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김용섭을 추모하며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14년 전의 일이다. 2006년 제49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는 ‘우리 시대의 역사가를 말한다’라는 주제의 콘퍼런스가 열린 적이 있었다. 동양사학의 민두기, 서양사학의 민석홍과 함께 국사학의 이기백과 김용섭 학문에 대한 후학들의 평가가 이뤄졌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이 자리에서 서양사학자 김기봉은 ‘“모든 시대는 진리에 직결돼 있다” : 한국 역사학의 랑케, 이기백’을 통해 이기백의 국사학을 분석하고, 국사학자 윤해동은 ‘‘숨은 신’을 비판할 수 있는가? : 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을 통해 김용섭의 국사학을 조명했다. 한국 역사학의 ‘랑케’와 ‘숨은 신’이라는 비유가, 김기봉과 윤해동의 평가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내겐 적절하고 타당해 보였다.

이렇게 평가됐던 김용섭 선생님이 10월20일 세상을 떠났다. 선생님으로부터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받아온 나로서는 선생님의 삶과 학문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선생님을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라고 생각해 왔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선생님은 자기 완결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했다. 조선 후기에서 최근에 이르는 우리 근·현대사에 대해 선생님은 농업사를 중심으로 일관되고 포괄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둘째, 선생님이 주조한 ‘내재적 발전론’은 광복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역사 및 사회이론 가운데 하나다. 역사는 과연 어떻게 발전하고 어떤 성취와 과제를 남기는가에 대해, 설령 내재적 발전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선생님은 설득력 높은 답변을 내놓았다.

선생님이 남긴 저작들 하나하나가 모두 노작이지만, 대표 저작은 두 권으로 이뤄진 <조선후기농업사연구>일 것이다. 선생님의 문제의식은 1권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의 정체성의 표본은 조선후기로 간주되고 있는 데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개항을 계기로 외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통념되고 있는 데서, 필자가 생각한 대로 이 시기의 농촌사회에서 주체적인 입장에서의 중세사회의 해체과정이 밝혀진다면, 정체성이론이나 타율성이론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데서였다.”

<조선후기농업사연구>를 꿰뚫는 역사틀이, 선생님 자신이 직접 사용한 말은 아니지만, 바로 내재적 발전론이다.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 아이디어는 조선후기 사회에서 자생적인 자본주의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 논리는 두 가지로 이뤄져 있다. 첫째, 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사적 소유의 성장과 지주전호제의 성립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맹아(萌芽)를 일궈냈다. 둘째, 중세사회를 해체하고 근대사회를 열고자 했던 자생적 자본주의와 아래로부터의 농민 저항은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억제되고 결국 식민지 수탈체제가 확립됐다.

선생님의 학문이 조선후기농업사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의 연구는 고대와 중세의 농업사, 근대와 분단 시대의 농업사까지 확장돼 우리나라 농업사 전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완결됐다. 선생님이 세운 한국사 체계가 지금의 한국 사학의 골격이 됐다는 수제자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평가는 정확하고 온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재적 발전론에 일각에선 그 경험적 타당성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내가 보기에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하나가 존재하는 건 아닐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선생님의 역사학을 통해 비로소 우리 근대사의 역동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됐고, 또 세계사적 보편성 속에서의 한국사적 특수성을 인식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국문학자 김윤식 선생님, 올해 생태학자 김종철 선생님과 여성학자 이효재 선생님, 그리고 국사학자 김용섭 선생님이 이승을 떠났다. 1960년대 이후 학문 활동을 시작한 네 분 선생님의 연구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우리 근대와 현대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디에 서 있는지에 대한 탐구였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넘어 새로운 100년을 모색해야하는 현재, 그 미래의 나아갈 길은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야 하고, 바로 그 자리에 대한 탐구에서 네 분 선생님의 학문적 기여를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생님은 신채호 선생과 백남운 선생의 우리 역사 연구를 높이 평가했다. 하늘나라에 가셔서 신채호 선생과 백남운 선생, 또 다른 수제자 방기중 선생과 밀린,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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