏘아 살해했다. 지난 9월 1일 찾은 당시 식당이 있던 자리는 세월이 흘러 찾아볼 수 없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전현진 기자

1984년 9월 24일 무장 간첩으로 파악된 남성이 김병집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희민식당(위 사진)에서 그의 어머니와 이 식당 여종업원을 총으로 쏘아 살해했다. 지난 9월 1일 찾은 당시 식당이 있던 자리는 세월이 흘러 찾아볼 수 없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전현진 기자

#소송

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를 밖으로 나오게 한 것은 할머니가 유언처럼 해줬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2014년 9월, 무작정 국정원에 전화를 걸어 대구 담당자를 만났다.

그 직원은 ‘가지고 있는 기록이 무엇이 있냐’고 물었다. 할머니의 유품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돌아온 답은 과거에 할머니가 들었던 것과 비슷했다.

“그때는 법이 없었고, 지금은 소멸시효가 지났다.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원통한 마음에 김병집은 자료를 찾고 법전을 뒤졌다. 사건 발생 당시의 국가보안법 제23조는 ‘간첩의 신고나 체포에 관련해 다쳤거나 사망한 자의 유족은 원호대상자로 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

김병집은 어머니의 죽음을 묘사한 보도 등을 살펴봤다. 어머니는 사건 당시 간첩을 만류하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고 발표됐다. 할머니와 자신은 무장간첩과 관련해 사망한 자의 유족이었던 것이고 원호대상자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억울하고 화가났다.

국가는 어머니를 보호하지도 못 했고, 보상하지도 않았다. 김병집은 이렇게 생각하며 손해배상을 청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송에 앞서 우선 2015년 9월3일 범죄피해자보호법에 따라 유족구조금 지급을 신청했다. 모든 지원자격을 갖췄고 지급대상에 해당되며 제한사유에도 해당되지 않았지만, 지급 기한이 지났다며 거절됐다.

결국 2015년 11월 11일 대한민국과 대구광역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변호사 선임비도 없어, 승소할 경우 성공 보수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선임해야 했다. 인지대 비용도 부담이 돼 처음에는 1000만원의 소액 재판으로 시작하고, 비용을 마련하면 청구 금액을 높이기로 했다.

원고 김병집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소장에 담았다.

그는 국가가 간첩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국가 존재의 근본적인 이유를 망각했으니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했다. 사건이 파출소 바로 옆에 있던 가게에서 벌어졌고, 사건 당일 간첩을 목격했다는 신고가 3건이나 들어왓었다는 당시 언론보도를 근거로 제시했다.

간첩 체포자에게 포상금이 지급됐지만, 같은 간첩에게 살해당한 유족에게는 보상이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원호대상자임에도 보상금 지급을 받지 못했으니 국가가 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대간첩작전지원 및 원호대책규정 제7조 원호사업 대상의 3항을 보면 ‘간첩의 소행 또는 대간첩작전으로 인하여 상이를 입은 자 또는 사망한 자의 유족’이라고 돼 있다.

또 할머니가 틴원서도 내고 대구시에 보상금 지급을 요청했을 때도 대구시 공무원이 법이 없다며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 자체로 손해배상 책임이 발생하는 잘못이자, 권리행사를 방해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피고 대한민국과 대구광역시 측은 먼저 국가가 손해배상의 책임을 질 불법행위가 없었다고 했다. 북한의 도발을 대한민국 소속 공무원이 완벽히 방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이 사건은 간첩이 침투에 성공해 발생한 것이지 해안경비를 하지 않아서 생긴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또 그의 할머니가 과거 누구에게 보상금 지급을 신청했고, 누가 불법적으로 묵살했는지 그 주장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고 받아쳤다. 김병집의 어머니가 원호대상자에 해당하는 ‘간첩을 신고 또는 체포’하는 데 관여했다고 볼 구체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니까 김병집의 어머니가 사망한 것은 “간첩이 여종업원과 언쟁하며 머리를 짓밟는 등 폭행하자 이를 말리기 위한 것이지, 간첩인줄 알고 특수훈련 받은 간첩을 체포하겠다는 의도로 행한 것이 아니라고 봄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신고를 한 것도 이후 사건 현장을 발견한 건물주라고도 했다.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 가정하더라도, 손해배상 청구권은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 발생 후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있은 날로부터 5년’의 시효가 지나면 소멸되므로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1987년 범죄피해자구조법이 신규 제정됐고, 1993년 문민정부가 수립됐으니 권리행사의 장애가 없어 그 이후로 계산해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또 원고 측 주장대로 김병집의 할머니가 구조금 지급을 신청했으나 ‘법이 없다’며 묵살당한 것을 인정하더라도, 구조금 지급 신청과 손해배상청구는 전혀 다른 절차이니 대구시 공무원의 방해로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되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재판은 길어졌다. 2015년 11월 소액사건으로 시작된 재판은 이후 청구금액을 5억원으로 변경하면서 2018년 3월 합의부에서 사건이 진행됐다. 1심 판결 전 법원은 국가가 김병집에 1500만원을 주는 것으로 양측의 화해를 권고했다. 하지만 원고도 피고도 반대해 무산됐다.

