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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탤지어, 고향과 추억이 주는 따뜻한 위로
설 명절이 다가오면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고, 그렇지 않더라도 마음 한편에 고향을 떠올리곤 합니다. 고향이란 단어만으로도 우리의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향은 단순히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고향은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위로하며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감정적 자원으로 작용합니다.아사다 지로의 소설 <나의 마지막 엄마>는 신용카드회사에서 극소수 VIP 고객들에게 특별히 제공하는 가상의 고향 방문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바쁜 삶 속에서 잠시나마 고향의 따스함에 안겨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고향이 가진 치유적 힘을 느끼고 가슴 찡한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전라남도는 ‘고향애(愛) 여행가자’란 프로그램을 통해 출향 도민과 재외동포들이 고향의 정취를 만끽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단순히 지역 경제 활성화를 넘어, 개인의 정체성 회복과 정신적 안정에 기여하는... -
꼭 다 털어놔야 하는 건 아니에요
힘든 일을 겪고 보호자와 찾아온 분이 있다.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보호자가 툭 치며 말한다. “빨리 속에 있는 걸 다 털어놔야 해. 그래야 좋아지지.…”첫 진료가 끝나고 두 달이 지나도 여전히 말을 잘하지 않는다. 부모나 배우자가 내게 물어본다. “선생님이 말을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에 있는 걸 다 뱉어내서 비워야 좋아지는 거잖아요.”한시라도 빨리 말로 다 표현해야 좋아지는 것일까?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 억압되어 꽉 차 있을 때 타인에게 말하면 시원하고 후련하다. 환기 효과 덕분이다. 심리상담 문턱이 낮아지고 일반화되면서 큰 사건을 겪어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가급적 빨리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하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만들어졌다. 바람직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게 언제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때에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2003년 미국 하버드대 리처드 맥널리 심리학과 교수 등은 위기상황 이후 응급상... -
한편 밤하늘에서는 땅밑에서는
지난 연말에는 세상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독일,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 등 세계 곳곳에서 그러했다. 휴대폰 잠금 화면을 열어 뉴스를 확인할 때마다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져왔다. 소식은 그만큼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듯 보였다.도저히 눈길을 거둘 수 없는 소식들이 일상에 쏟아져 들어올 때면 나는 세상이 유독 빠르게 나빠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기술 발전으로 현대인이 그런 소식을 더 접하게 되는 건지 헷갈려진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너무 많은 소식을 알고 지내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사람들이 뉴스를 확인하며 사회 변화를 감지하고 응답하는 일과 매일의 일상을 보호하고 꾸려가는 일 사이에서 자신만의 균형을 찾기를 소망한다. 우리를 숨쉬게 하고 버티게 하는 순간들, 이를테면 눈이 온 거리를 개와 함께 산책하는 일, 좋아하는 사람을 마중하러 가는 일 같은 것은 너무 사소해서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한편 지... -
당분간 모든 싸움에서 진다 해도
수년 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공부할 때, 관련 기록을 보며 처음 든 의문은 ‘이웃이 왜 몰랐을까’였다. 첩첩산중도 외딴섬도 아닌 도심 부랑인시설에서 감금·폭행과 강제노역으로 수백 명이 죽어갈 동안 어떻게 그랬을까. 그러다 한 인터뷰에서 그곳을 ‘걸뱅이들 살던 데’라 복기하는 주민을 보며 짐작했다. 어쩌면 다수는 몰랐다기보단 모르고 싶었던 것 아닐지. 추운 날 내 호주머니 속 동전에 호소하여 마음 산란하게 했던 ‘걸뱅이들’을 먹이고 재워준다니 다행이라 자위하며 말이다.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보면서도 생각했다. 1980년대 중반 아일랜드 소도시에서 기득권을 지닌 수녀원이 갱생의 명목 아래 ‘타락한’ 소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함을 이웃이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닫힌 문 저편에서 모종의 불의가 일어나고 있음은 감지했을 테다. 이런저런 소문이 돌지만, 누구도 더 캐묻진 않는다. 가여운 애들이 굶진 않으니 감사한 일이라 안위하는 게 속 편했을... -
악한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악을 지칭하는 영어 evil을 거꾸로 하면 live, 삶이다. ‘영어 철자처럼 악은 우리 삶을 거스르는, 삶의 생명력을 파괴하는 과정이다’라는 조크를 대중에게 알린 사람은 정신과 의사 스콧펙이었다. 스콧펙은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역작에서 ‘악의 심리학’에 관해 기술했다. 그는 ‘우리는 여전히 악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했다. 이유는 대다수 악한들은 자신이 악한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진료나 검사를 받지 않고, 또 연구의 대상이기를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스콧펙은 악한 사람들의 행동 특징을 자신의 임상 사례를 통해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은 특징들로 정리를 했다.첫째,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악을 볼 수 없고, 감내할 수고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악을 저지를 수 있다. 둘째, 악한 사람들은 책임 전가의 달인들이다. 악한 행동을 저지르고 어떻게 해서든 남 탓을 한다. 악이 자행되는 이유는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해서이다. 셋째, 악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미워할 수 없고,... -
