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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감]깃털처럼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오른쪽 어금니가 아팠다. 석사 논문을 쓰던 무렵이었다. 시간 여유가 없고 치료비를 부담할 여력도 안 되어 치과 가길 미뤘다. 통증은 점차 심해지다가 어느 시점엔가 뚝 멎었다. 그러더니 몇달 후 겨울밤, 초코바를 베어 물다 이가 과자처럼 바사삭 부서졌다.합동연구실에서 함께 공부하던 선배들이 당장 병원에 가라고 성화였다. “너, 충치를 오래 방치하면 치아 바이러스가 신경을 타고 눈동자로 간단다.” “에이, 뻥이죠?” 깔깔 웃어놓고도 내심 겁이 났다. 그러고서 얼마 안 지난 토요일 저녁,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 깜짝 놀랐다. 거울 안의 내 오른쪽 눈이 토끼처럼 빨갛게 되어 있었다. ‘핏발 서다’의 비유를 넘어 핏빛이 선연했다. 순간 선배들의 엄포가 떠올랐다. 아, 급기야 그 일이 일어났구나. 이러다 오른쪽 눈이 멀면 어쩌나. 별의별 무서운 상상이 스쳤다. 일반병원에 가려면 이틀 더 기다려야 했지만, 시간을 끌다간 치아 바이러스가 눈의 핵심영역으로 침투할 것만 같았다. 급한 대로 학교...

    2026.01.13 19:58

  • [공감]새해, 다시 미생의 마음으로
    새해, 다시 미생의 마음으로

    “내 삶은 아직 미완성이다. 그래서 미생이다.”웹툰에 이어 드라마로 제작돼 큰 사랑을 받았던 <미생>의 명대사이다. 바둑에서 미생(未生)은 아직 완전히 살아 있지 않은 돌을 뜻한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거꾸로 말하면 가능성은 열려 있는 상태다. 주인공 장그래는 완생을 꿈꾸지만, 현실 앞에서 자주 흔들리고 좌절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장그래에게 마음을 내주며 공감한 이유는 그의 삶이 특별해서라기보다, 실패와 불안, 망설임이 우리 일상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새해가 되면 우리는 습관처럼 자신을 돌아본다. 지난해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고, 어제의 부족함을 만회해야 할 것만 같다. 젊을 때는 새해에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비교적 분명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해가 바뀌는 경계가 흐릿해진다. 무엇을 더 이루겠다는 다짐보다 이제는 어떤 마음으로 이 시간을 건너갈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아직 완벽하지 않아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

    2026.01.06 19:53

  • [공감]그만둘 수도 있다는 마음
    그만둘 수도 있다는 마음

    12월이 바쁜 건 찜찜함 때문이다. 해가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봐야 하지 않나 싶은 의무와 그리움이 적당히 섞인 모임들이 달력을 채운다. 적당한 관계의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작은 후련함이 남는다. 이빨을 닦은 듯한 개운함이다. 그날 저녁도 그랬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근황 토크를 했다. 직장생활은 무난했고, 입시 스트레스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말끝마다 “지겨워요” “아침마다 사무실에서 인사 나누는 것도 짜증나요”라며 동료에 대한 불만, 조직문화의 답답함, 비전이 없는 회사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맞장구를 한참 하다가, 가볍게 물었다.“그렇게 싫으면 그만두면 되지 않아?”이 말에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어요?”라며 자기 상황을 얼마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냐며 서운해했다. 느닷없이 이번에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얼굴로 돌변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지?후배는 보어아웃(bore o...

