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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던 것이 스러진 자리에서
부임한 지 보름 지난 첫 학기의 초가을날, 강의실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조심스레 휴강에 관해 물었다. 다음주에 단과대 체육대회가 예정되어 있는데 큰 연례행사라 통상 그날은 수업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생경한 교과목들의 강의 준비를 하루 쉴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 해 칠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논다고 좋아서 선생의 입이 찢어진 걸 보면 학생들이 얼마나 당황할까 싶었다. “휴강해야 하는군요.” 난감함을 연기하느라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한 성실한 복학생이 내가 진짜 아쉬워하는 줄 알고 의무는 아니라며 말문을 떼길래 다급히 “아녜요. 그날 쉬고 학기 말에 보강하죠” 외쳤다. 이내 본심을 들킨 게 부끄러워져 그 시간대에 경기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다.한 주 지나 체육대회가 열렸다. 축구, 발야구, 이어달리기를 비롯해 윷놀이와 줄다리기까지 각종 시합이 토너먼트식으로 펼쳐졌다. 약속한 게 떠올라 오후에 운동장으로 나가봤다. 연둣빛 ‘과티’를 맞춰 입은 우리 학과 ... -
의사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난 2월6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의 의대 입학정원 2000명 증원 발표 후 의료계는 연일 혼란이고 국민은 불안한 상태다. 그 여파는 날로 커가서 상급종합병원 진료는 현재 비정상 위기체제로 간신히 운영 중이다. 대한민국 의료계, 의과대학은 파행으로 치달으며 폭발 임계점에 와 있다. 증원 발표 후부터 시작된 의대생 및 전공의들의 수업 거부와 근무 이탈은 유급과 사직으로 나아가고 있고, 교수들의 소진과 일부의 사직 등으로 인해 대한민국 상급종합병원은 병원 자체가 환자인 상태다. 일부 국립대 총장들이 교수 채용 가능성을 언급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퇴직 행렬만 이어지고 있다. 최근 낙상사고 후 ‘응급실 뺑뺑이’를 직접 경험한 한 유력 정치인은 현 정권의 붕괴는 ‘의대 증원 정책의 실패와 의료 마비로 시작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서울시내 한 종합병원의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의료센터에 본인 혼자만 남았다고 호소하면서 곧 붕괴 위기에 처할 응급실의 위험신호를 세상에 전했다.... -
젊은 대민 공무원들의 죽음, 이제는 막아야 한다
공무원들이 아프다. 특히 저년차 공무원들은 낮은 임금, 과도한 업무, 악성 민원으로 인한 피로와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대민 업무를 맡고 있는 지자체 공무원, 교사, 경찰 등의 소진이다.작년 말 개최된 ‘산재 자살 현황 국회 토론회’에서 노동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와 용혜인 의원실은 공무원과 군인의 자살 순직 신청건수가 지난해 급격하게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직장갑질 119는 늘어나는 교사 자살 또한 추이를 주시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리고 지난 7월에는 두 주 사이에 여러 명의 경찰관이 과다한 업무가 원인으로 보이는 질병 또는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던 대민 공무원들의 좌절과 떠남은 그 자체로 우리를 안타깝고 슬프게 한다. 더하여 이들이 보람을 느끼며 일할 수 없다면 교육, 행정, 치안 등 공공서비스의 질이 저하되고 안전망도 약화되어 누구도 안녕하기 힘든 사회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개인이 자... -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타지 생활이 오래 지속되면서 유난히 예민해진 감각이 있는데 바로 청각이다. 내가 이곳에서 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나처럼 말 없는 존재의 소리가 전보다 크게 들린다. 가만히 듣고보니 세상이 소리로 꽉 차 있었다. 특히 인간이 만들어낸 소음이 줄어드는 곳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들의 소리로. 비둘기, 참새, 지빠귀, 까치 등 제각각 노랫소리가 다른 새들은 이른 아침에 가장 크게 합창한다. 집 근처 커다란 단풍버즘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수십미터에 걸쳐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를 다른 높낮이로 들려주는데 듣고 있으면 잠이 솔솔 온다.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와 풀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가 서로 다르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소리는 장소를 드러낸다. 유럽의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서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사람들이 식사하며 대화하며 재잘대는 소리와 함께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걸 듣다가 컴퓨터 게임을 하며 들었던 배경 소리가 유럽산이었음을 알게 됐다. 한낮의 여름이... -
내게 우선하는 가치
하늘이 높고 볕이 쨍했던 늦여름으로 기억한다. 수업이나 다른 업무가 없던 금요일 오후라, 모처럼 학교 밖으로 나가 늦은 점심 겸해 커피와 빵을 먹고 오기로 했다. 노트북도 챙겨 룰루랄라 아랫마을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내려야 할 곳을 한 정류장 앞둔 사거리에서였다. 신호변경 직전 기사님이 다급히 차선을 변경하시더니 좌회전을 시도했다. 원래대로라면 직진해야 했는데 얼마 전부터 시행되던 노선 전면 개편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혼동하신 듯했다. 무리해서 모퉁이를 돌던 우리 버스는 옆 차선에서 좌회전하던 화물차량과 이상한 각도를 만들어냈고 다음 순간 ‘쿵’ 소리가 들렸다. 승객들이 미처 소리를 지르기 전에 전면의 유리창이 일부 깨지며 버스가 멈춰 섰다. 경미하긴 했으나 추돌사고였다.그 무렵 지역 거주 2년째였던 나는 그새 경험한 버스 운행과 관련해 불만이 많았다. 평소 주로 이용한 구간은 직선대로였으며 커브나 비탈이 거의 없었음에도 종종 비포장 산길의 승차감을 느꼈다. 과속방지턱에서 속... -