결국 판결에 들어갔다. 2018년 7월 법원은 피고 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원고 김병집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후 항소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고 2019년 5월 확정됐다.

2016년 2월 김병집이 ‘대구 신암동 무장간첩 주민 살해 사건’의 피해자인 어머니가 운영하던 식당 터에 서있다. 경향신문 자료 사진

2016년 2월 김병집이 ‘대구 신암동 무장간첩 주민 살해 사건’의 피해자인 어머니가 운영하던 식당 터에 서있다. 경향신문 자료 사진

#새로운 가족

김병집은 선고를 듣고 법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회사도 그만두고 뛰어들었는데, 허망한 결과였다. 국가는 시민을 보호하고 지키는데 한없이 인색했고, 시민의 요구를 들어주는 데는 한없이 엄격했다.

김병집은 패소한 뒤 한동안 방에 틀어 박혔다. 회사까지 그만두고 가족의 희생을 보상받겠다며 소송을 벌였는데, 이룬 것이 없었다. 남은 것 빚이다. 본인의 것은 물론 상대 측 소송 비용도 부담해야했다. 처음에는 억울한 마음에 안 내보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확정된 소송비용은 약 1200만원이었다. 일시불로 납부할 형편이 안 돼 매달 50만원씩 갚기로 했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미쳤다. 할머니가 원하는 건 이런 삶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다. 우선은 달리기였다.

천성이 긍정적이고 쾌활한 덕인지 상처를 떨쳐내면서 달리기 모임을 조직해 함께 달렸다. 그 때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났다. 연애를 시작하고 한동안 가족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그리고 관계에 확신을 갖게 될 무렵 조심히 이야기했다. 여자친구는 놀라면서도 이해해주었다.

김병집은 여자친구를 만난 후 다시 마지막 희망을 걸고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냈다. 신청 후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진화위 담당자는 김병집도 처음 들어본 이야기를 해줬다. 대구시에서 1985년 1월경 간첩 피살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금 지급을 협의하는 대구시지역대책협의회를 개최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시민 성금으로 위로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계속 연기되면서 흐지부지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받은 진화위 통지서에는 ‘각하’로 결정되어 있었다. 당시 김병집의 어머니가 사망한 것은 간첩의 소행이 분명하고, 경찰이 피해자는 물론 가족 등 총 122명을 조사해 모두 간첩과 무관하며 사건이 조작됐다고 볼 자료가 없어 진화위에서 새롭게 밝혀야 할 과제가 없다는 이유였다.

김병집은 결국 어머니의 죽음과 할머니의 오랜 고통을 누가 책임져야 하는 것인지 답을 얻지 못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여자친구는 함께 실망하면서도 남자친구를 위로했다.

“괜찮아. 변호사 비용은 내년 3월까지 같이 갚아 나가면 되잖아.”

둘은 서로 힘이 되고 위로하면서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김병집은 자신과 가족이 겪은 비극을 뒤늦게 알고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국가로부터 사과나 원하는 보상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런 일을 겪은 뒤 지금의 여자친구이자 예비신부를 만난 것은 작지 않은 의미였다. 할머니가 혼자가 된 그의 가족이 되어주었듯이, 그녀가 다시 혼자된 그의 가족이 됐다.

