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단골 시각장애인 1천명…세상과 소통 문 닫히다

김세훈 기자

① 서울점자도서관

서울 노원구 서울점자도서관 서가에 지난 28일 각종 사전 밑으로 점자프린터와 점자책이 놓여 있다. 김세훈 기자

서울 노원구 서울점자도서관 서가에 지난 28일 각종 사전 밑으로 점자프린터와 점자책이 놓여 있다. 김세훈 기자

올해부터 서울시 지원 끊겨
31년 장애인의 벗 문 닫아
점자 도서 제작도 올스톱
“효율성만 따진 정책 유감”

지난 28일 오전 서울 노원구의 한 빌딩 7층에 위치한 서울점자도서관. 문을 열자 책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나왔다. 책장 한쪽에는 낱장으로 뜯긴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점자책으로 변환하기 위한 스캔 작업을 거친 책들이었다. 한쪽에는 도서관 교육 프로그램 때 사용되던 점자 프린트가 놓여 있었다.

직접 방문해 책을 빌리는 일반 도서관과 달리 점자도서관은 온라인 대출·배송 대출이 주를 이룬다. 이 때문에 도서관에 상주하는 직원은 없다. 이날 도서관에서 만난 유주연 주임도 복지관과 이곳을 오가며 업무를 해왔다. 유 주임은 “대출 이용자는 연 1000명 정도로 대부분 단골 이용자”라며 “무협, 역사소설 등 장르를 정해서 꾸준히 읽는 분들이 많다. 아예 사서에게 책을 추천해서 보내달라고 하시기도 한다”고 말했다.

도서 제작도 도서관의 주된 업무 중 하나다. 지난 31년간 이곳에서 만든 녹음 도서는 약 5900종에 달한다. 매년 약 100~200명의 자원봉사자가 일반 도서를 점자 텍스트로 변환하는 일을 도왔다. 도서관 측은 전자도서 파일을 제공하는 온라인 도서관 ‘넓은 마을’도 운영하고 있다. 도서관에선 시각장애인 대상 독서·교육 프로그램도 한 달에 1~2번꼴로 열린다. 점역교정사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취업한 사람들도 꾸준히 나온다.

그러나 올해부터 도서관은 사라진다. 도서관을 운영해온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한시련)는 지난 18일 “서울점자도서관을 2023년 12월31일을 마지막으로 폐관한다”고 밝혔다. 도서 대여 및 제작 사업도 중단됐다. 한시련은 올해 초 설립될 점자교육문화원 등 산하단체에 관련 사업을 이관할 예정이다.

지속적인 보조금 삭감이 도서관 폐관에 영향을 미쳤다. 민간 기관인 서울점자도서관은 서울시와 노원구에서 예산을 지원받아왔다. 그러나 2020년부터 서울시 지원 예산이 줄며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시련에 따르면 서울시의 도서관 보조금은 2020년 7400만원에서 2021년 5200만원, 2022·2023년 약 4300만원으로 줄었다. 결국 한시련 이사회는 올해 초 도서관 사업을 접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영일 한시련 회장은 “그간 인건비 지원 없이 어렵게 운영을 해왔다. 시에 예산 지원을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며 “도서관이 아닌 다른 형태로 사업을 구조조정하는 것일 뿐 사업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앞으로 협회가 비용을 자부담해서라도 기존 이용객들에게 불편이 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도서관 측은 기존 이용객에게 도서관 폐관 소식을 알리고 있다. 사업이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이지만 책을 더는 빌려보지 못할까 걱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유 주임은 “도서관 폐관 후에도 녹음 도서는 보관하겠지만 신간 녹음 도서 제작이 가능할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했다.

서울점자도서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 내 11곳의 민간 점자도서관도 보조금 삭감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도서관협의회에 따르면 서울시의 시각장애인 대상 도서관 지원 금액은 2019·2020년 8억원에서 2021년 7억원, 2022년 6억원으로 줄어들었다. 협의회는 시에 예산 증액을 호소했으나 “장애인 예산뿐 아니라 전체 예산이 삭감 기조”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도서관 예산 부족은 서울점자도서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도서관들은 아직까지 2024년도 지원 예산을 확정 통보받지 못한 상태”라고 했다. 서울도서관 관계자는 “코로나로 도서관 이용률이 줄어 일시적으로 지원금이 감소한 것이다. 최근 다시 늘리는 추세”라고 말했다.

윤종술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대표는 “시각장애인에게는 점자가 소통의 방식인데 예산을 삭감한다는 건 시각장애인에게서 언어를 박탈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면서 “소통에서 배제되면 삶의 질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순서다. 효율성만 앞세운 정책의 결과로 장애인의 기본권도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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