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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공감]무섭거나 웃기거나
    무섭거나 웃기거나

    얼마 전 내게는 혼자만의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몇년간 시달렸던 악몽을 시로 써서 사람들 앞에서 낭독한 일이었다. 이 일이 내게 특별한 이유는, 여태껏 글을 써오면서 한 번도 내 안의 어두움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내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울증으로 침대에서 도저히 일어나지 못하던 때에도,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육체적으로 연약해져 있는 상태일 때에도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기만 하면 의젓해졌다. 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슬픔과 분노와 억울함이 세상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도록 마음을 달래고 누르면서 내가 받고 싶은 위로를 담은 글을 쓰곤 했다.그것은 글을 쓸 때 ‘하소연하지 말라’는, ‘독자보다 먼저 울어서는 안 된다’는, ‘감정이 과잉되어선 안 된다’는 내 안에 훈련된 비평가가 날카롭게 쏘아대는 말을 충실히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그렇게 쓰는 것도 나름대로 좋았다. 타인을 향한 위로가 고스란히 돌아와 나를 위로해주곤 했으니까.그런데 이상하게도 시를 쓸 때는 달...

    2025.07.01 21:17

  • [공감]마음이 기억을 마시고 먹었다
    마음이 기억을 마시고 먹었다

    정서적으로 이해하면서도 경험적으로 와닿지 않던 말 중 하나가 ‘집밥이 그립다’였다. 난 어디서 무얼 먹든 집에서 먹어온 것에 비하면 대체로 맛있다며 감탄했으니까.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 전에 친구들과 요기하러 갔다 순두부의 보드라운 식감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고소한 가지무침이나 꼬들꼬들한 미역줄기볶음은 대학 후문의 백반집에서 처음 접했다. 나중에 직장을 얻고 부엌과 침실이 분리된 주거공간을 갖게 된 후 이런저런 요리를 시도하며 알았다. 배달음식이든 학식이든 내가 만든 것보다는 맛이 좋다는 사실을. 손맛뿐 아니라 ‘손맛 없음’도 전승되나 싶었다. 집밥과 관련해 이렇다 할 추억이나 기술은 없지만 그렇다고 영혼의 안식을 얻을 음료나 음식마저 갖지 못한 건 아니다.고풍스럽진 않고 낡고 각지기만 한 건물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파르페와 레모네이드를 파는 고전적 카페와 로즈버드나 던킨도너츠 등 프랜차이즈가 섞여 있었고 일부 대학가엔 스타벅스도 들어왔지만, 일상의 일용할 음료는 ...

    2025.06.24 20:58

  • [공감]아침에 우리를 일어나게 만드는 것
    아침에 우리를 일어나게 만드는 것

    “일어나긴 했는데 잘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다.” 일본 노인들이 지은 센류(일본의 정형시)가 실린 책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속 한 문장이다. 읽다 보면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이 살짝 짠하고 저릿해진다. 나이 들어 은퇴 후 직장도 가족도 더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우리는 문득 ‘오늘 뭐 하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하지만 고령인데도 가슴 뛰는 목적을 품고 하루를 여는 사람들이 있다. 2024학년도 수능 최고령 응시자였던 83세 김정자 할머니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어느 유명 TV 예능 프로그램에 두 번이나 출연했던 할머니는 허리가 굽어 빨리 걷지 못해 두 시간이나 걸리는 등굣길을 지각, 조퇴, 결석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성실히 다니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겨울에는 해가 뜨기도 전 어둠을 뚫고 학교로 향했다. ‘죽어도 연필을 놓지 않겠다’던 할머니의 말씀이 뭉클해 눈시울을 붉힌 기억이 있다. TV 출연 당시 숙명여대에 입학하고 싶다던 할...

