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투표는 계산된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very vote counts.” 영어권 국가에서 투표 참여를 독려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모든 투표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반드시 투표에 참여하자는 독려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모든 투표는 중요하므로 “나 하나쯤이야” 하지 말라는 얘기다.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표현을 들자면 ‘투표는 신성한 권리’라는 말이 있겠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여지없이 들려오는 말들이다.

[직설]모든 투표는 계산된다

그런데 ‘중요하다’는 의미의 ‘count’에는 ‘계산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두 번째 의미로 말을 약간 변형하면, ‘모든 투표는 계산된다’이다. 이렇게 말할 때 ‘투표’는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데이터다. 당선자의 득표수와 투표율뿐만 아니라 낙선자 득표수와 무효표 수, 기권율도 기록에 남는다. 이러한 데이터에 해석이 더해지면 여론이 된다. ‘모든 투표는 중요하다’는 믿음이 만드는 것이 당선자라면, ‘모든 투표는 계산된다’는 생각은 선거가 끝나고 난 뒤에도 사회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론을 만든다.

모든 투표가 계산되므로 사표(死票)도 아쉬울 게 없다. 낙선자가 기대보다 많은 표를 받았다면 하나의 정치적 신호가 된다. 2014년 지방선거가 좋은 예시다. 당시 새누리당의 철옹성처럼 여겨지던 대구시장 선거에서 김부겸 후보가 낙선했지만 기대 이상의 표를 얻었다. 이는 대구 지역 유권자들에게 ‘민주당 계열도 가능성이 있다’는 신호가 됐고, 그 결과 2016년 총선에서 김부겸 후보가 수성구갑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사표는 한 사회를 뒤흔들기도 한다. 2016년 미국 대선 민주당 예비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버니 샌더스가 그랬다. 자본주의의 대장국가인 미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나온 그가 그토록 돌풍을 일으킬 거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샌더스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국 사회에 사회주의가 유행처럼 번졌다. 그는 스스로 깃발이 되어 사람들을 모아냈고, 미국의 청년들은 비로소 같은 정치적 열망을 공유하는 동료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본선 진출도 못한 정치인이 만들어낸 결과다.

심지어 무효표와 기권율도 정치적 신호가 될 수 있다. 어떤 선거에서 눈에 띄게 무효표가 나온다면 이는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 이유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올 것이다. 기권율도 마찬가지다. 직전 선거 대비 기권율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면 역시 분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보통 유권자들의 실망 내지 무관심으로 해석되겠지만, 선거를 앞두고 어떤 이슈가 있었는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 2011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추진한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투표율 33.3%를 넘기지 못해 무산됐을 때 가시적인 투표 보이콧 운동이 전개되어 해석의 틀을 제공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이슈를 만드는 것이 선거만큼이나 중요하다. 선거는 어떤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을 구체적인 숫자로 환산함으로써 공론을 만드는 민주주의의 한 과정이다. 그 누가 뽑힌들 해석되지 못한다면 선거는 단지 사람을 교체하는 행정적 절차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얘기다. 무기력한 투표는 확고한 의지가 담긴 기권보다 무의미하다. 그러니 사표심리에 지배받지 말고 당당하게 투표하자. 뽑고 싶은 사람이 없는데도 꼭 투표해야 한다고 갈등하지 말자. 선거에 참여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번 선거가 ‘촛불정신’의 지속을 결정하는 선거라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촛불정신’이야말로 선거가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 사건이지 않았던가.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조차 탄핵소추안에 동참하게 만든 힘은 선거가 아니라 거대한 운동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무엇이 두렵나. 선거 다음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 공화국의 시민이다. 유권자로서 우리는 단 한 표를 행사할 뿐이지만 시민으로서 우리는 더 많은 권리를 지닌다. 정치와 선거는 동의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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