    2025.12.30 19:54

  • [공감]총동원해
    총동원해

    이렇게 날씨가 추워지는 날이면 대학원에 다니며 기숙사에 살던 때가 떠오르곤 한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지속하는 것이 점점 벅차던 때였다. 장학금 기회는 학부 때보다 적었고, 아르바이트 없이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선후배 동기들이 부러웠다. 재능이나 집중력으로 승부를 볼 수 있던 시기는 지났고 누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여할 수 있느냐로 성과가 갈리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었다.그때 내게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한창 졸업 논문을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였는데, 기숙사에서 쫓겨날 위험에 처한 것이다. 내가 없는 사이 불시에 방을 점검하러 온 기숙사 조교가 책상 위의 전기포트를 발견하고서 시작된 일이었다. 기숙사에서는 겨울철 화재 위험으로 종종 방 점검을 했는데 규칙을 어길 시 사생에게 벌점을 부과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조교 재량으로 처벌의 정도가 많은 부분 달라졌다.유난히 자비 없고 잔인한 조교를 만난 것이 불운이었다. 전기포트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내게는...

    2025.12.23 20:09

  • [공감]폭 안길 수 있기를
    폭 안길 수 있기를

    장기 국외연수로 독일에 한 학기 머물 동안 며칠 말미를 얻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다녀온 적 있다. 여행의 목적은 하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보는 것이었다.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설계로 초석이 놓인 후 140년 넘도록 축조 중인 가톨릭 성당. 내가 가톨릭 신자임을 아는 선배 선생님이 연구학기 중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가보라 권하며, ‘형언할 수 없음’이 어떤 감정인지 거기 가보면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방문의 계기였다.한밤에 바르셀로나역에 도착해 인근 숙소에서 눈 붙이고, 다음날 일어나 성당을 찾았다. 사진으로만 본 옥수수 모양의 종탑들이 저편에 나타나면서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지도상 성당이 오롯한 모습을 드러낼 지점이 가까워지니 심장이 쿵쾅쿵쾅했다. 골목을 돌자 과연 어마어마한 것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당황했다. ‘웅장하다’가 아닌 ‘그로테스크하다’가 솔직한 첫인상이었기 때문이다. 전면이 곡선으로만 이루어진 건물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생명체 같았는...

    2025.12.16 19:54

  • [공감]‘라떼는 말이야’ 들여다보기
    ‘라떼는 말이야’ 들여다보기

    “라떼는 말이야, 토요일에도 학교 갔지.” “내가 왕년에는 이 동네에서 제일 잘나갔지.”회식 자리에서, 친지 모임에서, 혹은 TV 드라마에서 우리는 이 ‘라떼 혹은 왕년 서사’를 자주 듣는다. 듣는 이에게는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말하는 이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습관 같은 말이 되기도 한다. 요즘 젊은 세대의 ‘라떼는(나 때는) 말이야’ 풍자는 유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대 간 긴장을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그런데 왜 나이 들수록 라떼와 왕년을 자주 입에 올리게 될까? 나이가 들면 체력은 떨어지고, 정년퇴직을 앞두고 사회적 역할도 줄고 명함의 무게 또한 가벼워진다. 마음속에는 “나는 여전히 가치 있는 사람일까?”라는 작은 의문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 마음의 빈틈을 조용히 메워주는 것이 과거의 기억, 즉 ‘왕년’과 ‘라떼’이다. 과거는 나의 발자취이자, 내가 여전히 의미 있는 존재라는 증거가 되어준다.미국 사회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 교...

    2025.12.09 19:56

  • [공감]의욕은 여윳돈
    의욕은 여윳돈

    은행앱 계좌 잔액에 예상외로 적지 않은 금액이 들어 있었다. 오래전에 출간한 책이 증쇄되면서 인세가 입금된 것이다. 계획에 없던 여윳돈은 마음을 웅장하게 만들었다. 겨울 여행을 갈지, 외투를 한 벌 장만할지, 일단 오늘 저녁 소고기부터 굽고 볼지.이렇게 무엇을 할까 하는 즐거운 궁리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은 낯선 느낌을 주었다. 문득 얼마 전 ‘의욕이 없어서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며 찾아왔던 30대 여성이 떠올랐다. 그녀는 회사에 다니며 맡은 일은 큰 무리 없이 해냈고, 성과도 나쁘지 않아 매년 중간 고과 인센티브를 받았다. 대인관계도 무난했고 혼자 살긴 했지만, 그렇다고 생활이 엉망진창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남들처럼 퇴근 후 운동을 하거나 주말에 박물관에 가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는 삶은 아니었다. 집에 오면 씻고 정리하고 쉬는 게 전부인 일상을 되풀이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스스로를 자책하며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회사에서 맡은 일은 책임감 있게 해내고 있지만...