    2025.06.17 21:12

  • [공감]귀한 아들 증후군
    귀한 아들 증후군

    병원은 대학 캠퍼스와 붙어 있고, 마침 축제 기간이었다. 건널목에 함께 서 있던 20대 남성의 말이 들렸다. “축제에 재학생만 갈 수 있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봐. 지역 주민들도 마음대로 즐길 수 있어야지.”“자기들 행사니 당사자들이 결정하는 게 맞지 않니?” 옆에 있던 어머니가 대꾸했지만, 그는 바로 제 주장을 펼쳤다. 그 주장의 논리보다 내 귀에 박힌 건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하고 명료한 의지를 담은 남성의 태도였다. 응답하는 어머니 말투에는 우리 아들이 이렇게 참신한 생각을 했다는 기특한 마음이 커 보였다. 슬쩍 돌아보니 아들 손을 잡은 스킨십과 눈빛에 사랑이 담겨 있었다.그들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최근 진료실에서 자주 보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먼저, 어머니와 아들 사이가 무척 친밀하다. 멀끔한 인상의 남자는 말을 잘 하지 않고, 같이 온 어머니가 과거를 설명한다. 보통 5~6년을 거슬러서 “우리 아들이 ○학년 때까지는 참 잘했어요. 특목고도 생각했죠”라...

    2025.06.10 21:00

  • [공감]수치심 넘어, 보이는 존재 되기
    수치심 넘어, 보이는 존재 되기

    베를린에서 열리는 다양한 예술 행사에 참가하다 보면 생각보다 행사의 밀도가 높지 않아 놀랄 때가 잦다. 좋게 말하면 소박하고 거칠게 말하면 별것 없을 때가 많다.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돌아오는 날이 부지기수다.그럴 때면 두 가지 마음이 든다. 하나는 나도 (그리고 내 친구도) 할 수 있겠다는 마음. 다른 하나는 이렇게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고 기회를 주는 환경이어서 훌륭한 작가 혹은 예술가가 탄생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마음.위대한 예술가는 홀로 탄생하지 않고 어쩌면 이들보다 더 훌륭한 관객이나 독자가 만드는 것 같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보다 나는 더 자주 이곳의 관객에게 감탄한다. 아무리 시시해 보이는 것이라도 일단 누군가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대단히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연주가, 춤이, 낭독이 끝날 때까지 대체로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지루한 시간이 이어져도 끝까지 들으려고 애쓴다. 선뜻 이해되지...

    2025.06.04 01:06

  • [공감]일렁임은 그대로 남았다
    일렁임은 그대로 남았다

    중견 배우 훌리오는 친구이자 감독인 미겔의 신작 ‘작별의 눈빛’을 촬영하던 중 사라진다. 바닷가에 신발만 남기고 그야말로 자취를 감췄다. 혹자는 나이 듦을 받아들이지 못해 생을 끊었을 거라고, 다른 누구는 알코올 의존증이 심해져 취중에 낙상했을 거라고 한다. 배우의 실종으로 인해 제작은 중단되고 영화는 미완으로 남는다. 그로부터 22년이 흘러 사건을 다룬 탐사보도가 방영된 후 제보가 들어온다. 미겔은 제보자가 알려준 대로 수녀원 부속 요양원에 찾아가, 이름과 과거를 잃어버린 채 요양원 잡부로 살아가는 옛 동료를 마주한다. 그는 훌리오의 기억을 찾아주고자 해군 복무 시절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그때 배운 매듭 묶기를 시연한다. 사실상 의절한 딸과 만남도 주선한다. 훌리오는 그중 무엇도, 딸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다만 꼭 한번, 자신이 흥얼거리던 노래를 미겔이 이어 부르며 둘의 노랫소리가 포개지자 무언가 건드려진 듯한 눈빛을 내보인다.기억을 깨울 마지막 방안으로 미겔은...

    2025.05.27 20:59

  • [공감]노년에 쓰는 ‘손주에게 손편지’
    노년에 쓰는 ‘손주에게 손편지’

    아흔 살의 모모요 할머니는 홀로 도쿄 여행을 떠나며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다. 할머니의 버킷리스트에는 ‘호텔에서 혼자 자기’ ‘동물원에 가서 판다 보기’ ‘도쿄돔 견학하기’ ‘디즈니랜드에서 놀기’ 같은 소망들이 적혀 있었다. 고령에도 하나하나 버킷리스트를 실천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책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에 소개됐고, 독자들은 ‘저 연세에 대단하다’ ‘나도 해봐야겠다’는 감탄과 함께 용기를 얻었다.버킷리스트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은 목록이다. ‘죽다’라는 뜻의 영어 관용구 ‘킥 더 버킷(kick the bucket)’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동명의 영화 <버킷리스트>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병실을 함께 쓰게 된 두 노인이 병원을 탈출해 스카이다이빙, 만리장성에서 오토바이 몰기, 타지마할 방문, 사파리 체험, 타투하기 등 젊어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실천한다. 특히 오랫동안 소원했던 가족과 화해하는 장면은 단순히 소망을 실천하는 것을 넘어 인...

