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
정지윤 기자

정지윤 기자

자꾸만 가까이
기대고 싶어 하지만
서로의 거리를 두어야
잘 보이고
침묵을 잘해야
할 말이 떠오릅니다
남의 말을
듣고 또 듣는 것이
사랑의 방법입니다
침묵 속에 기다리는 것이
지혜의 발견입니다
아파도 슬퍼도
쉽게 울지 않고
견디고 또 견디는 것이
기도의 완성입니다
사계절 내내 중심 잡고
서 있기 힘들 때도 많지만
그래도 기쁘게 사는 것은
흐르는 세월 속에
땅 깊이 내려가는 뿌리
하늘로 뻗어가는 줄기
바람에 춤추는 잎사귀들
덕분입니다
오늘도 사랑받고
사랑하는 저를
사랑으로 지켜봐주십시오
늘 고맙습니다

봄비가 내리는 오늘, 수녀원 동산을 한 바퀴 돌며 높이와 크기와 모양이 다 다른 여러 종류의 나무들을 유심히 바라보니 그 자체로 기도가 되는 마음입니다.

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

잎사귀, 줄기, 그리고 수피라고 지칭하는 껍질들도 하나같이 다른 걸 새롭게 발견하면서 그림이 많아 좋은 어린이용 나무도감을 펼쳐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산책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수녀들이 모두 한 그루 나무로 보이던 어느 날. ‘나무의 사랑법’이라는 시를 써서 어느 문예지에 보낸 일이 있습니다. “반세기 이상을 한 수도원 숲에 살고 보니 나도 이젠 한 그루 나무가 된 게 아닐까?”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나무의 입을 통해 고백한 시. 어쩌면 이 시는 제가 평소에 하고 싶은 말들을 모아서 축약한 하나의 러브레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년의 길에 들어서며 어쩔 수 없이 아픈 데가 많아지고 병원출입도 잦아지는 요즘 “이번엔 세상의 모든 아픈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통증단상을 칼럼으로 쓸 거야”라고 하니 옆의 수녀들이 독자나 친지들에게 걱정끼치는 일이 될 거라며 말려서 잠시 보류하지만 언젠가는 통증에 대한 이야기도 잘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 나무가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할 말이 많을까 싶습니다. 겉으로 중심을 잡기 위해선 안으로 많이 아팠다고, 뿌리를 깊이 내리기 위해선 눈물겨운 참을성을 키워야 했다고, 싱싱한 푸른 잎사귀를 달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침묵과 인내와 기다림의 덕목을 잘 키우면 어느날 지혜의 열매가 달리고 하늘 향한 환희심과 설렘으로 삶이 온통 기쁨으로 출렁이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사랑의 승리자가 되려면 끝까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말을 줄이고 듣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고 고백하는 나무! 고독과 친해질수록 하늘도 잘 보이고 옆 사람들의 마음도 잘 헤아릴 수 있다고 넌지시 일러주는 나무!

시인과 철학자와 친구의 모습으로 늘 새로운 깨우침을 주는 나무를 사랑합니다. 그의 경건하고 진지하고 고요한 목소리를 들으면 몸의 아픔도 잠시 잊게 되고 예기치 않던 인간관계의 갈등과 소용돌이로 불편하고 괴로웠던 마음에도 이내 평화가 찾아옵니다. 나무가 많은 집에서 오늘도 나무의 사랑법을 가까이 배울 수 있어 행복한 ‘수녀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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