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묻지 않는 사회

한지혜 소설가

한 달 전쯤이던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곳에서 강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낯선 곳이었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휴대폰에 있는 지도 애플리케이션으로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늦은 저녁 갑자기 휴대폰이 고장 났다. 그다음 날 만나야 할 담당자들 모두의 연락처가 휴대폰에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장소와 시간뿐이었다.

한지혜 소설가

한지혜 소설가

다행히 컴퓨터가 있었다. 컴퓨터로 지도에 접속해 찾아가야 할 곳의 위치와 그곳에 가기 위해 이용해야 할 교통수단 목록을 일일이 메모하였다. 도보 이동 구간이 제법 있는 게 문제였다. 지도는 평면이라 그 거리의 풍경을 알 수 없었다. 위성사진을 볼 수 있었지만 사진만으로 10분 이상의 거리를 유추하기 쉽지 않았다. 그 거리는 택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날 목적지에서 가장 가까운 전철역에 내렸을 때, 나는 또 당황하고 말았다. 어디에도 택시 승차장 표시가 안 보였다. 역사를 중앙에 두고 몇 겹의 도로가 나이테처럼 둘려 있는 곳이었다. 그 도로의 어디쯤에서 차를 타야 할지 알 수도 없거니와 오가는 택시도 없었다. 어쩌다 지나가는 택시는 모두 ‘예약’ 등불이 켜져 있었다. 나도 택시를 호출하고 싶었으나 휴대폰이 없었으므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길의 어디쯤에서 차를 탈 수 있는지, 어디로 가면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 그러는 동안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건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모른다는 거였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언어로 설명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당황스러웠는데, 차츰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오른쪽 왼쪽으로 방향만 틀며 길을 찾는 건 이제 자동차뿐이 아니었다. 걸어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여기가 어디인가, 궁금해지면 ○○사거리라든가 △△시장 같은 간판 대신 휴대폰에 내장된 지도를 켜고 좌표에 찍힌 점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면 되는 시대인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하는 질문에 언어로 대답할 필요가 없는 시대, 혹은 언어로 대답하지 못하는 시대.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거나 알 필요가 없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내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건 힘이 되기도 하고, 두려움이 되기도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르는 게 차라리 약이 되기도 하고, 오히려 공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경우이든 그것은 자신의 위치가 궁금한, 어디로든 가야 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움직이고자 할 때, 벗어나고자 할 때, 오직 지향점이 있을 때 우리는 묻는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 움직이지 않는, 움직일 이유가 없는 자에게는 좌표도 언어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지 않는 사회란 어쩌면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은,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의지를 잃어버린 사회일지도 모른다.

한 달 전 나는 길을 잃지 않았다. 나에게는 반드시 도착해야만 할 곳이 있었고, 그곳에 가야 할 책임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 나는 길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더하여 오랜 친구가 그 길의 끝에서 나를 기다려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도 해주었다.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으리라 믿는다.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목적지로 떠났으리라. 동행이 있다면 더욱 쉽게 길을 걸어갔으리라. 나는 그날의 소동이 올해 내가 겪은 모든 시간의 은유 같기만 하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나 나는 지금 2020년의 마지막에, 동시에 2021년의 처음에 서 있다. 낯선 길이고 두렵지만 가고자 하면 또 어디로든 가리라 믿는다. 이번에는 내가 누군가의 벗이 되어줄 수 있다면 더욱 기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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