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삼성에 묻다

홍재원 산업부 기자

‘패스트팔로어(fast follower)’는 다른 기업의 새 제품을 빠르게 추격하는 데 능한 기업을 뜻한다. 삼성전자를 이렇게 부르는 이들이 많다. 다른 기업이 혁신 제품을 내놓으면 순식간에 따라붙어 ‘비슷하지만 더 좋은 제품’으로 원조 기업을 제압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패스트팔로어 전략으로 재미를 봤다. TV와 가전제품의 강자는 미국과 일본 업체들이었지만 삼성은 때론 열심히 배워가면서, 때론 더 좋은 아이디어를 보태가면서 따라붙었다. 전쟁까지 겪은 후발 산업국가에서 태동한 기업에, 이 전략은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기자 칼럼]애플이 삼성에 묻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덩치를 키운 후에도 이 전략은 바뀔 줄 몰랐다. 1995년 만도기계(현 위니아만도)가 김치냉장고 ‘딤채’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한 적이 있다. 2년 후 삼성이 곧바로 뛰어들었다. 시장의 절반을 삼성이 가져갔다.

국내 벤처기업들이 개발·판매한 MP3플레이어는 2000대 초·중반 국내외에서 대히트를 쳤다. 당시 레인콤의 ‘아이리버’ 돌풍은 인상적이었다. 예쁜 막대기처럼 생긴 MP3플레이어는 젊은이들의 필수품이었고, CD플레이어를 시장에서 완전히 밀어냈다. 그때도 삼성은 없었다. 나중에 뛰어들어 이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다. 필름카메라를 끝장내고 디지털카메라 시대를 연 것도 삼성전자는 아니었다. 역시 나중에 뛰어들었다.

온 세상을 뒤흔든 새로운 제품을 삼성전자에선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전자업계에선 “삼성은 검증되지 않은 시장엔 절대 뛰어들지 않는다”고들 한다. 숨막힐 듯한 조직 분위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삼성처럼 내부 경쟁이 심하면 구성원들이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형성된 시장이라야 진출한다. 혁신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인 셈이다.

애플과의 특허소송은 이런 맥락에서 예견된 위험이었다. 애플 아이폰은 전 세계 휴대폰 모양을 ‘네모난 막대기’로 바꿔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진 제품이다. 삼성전자는 언제나처럼 이 제품에도 따라붙었다. 그러다 나중엔 아예 역전시켜버렸다. 애플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전 세계에서 소송을 걸었다. 애플은 삼성전자를 패스트팔로어가 아닌 ‘카피캣(copycat)’으로 부른다. 카피캣은 ‘따라쟁이’를 뜻하는 비난조의 말로, 기업엔 욕설에 가까운 용어다.

애플과의 소송전 결과는 예단하기 어렵다. 삼성이 패스트팔로어인지, 카피캣인지도 각국 법원마다 엇갈린다. 다만 애플은 삼성에 큰 물음을 던졌다.

스마트폰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세상을 흔들 제품은 나올 것이다. 삼성전자가 이젠 그런 제품들을 만들 준비가 돼 있느냐고, 애플이 묻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번 소송전을 계기로 답해야 한다. 삼성이 스스로 답을 찾아낸다면 1조원을 물어준다 해도 남는 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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