김병집은 인터뷰 도중 할머니의 마지막 날을 이야기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예비신부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예비신부는 가만히 등을 두드리고 눈물을 닦아줬다. 그는 할머니를 기억하고, 예비신부를 바라보며 가족이란 항상 함께 있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오는 11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기억

취재 중 확인된 1984년 9월 24일 총에 맞아 숨진 희민식당 주인 전갑숙씨(오른쪽)와 그의 남편 김진한씨의 묘지. 김씨는 아내 전씨가 사망하기 석 달 전 병사했지만 ‘대공용의점’을 확인하겠다며 발굴돼 부검되기도 했다. 전현진 기자

취재 중 확인된 1984년 9월 24일 총에 맞아 숨진 희민식당 주인 전갑숙씨(오른쪽)와 그의 남편 김진한씨의 묘지. 김씨는 아내 전씨가 사망하기 석 달 전 병사했지만 ‘대공용의점’을 확인하겠다며 발굴돼 부검되기도 했다. 전현진 기자

“맞아요. 어렸을 때 왔던 곳 같아요.”

지난 9월2일, 김병집은 예비신부와 경북 칠곡의 한 공동묘지를 찾았다.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한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마지막으로 왔던 곳이다. 약 2만기의 무덤 속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묘소를 직접 찾을 순 없었다. 관리사무소에 부모님 이름을 대고 직원을 따라 나섰다.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듯한 무덤 2기에 나무 그늘이 드리웠다. 헐벗은 봉분은 빗물에 씻겨 허물어졌다. 아버지 묘비엔 ‘처 전갑숙, 자 병집’이라고, 어머니 묘비엔 ‘자 김병집’이라고 한문으로 새겨졌다. 김병집은 묘소의 위치를 알게 된 것도 처음이었지만, 묘비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한동안 묘비를 바라보았다.

김병집의 사연을 처음 취재했던 것은 그가 재판 중이던 2018년 무렵이었다. 앞서 경향신문에서 그의 재판 소식도 전했다. 2019년 그가 패소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한동안 잊고 있다가,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하는 생각에 다시 연락했다. 그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지난 상처와 과거를 딛고 새로운 가족과 함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 그리고 사건의 피해자들과 그 가족이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취재를 시작했다. 취재를 하면서 과거의 현장에 가보았고, 기록을 찾기 위해 애썼다. 당시 사건 현장은 주소도 바뀌어 예전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찰과 대구시 등에 관련 자료를 달라고 정보공개청구를 해보았지만, 보존기한이 지나 폐기됐다는 답이 돌아왔다. 취재 과정에서 그의 부모님이 매장된 공동묘지 위치만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최근 우연히 찾은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사건의 흔적을 보았다. 3층 ‘북한 도발실’ 입구 부근엔 올해 9월 새로 설치된 연표가 있었다. 북한의 주요 도발사건 88건을 연대기순으로 검은 팻말에 적어 둔 것이다. 과거부터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다 1984년 9월 24일에 닿으면 ‘대구 간첩 주민살해’라고 짧막하게 적힌 팻말이 보였다. 무기류 전시 공간에 김병집의 어머니를 쏜 것과 같은 종류의 ‘베이비 브라우닝’ 권총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 겪은 이야기는 찾기 어려웠다. 며칠 뒤면 사건이 벌어진 지 39년 째 되는 날이다.

1984년 9월 24일 김병집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데 쓰인 것과 같은 종류의 초소형 권총인 벨기에제 ‘베이비 브라우닝’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전현진 기자

1984년 9월 24일 김병집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데 쓰인 것과 같은 종류의 초소형 권총인 벨기에제 ‘베이비 브라우닝’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전현진 기자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3층 북한도발실 벽면에 설치된 연표에 ‘대구 간첩 주민살해’라고 적혀있다. 이 팻말은 올 9월 새로 설치된 것으로 북한이 저지른 88건의 주요 사건을 표시해 둔 것이다. 전현진 기자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3층 북한도발실 벽면에 설치된 연표에 ‘대구 간첩 주민살해’라고 적혀있다. 이 팻말은 올 9월 새로 설치된 것으로 북한이 저지른 88건의 주요 사건을 표시해 둔 것이다. 전현진 기자

40년 전 대구에서 권총 연쇄 살인 사건이 있었다 (하)
‘다시 읽고 싶은 긴-이야기 코끼리’는 다시 읽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 장문의 내러티브 기사로 소개하는 경향신문 뉴콘텐츠팀의 버티컬 채널입니다. 곳곳에 숨은 이야기를 찾는 이들과 영감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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