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도둑처럼 왔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지난여름, 연구실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대학원에 진학하며 상경했던 우리 학과 졸업생이었다. 첫 방학을 맞이하여 귀향한 차에 잠시 들른 거다. 그간 별일 없으셨냐고 묻기에 “비대면 수업 녹화하느라 나도 힘들었고, 허술한 영상을 인내하며 관람한 학생들도 고생했지 뭐” 깔깔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내 안부를 전하기보다 그 친구의 안부를 듣고 싶었다. 새 학교에서의 첫 학기가 어땠는지, 대학원 전공수업이 어렵진 않았는지, 조교업무는 할 만한지 궁금한 게 많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연구실 문을 나서려던 그가 일순간 머뭇거렸다. 뭔가 할 말이 남은 표정이었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학번마다 고유한 장점이 있지만 지난해 졸업한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한층 각별했다. 내가 이곳에 갓 부임할 무렵 신입생으로 입학했던지라 전공지식을 차곡차곡 함께 쌓아가는 기쁨을 가졌고, 그이들 역시 나를 ‘소블리 법교수님’이라 부르며 무척 따랐다. 공들여 써내려간 논문이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내 일부처럼 느껴진다면, 작년 졸업생들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내 분신 같았다. 특히 그 친구는 제대 후 복학하여 다섯 학기 연속으로 법 관련 과목을 수강한 데다 내가 학과장으로 일할 무렵 전공 대표를 맡았기에 더욱 가깝게 지냈다. 그러니 ‘내가 너를 알지. 네 표정을 보면 뭘 고민하는지 예상할 수 있거든’ 혼자 생각했더랬다. 대학원 생활과 관련하여 상담할 게 있나보구나 짐작한 나는 방학을 마치기 전에 시간 나면 또 들르라고 당부했다. “맛있는 차와 과자를 준비해 둘게!” 하며.

열흘쯤 지나 어느 늦은 오후,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때 그 고민을 상의하러 왔구나 싶었다. 어질러진 탁자를 치우고 차 끓일 채비를 하는데 그가 손에 들고 온 꾸러미를 주섬주섬 끌러 놓았다. 의아해하는 내게 조심스레 말문을 떼었다. “실은 제가 그 칼럼(‘두 발 닿을 그곳이 지상이기를’, 2020·6·24)을 읽었어요. 그래서 알게 되었어요. 아프시다는 거요.” 그는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다가 지난번엔 그냥 돌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 구매후기를 꼼꼼히 찾아 읽고 영양보조제를 구입했는데 의약품이 아니니까 부작용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길쭉한 캡슐 종합비타민은 하루 두 알, 동그란 젤리 비타민D는 하루 한 알씩 먹으면 되고 무엇보다 꾸준히 복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는 설명했다.

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창 상담 모드로 들어서 있던 나는 무방비상태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선생인데, 뭐든 내 쪽에서 해주어야 하는데 하며 울먹였다. 위로의 순간은 도둑처럼 왔다. 도움과 조언을 내줄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다 뜻밖의 상대로부터 기습적으로. 손윗사람의 표정과 자세로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 수치가 매우 낮아 언제 패혈증이 올지 모른다 했던 게 지난 늦봄이었다. 골수검사를 통해 병명이 확정된 후에는 이내 휴직하고 입원치료에 들어가리라 예상했었다. 혈연가족과 절연한 채 사는 내게 ‘환우가족’ ‘보호자’ 같은 단어나 ‘아프면 결국 식구뿐이야’ 식의 말은 칼날같이 느껴졌다. 직장공동체와 학생들한테서 떼어져 나와 혼자 사는 것이 투병 자체보다 두려웠다. 그런데 반년이 지난 지금 뜻밖에도 공부하고 가르치고 글쓰는 일상을 그대로 살고 있다. 의사선생님이 30년 넘게 진료하며 단 두 차례 봤다는 ‘저절로 나아진’ 임상케이스의 세 번째 주인공까진 못 되었으나, 중증 수치가 아니어서 독한 치료를 당장 받지 않아도 괜찮았다. 날마다 복용해온 비타민 세 알 덕분일까. 의학적으로는 아무 관련 없다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그날 저녁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주제넘은 말일지 모르지만,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행복하셨으면 좋겠다고. “고마워. 너희들과 함께했던 ‘내 살의 살 같은’ 시간을 보석처럼 간직하고 앞으로도 행복해질게.” 나는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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