    2025.05.20 20:45

  • [공감]집으로 가출한 아이들
    집으로 가출한 아이들

    4월 초 검정고시가 있었고, 진료실은 결과를 ‘보고’하는 아이들로 북적인다. 내가 진료하는 10대 중 3분의 1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어서다. 예전에 학교 안 다닌 아이는 대개 가출을 반복하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아이들 혹은 심한 폭력의 피해자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10년 새 양상이 많이 바뀌었다.요즘에는 부모와 심한 갈등을 겪거나 학폭위가 열릴 수준의 충돌을 빚기보다는 학교 다니는 게 최고의 스트레스인 아이들이 많다. 부모는 선량하고 아이를 무척 염려한다. 경제적으로 중산층이며 부모 모두 양육에 적극적이다. 아이 성향은 내성적인 편이고, 초등학교까지 공부 잘하고 학원도 시키는 대로 열심히 다녔다. 그러다 학교를 두려워하기 시작한다.“교복까지 입고 나서려다가 멈춰요.”어렵사리 부모가 학교 앞까지 차로 데려다주지만, 교문 앞에서 등교를 포기해버리는 날도 늘어난다. 학교 가는 게 큰 모험이 된다.이유를 들어보니 아이들 떠드는 소리, 책걸상 부딪치는 소리...

    2025.05.13 20:23

  • [공감]열 살 되던 해
    열 살 되던 해

    열 살 되던 해, 새 교장 선생님이 부임했다. 변두리 시장통에 자리 잡은 이 학교에도 선진교육을 들여와 학부모들이 빚내어 더 나은 학군으로 이주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훈화하시던 그분은 높은 이상을 품은 열정적인 교육자셨다. 다만 그 이상이 때론 학교 현장에서 부담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던 듯하다. 그분이 야심 차게 도입한 ‘구라파식 체력단련’이 특히 그러했다. 월요일에 조회를 마친 후 교무실로 심부름 갔더니 몇몇 선생님들이 밀크커피를 타 마시며 “구라파 좋아하시네” 쿡쿡 웃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체력단련의 방편으로 우린 매주 한 번, 한 학년 열두 반이 줄줄이 버스 타고 멀리 동서울 수영장까지 찾아가 교습을 받았다. 말이 교습이지 실질적으론 ‘물장구치고 맴맴’이었다.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조그맣고 까만 머리들이 꺅꺅 떠드는 통에 수영장의 지붕이 펑 날아갈 기세였다. 우린 매점에서 팔던 핫도그와 컵떡볶이가 맛났고, 수영교습 가는 날엔 오후수업이 없어 마냥 신났다. 그...

    2025.05.06 20:24

  • [공감]탁월하지 않기
    탁월하지 않기

    요즘 매일 독일어학원을 간다. 우리반에는 아르헨티나, 인도, 튀르키예, 이스라엘, 스페인, 러시아, 그리고 한국에서 온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있다. 선생과 학생 사이에 공통 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모두에게 처음인 독일어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방법은 모두가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첫 시간, 선생님은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출석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고. 다시 한번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고.그다음 작은 공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품 안에 들고 말했다. “이쉬 하이스 아고(Ich heiße Ago).” 그리고 공을 상대에게 주며 말했다. “뷔 하이센 지(Wie heißen Sie)?” 공을 받아든 학생은 어리둥절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자 아고는 다시 공을 자신의 품 안에 들고 말했다. “이쉬 하이스 아고.” 그리고 다시 공을 상대에게 주며 말했다. “뷔 하이센 지?” 몇번을 왔다갔다 하고서야 교실에 있던 우리는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의 ...

    2025.04.29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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