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장시간 노동 개선 매우 중대···주 52시간 강제 필요”

유선희 기자

노동자-사용자 대등한 협상력 의문 지적도

“장시간 노동, 노동자 건강과 안전 위해요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및 각계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지난해 4월13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주 69시간 노동시간 개편안 폐기 촉구 의견서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및 각계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지난해 4월13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주 69시간 노동시간 개편안 폐기 촉구 의견서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헌법재판소가 주 52시간 상한제가 합헌이라고 판단한 배경에는 한국의 장시간 노동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사실이 깔려있다. 헌재는 4일 공개한 결정문에서 장시간 노동 관행을 깨기 어려운 사회 구조, 사용자와 노동자가 대등하게 협상하기 어려운 환경 등을 고려할 때 주 52시간 상한제의 강제 적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사자 간 합의를 앞세워 법정 근로시간 유연화를 추진 중인 윤석열 정부의 정책에 반하는 판단으로 해석된다.

주 52시간 상한제를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53조 제1항이 합헌이라고 판단한 헌재 결정문을 보면, 헌재는 장시간 노동이 노동자의 건강·안전은 물론 생산성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등 복합적인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고 전제했다. 노동자에게 휴식·회복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아 건강에 위해 요소가 되고, 노동시간이 늘수록 산업재해 위험도 커진다고 했다. 헌재는 “우리나라는 장시간 노동을 해결하기 위해 1989년과 2003년 두 차례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법정 근로시간을 1주 40시간으로 단축했다”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9년 전체 취업자의 연간 실근로시간이 1967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국가 중 최상위권”이라고 지적했다.

헌재는 사용자와 노동자의 자율적 합의를 존중하는 게 원칙이라면서도 헌법 제32조 제3항이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라고 규정한 점을 짚었다. 개별 노동자가 사용자에 비해 경제적·사회적으로 열위인 경우가 많으므로 국가가 ‘인간의 존엄’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헌재는 연장근로 상한을 법으로 강제하지 않는 국가들도 있다면서도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 주목했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 문제는 사용자가 비용 절감을 위해 비정규직 연장근로로 목표 생산량을 채우고, 노동자는 소득 증대를 위해 연장근로를 선호하는 구조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헌재는 “이 같은 상황에서 당사자 간의 합의에 따라 연장근로의 상한에 대한 예외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 상한이 적절한 수준에서 제한돼 실근로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라고 했다.

헌재는 또 “당사자 간 합의 방식을 구체화한다고 해서 근로자에게 사용자와 대등한 협상력을 보장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했다. 기업들이 포괄임금제(실제 노동시간을 따지지 않고 일정액을 지급하는 제도)를 상시적으로 활용하는 상황에서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가 연장근로에 대한 의사나 요구사항을 관철하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지난해 윤석열 정부는 1주간 근로 한도를 60~69시간까지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당사자 간 합의’ 하에 진행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헌재는 상한제를 강제하지 않고 당사자 간 합의에만 맡겨 뒀을 때 실근로시간을 줄이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및 각계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지난해 4월1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주 69시간 노동시간 개편안 폐기 촉구 의견서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및 각계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지난해 4월1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주 69시간 노동시간 개편안 폐기 촉구 의견서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헌재는 주 52시간 상한제가 사업장 규모에 따라 시차를 두고 적용됐고, 근로기준법이 이미 탄력적·선택적 근로시간제, 특별연장근로 등 다양한 예외를 둔다며 사용자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침해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부가 기업의 경영상 어려움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지원 정책을 편 것도 고려했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추가 수당을 받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원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헌재는 “저임금 문제는 단순히 법정 근로시간 외 근로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최저임금 인상 등 시급 근로자의 보호나 기본급과 수당 사이의 비중을 조정하는 등의 임금체계 개편 등을 통해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했다.

이어 “주 52시간 상한제의 정착을 위해 정책적 지원이 행해지고 있다”라며 “고용이 안정되고 장기적으로 장시간 노동 관행이 개선되며 실근로시간 감축이 고용 증진으로 이어진다면 일과 삶이 양립될 수 있는 보다 바람직한 노동환경이 조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헌재는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장시간 노동이 일상화돼있는 국가로서, 주 52시간 상한제 조항을 통해 실근로시간을 단축시켜 장시간 노동 문제를 개선하고자 하는 입법 목적은 매우 중대하다”며 “(이 조항 때문에) 사용자와 근로자에게 불이익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장시간 노동을 해결하고 실근로시간 단축을 통해 근로자에게 휴식을 보장하고자 하는 공익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하은성 샛별노무사사무소 대표는 “헌재 결정은 주 최대 근로시간을 물리적으로 52시간보다 상향하는 것이 근로기준법 입법 연혁이나 장시간 노동 해소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사용자와 노동자 간 합의가 실제 어렵다는 점을 짚어주고, 주 52시간 상한제가 일률적으로 강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담았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라고 말했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은 “일터에서 노동환경이나 시간 조건에 대한 교섭력이 없는 노동자들은 주 52시간 상한제를 법률로 규제하지 않으면 건강과 생명이 더 위험해질 수 있다”라며 “이번 헌재 결정이 장시간 노동정책 방향으로 가는 정부 흐름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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