    2025.12.02 19:57

  • [공감]으뜸상은 누구에게
    으뜸상은 누구에게

    스물한 살 겨울 나는 청담동의 한 학원에서 멘토 교사로 일했다. 방학마다 아이들을 고급 레지던스에서 재우고 먹이며 밤늦게까지 공부시키는 기숙 학원식 프로그램이었다. 초등학생 대상이었다. 대표는 학부모에게 “이미 많이 늦었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채린(가명)은 첫날부터 눈에 띄는 아이였다. 청담동 애들이 좀 되바라진 면이 있기는 했지만, 개중에서도 유독 어린애답지 않았다. 사람을 늘 똑바로 쳐다봤고 누구와 마주쳐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혼내거나 재촉할 때도 느긋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선생님 말씀 따위 듣지 않아도 인생에 별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채린에게 너무 빨리 들킨 기분이었다.채린은 모든 과목에서 우수했고 선생들은 그녀를 신뢰하고 예뻐했다. 얼마 안 되어 채린은 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이가 되었다. 반 아이들은 남녀 모두 채린의 말에 가장 크게 호응했고 결정을 내릴 때 그녀의 눈치를 살폈고 가까워지기 위해 애썼다.채린이 같은 반 친구 한 명을 은...

    2025.11.25 22:01

  • [공감]서로를 위하여 청하다
    서로를 위하여 청하다

    출장 다녀올 일이 있어 참새보다 일찍 일어난 금요일이었다. 공항 가는 첫 버스를 놓치고 서둘러 택시를 탔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드는데 기사님이 백미러로 보며 듣고 싶은 음악 있으면 말하라고, 틀어주겠다 하셨다. 마침 앱으로 클래식 FM을 열려던 차여서 그 채널을 켜주실 수 있을지 여쭈었다. 기사님은 시계를 보시더니 <출발 FM과 함께>가 시작될 시각 아니냐 하셨다. “(진행자가) 사람 참 재밌고 좋은데 좀 시끌벅적해서. 맨날 청취자 퀴즈를 내고 말이죠.”내가 쿡 웃자, 이 계절엔 하프시코드 연주가 제격이라며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틀어주셨다. “어때요, 내 선곡이 라디오 피디보다 낫죠?” “그렇네요. 좋은데요!” 맞장구쳤다. 그러자 어서 신청곡을 달라고, 우리 손님 덕분에 새로운 것 좀 들어보자며 재촉하셨다. 음악 애호가인 듯한 기사님께 무엇을 말씀드려야 ‘새로운 것’이 될지 자신 없어 머뭇머뭇하다, 당장 떠오르는 대로 이탈리아 작곡가 페르골레시의 ‘스타바...

    2025.11.18 21:50

  • [공감]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 우리가 함께 웃었던 순간을 안고 오시길 바랍니다.”83세 원로 연극배우 박정자가 지인들에게 보낸 자신의 부고장에 적은 문구다. 그는 지난 5월 강릉의 한 해변에서 연둣빛 원피스에 빨간 구두를 신고 영화 속 장례식 장면 촬영을 겸해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치렀다. 이른바 ‘생전 장례식’이었다. 살아 있을 때 스스로의 삶을 배웅하는 장례식이라니 낯설지만 의미 있는 아름다운 발상이다. 작은 상여를 들고 해변을 걸으며 뒤따르는 지인들은 북과 꽹과리를 치며 축제처럼 그를 보냈다고 한다. “내 삶을 배웅하는 사람들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어 행복했다”며, “웃으며 떠날 수 있어서 좋았다”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떻게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가?”최근 우리 사회에서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웰다잉은 잘 사는 것을 뜻하는 웰빙에서 착안된 개념으로 죽음 준비교육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잘 사는 것(웰빙)을 넘...

    2025.11.1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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