디지털 교과서, 전면 도입 중단해야
현 정부가 속도전을 펼치듯이 2025년부터 ‘AI 디지털교과서’를 일부 과목에 도입하고, 2028년까지 전 과목 도입을 목표로 추진할 것이라 한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디지털 교육과 교과서의 부작용을 심각히 경험한 많은 나라들이 가는 길과는 사뭇 다른 길이다.스웨덴은 2023년 9월부터 디지털 교육을 중단했고, 프랑스도 비슷한 시기에 학교 내 스마트폰을 제한하기로 했으며, 독일은 디지털 교과서 도입에 속도를 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가장 먼저 맞춤형 디지털 교육을 전면화하며 2013년 개교한 미국의 디지털 기반 학교들은 현재 대부분 폐교한 상태다. 가장 유명하고 투자를 많이 받았던 알트 스쿨을 심층 취재한 비즈니스 인사이더 기자 멜리아 로빈슨은 디지털 교과서 교육의 결과를 문맹자 양산, 피상적 기술의 습득, 사고력의 부재로 정리했다. 그녀는 교사의 철학적 안내 없는 혁신 기술의 적용은 교육 불가능 상태에 도달할 뿐이라고 첨언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 중인 디지털 교과서 ... -
불안과 격변
“일하면서 늘 불안하다 보니, 불안한 것이 오히려 덜 불안한, 아이러니한 상태예요. 불안하지 않은 것이 어색해요.”얼마 전 ‘일터에서의 불안’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던 한 출판사 편집자의 고백이 내내 떠올랐다. 젊은 세대의 만성적인 수행 불안의 괴로움이 생생하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진료실과 직장 건강강의에서 만나는 많은 청년들이 학업과 업무에 대한 불안으로 힘들어한다. 끊임없이 줄 세우고 비교하는 환경에서 경쟁하며 자라온 그들의 마음에는 성취에 대한 비현실적으로 높은 기준이 자리 잡고 있다. 주어진 과제는 높은 완성도로 제 시간에 해내야 하고, 그 와중에 상사에게 잘 보이고 팀원들과 원만히 지내며 평판도 관리해야 한다. 문제는 하나의 과제를 어찌어찌 해내도 불안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나의 작은 허점도 트집 잡을 것이고, 더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를 버릴 것이며, 경쟁은 영원히 끝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런 압박감이 지속되다 보니 불안한 상태가... -
당신의 삶을 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도 될까요
1993년 어느 가을날 바하칼리포르니아의 판자촌에서 두 여성이 만났다. 휴가를 보내던 미국인 사진작가 애니 아펠 그리고 벽돌공 남편에게 점심식사를 가져다주던 만삭의 마리아였다. 애니는 마리아에게 사진을 몇장 찍어도 되냐고 물었고 마리아는 좋다고 답했다. 애니는 휴가에서 돌아온 뒤에도 멕시코에서 만난 한 가족이 계속 떠올랐고 다시 돌아간다.마리아를 찍은 사람은 많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애니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애니의 멕시코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아무리 찍어도 마리아의 진실을 담았다고 확신할 수가 없어서였다. 마리아가 벽돌공 남편과 헤어지고, 마리아의 아이가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미국으로 가며… 세월이 흐른다. 애니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25년간 2만3000프레임으로 찍는다.레슬리 제이미슨의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에 수록된 ‘최대노출’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레슬리는 애니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글의 초라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 -
소심한 타전
‘비디오방’에 처음 간 것은 대학에 입학한 해의 봄이었다. 공강 시간에 동기 남자아이가 “포켓볼을 가르쳐줄까?” 묻길래 그것 말고 후문에 있는 비디오방이란 데에 가보고 싶다 답했다.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라길래 헐렁한 원피스에 중절모 쓴, 포스터 속 갈래머리 소녀가 인상적이던 <연인>을 택했다. ‘무삭제판’이라고 빨간 글씨로 쓰여 있는 게 좀 걸렸으나 무슨 무슨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길래 호기심이 일었다. 친구의 표정이 안 좋아진 걸 무시한 채 “이거 볼래” 고집부렸다.불편한 침묵 속에 두 시간을 보내고 나오던 중 친구가 조용히 일렀다. 앞으론 남자 동기와 단둘이 비디오방에 가지 말라고, 여긴 연인 아닌 이성 친구와 올 만한 곳이 아닌 듯하다고 말이다. 불가피한 경우라면 이렇듯 선정적인 장면이 나오는 영화 말고 무난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고르라고 충고했다. 그 조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난 그해 여름방학 내내 비디오방에 갔다. 외고 중국어과를 졸업한 다른 동기와 &l... -
폭염 재해, 모두를 쉬게 하라
“날씨는 이데올로기이다.” 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한 말이다.날씨는 우리를 지배한다. 폭염이 시작되는 시기쯤 가슴 아픈 뉴스가 전해질 때가 많다. 폭염 속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불볕더위 속에서 목숨을 잃을 줄도 모르고 일했던 사람들은 성실한 가장이 많다. 한편, 어느 가정에서는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놓고 지내면서 “저 아저씨는 진짜 더워서 죽은 거야?”라고 묻는 아이에게 부모가 “저렇게 더운 곳에서 일하지 않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폭염은 계층 간 삶의 격차를 그대로 보여주는 자연재해이자 사회재해이다.폭염재해의 피해자는 주로 노동자와 노인, 병약자들이다. 폭염재해는 그 사회가 약자를 보호하고 있는지, 인권 상태는 어떤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이미 많은 나라가 폭염을 기후재해의 하나로 포함시켰다. 우리나라도 온열 사망자가 급격히 증가했던 2018년 국가재해의 범주에 폭염을 포함시켰다. 이전까지 폭염이 심각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