나는 효율에 반대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은 기질적인 것부터 사회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서 느끼는 다양한 불일치와 피로와 고통을 바라보는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며 인간에 대해, 마음에 대해, 사회에 대해 생각했다. 많은 일이 일어났던 지난 2주간, 더 많이 생각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왔을까.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릴 때부터 살아온 이야기를 차근차근 듣고 공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같은 기전으로 근대사를 돌이켜보면, 한국은 식민지배와 전쟁 이후 효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아 지금까지 달려왔다. 가난과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와 생산성, 효율은 꼭 필요했을 것이며, 우리가 윗세대들의 고생과 노력으로 풍요에 이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이 효율 추구가 불가피한 선택인 동시에, 상실과 고통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한 안쓰러운 방어기제로 느껴진다. 식민지배, 전쟁, 독재상황을 거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소중한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우선... -
정치 참여는 공허함에 특효약이다
사회 격변 시기에 그 변화에 동참할 기회를 갖는 일은 행운이다. 대학 내에서 존경하던 스승에게 연달아 성폭력을 당하기 전까지 나는 그 행운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반복되는 성폭력은 모범생으로 지내온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종국에는 거리에서 소리치는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되게 했다. 이후로 낯선 사람들로부터 공격과 비아냥을 받으며 지냈다. 당초 이 일들은 내 인생에 일어난 비극처럼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일들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준 것인지 분명해졌다. 스승을 상대로 한 몇년간의 재판은 압도적 권위를 가진 존재를 대상으로 싸워 이길 수도 있음을 알려줬다. 내가 그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도 날 두려워할 수 있었다. 난 내 안의 힘을 발견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호감인 정체성, 페미니스트라는 라벨링을 수용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타인의 칭찬과 승인을 기준으로 더 이상 삶을 운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나를 향한 오독에 점차 의연해진다는 의미다. 돈... -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수년 전 JTBC <뉴스룸> 문화초대석에 출연했을 때 고 김민기씨는 몹시 경직돼 보였다. 노련한 진행자는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본인도 오늘은 긴장된다며 “선생님은 긴장 안 되십니까?”라고 말을 건넸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두 손을 모아쥔 채 입술만 간신히 떼어 답했다. “죽겠죠, 뭐. 여기 있는 게.”보통 저렇듯 긴장하면 감정을 숨기고자 짐짓 너스레를 부리거나 어색함을 깨려고 아무 말이나 던지기 마련이다. 내 경우엔 그랬다. 그러고선 두고두고 자책하곤 했다. 이야기를 들은 지인이 말했다. 원래 그런 거라고. 내키지 않으면 먼저 입을 열지 않아도 괜찮을 만한 사회적 위상을 지니지 않은 한, 우린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며 순간순간 타개할 수밖에 없다고. 살다 보면 어느 시점부턴 수치심이나 자괴감에 둔감해진 채 ‘뭉개고’ 가기 마련이라고.김민기씨는 내키지 않으면 입을 열지 않아도 될 위치의 다른 몇몇 대가들과 달리,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도, 질문을 회피하거나 ... -
샤머니즘이 더해진 ‘다크 트리아드’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신감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연설과 유세 내용에 충격을 받은 하버드대 주디스 허먼 정신과 교수가 제기한 문제다. 허먼 교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당선인인 트럼프의 정신감정을 요구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하지만 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2017년 4월 하버드대 허먼 교수와 예일대 밴디 리 교수가 주축이 된 미국 정신과 의사들 20여명은 예일대에 모였고, ‘우리의 직업적 책임에는 경고할 의무도 포함되는가’라는 제목의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골드워터’ 원칙-직접 진료하거나 검사하지 않은 사람의 특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진단하거나 임상적 발언을 하는 것은 윤리를 위반하는 것-의 준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위험을 알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핵무기를 포함한 중대 결정권이 있는 미국 대통령직을 ‘위험한 사람’인 트럼프가 맡는 상황에 대해 사회적인 경고를 했다. 그리고 추가된 100여명의 전문가들은 이 사회적 경... -
뇌는 고립을 원하지 않는다
고립무원하다. “3일 동안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았어요. 오랜만에 말하려니 좀 어색하네요.” 최근 진료실에서 만난 20대 후반 지호씨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재택근무 2년차, 지호씨의 삶은 어느새 고립이라는 상태에 매우 가까워지고 있다. 2010년대 이후 현대 도시의 청년들에게 혼자라는 상태는 선택이 아닌 필연이 되어가고 있다. 재택근무, 1인 가구, 파트타임, 수험준비를 하거나 취업준비를 하는 청년들의 일상은 점점 더 좁은 방 안으로 수렴된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도 부족하고, 환기할 공간도 여유도 부족하다. 건강한 생활이 불가능하다. 인간 뇌는 몸을 움직이면서, 또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발달하게 설계되어 있다. 자연 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일, 생명체와 접촉하고 대화하는 일은 단순한 여가를 넘어선, 뇌 성장과 발달을 위한 필수적 자극이며 영양분이다. 그러나 밀집된 도시 환경은 생물로서 자연과 동료와 움직임을 그리는 우리의 기본적 욕구를 차단한다. 오직 효율성만 추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