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이 얼마나 더 있어야 하나

이문재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자전거 보관소와 낮은 시멘트 담 사이 좁은 공간. 내다버린 화분 20여개가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제법 큰 화분이었다. 벤자민이나 남천 같은 키 큰 나무를 감당할 만한 크기였다. 겨우내 버려졌던 화분들이 날이 풀리자 ‘텃밭’으로 바뀌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고추를 정성들여 키우고 있었다. 하얀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고추꽃은 앙증맞을 정도로 작고 하얗다. 저렇게 소극적인 꽃이 그렇게 매운 열매를 맺다니, 볼 때마다 신기했다.

지난주 일요일 오전, 자전거를 가지러 가다가 보았다. 한 할머니가 화분 근처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붓을 들고 있었다. 자루가 가늘고 긴 수채화 붓으로 고추꽃을 하나하나 건드리고 있었다. 인공수분을 하는 것이었다. 비닐하우스도 아니고, 또 제때에 가루받이를 하지 않으면 수확에 큰 차질이 생기는 과수원도 아니었다. 나무가 제법 많은 신도시 아파트인데다, 단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논과 밭이 있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야트막한 산도 있었다. 그런데 인공수분이라. 벌이 찾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녹색세상]붓이 얼마나 더 있어야 하나

그러고 보니 벌이 보이지 않았다. 흰나비는 아침마다 두서너 마리씩 눈에 띄곤 했는데, 윙윙대는 벌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산수유, 벚꽃, 목련, 모란이 피고지는 동안 아파트 화단에서 벌을 보지 못했다. 서둘러 기사를 검색해보니, 토종벌이 멸종 직전이었다. 농민신문에 따르면, 농민들은 토종벌의 99%가 이미 죽었다고 추정한다는 것이었다. 꿀벌의 애벌레가 탈바꿈하기 전에 말라죽는 ‘낭충봉아부패병’이 주범이었다. 하지만 치료법은커녕 발병 원인조차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서양벌도 문제였다. 서양벌도 곰팡이성 세균에 감염돼 몸이 굳는 ‘석고병’에 노출되어 양봉농가들이 아연 긴장하고 있다고 한다.

꿀벌의 집단폐사(CCD)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한반도에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 한나 노드하우스의 <꿀벌을 지키는 사람들>(더숲)에 의하면, 미국에서도 19세기 후반 이후 21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유로 벌들이 집단폐사했다. 봉군 붕괴의 원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해졌다. 살충제 남용에 이어 유전자 교란, 신종 병원균 출현, 최근에는 휴대전화에서 나오는 전자파도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노만 마이어가 편집한 <가이아 아틀라스>(지영사)에 의하면, 식물 한 종당 적어도 스무 종의 동물이 의존해 살아간다. 식물이 한 종 사라질 때마다 더 많은 종의 동물이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현재 지구상의 생물은 700만~1300만 종. 이 중 대부분이 무척추동물인데, 무척추동물 중 80~90%가 곤충이다. 대량 멸종은 곤충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다. 하루 약 20종의 곤충이 지구에서 사라진다. 꿀벌과 같은 곤충의 멸종은 지구 생태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꿀벌이 사라지면 우선 농작물의 수확량이 급감한다.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이내에 인류가 멸종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보도에 의하면, 지구상의 충매화 중 80%가 꿀벌에 의존한다. 세계 100대 농작물도 꿀벌이 없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꿀벌이 주요 농작물의 가루받이 중 71%를 담당하고, 다른 곤충과 새가 나머지 29%를 차지한다.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먹을거리 중 3분의 1 이상이 꿀벌을 매개로 한다는 보고도 나와 있다.

“내년에는 봄이 안 와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으로 사는지 다시 생각하게 했으면 좋겠다.” 건축가 고 정기용이 전 국토의 공사장화를 비판하며 덧붙인 말이다. 벌이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지 성찰하지 않는다. 대신 붓을 든다. 우리에게는 몇 자루의 붓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 이것이 붓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인간이 벌과 나비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우리는 대체 무엇으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가. 오지 않은 봄이 가고 있다. 벌이 찾아오지 않아서 오지 않은 봄이 이렇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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