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적 일상에 대한 상상력

환자들의 댁으로 왕진을 다녀보면 집 안에서 병원의 환자복을 입고 생활하시는 분들이 있다. 퇴원한 지 이미 수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환자복을 입고 계신다. 한때는 선명한 푸른빛으로 인쇄되어 있었을 병원의 이름이 색 바래가는 것으로 언제쯤 퇴원하셨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와상 환자라 침대에 누워서만 생활하시니 땀과 분비물 흡수가 잘되면서도 깨끗하게 빨 수 있고, 몸에 배기지 않고 알레르기가 없는 순면의 튼튼한 옷이 중요할 터이다. 환자복이 그런 조건에 딱 맞기는 하다. 무엇보다 간병하는 가족이나 요양보호사들이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다는 점이 선택의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옷을 갈아입히는 횟수가 줄어드니까.

나는 10년도 더 전에 일본 미나미의료협동조합에 견학 갔을 때가 떠올랐다. 미나미의료협동조합은 재활 목적의 요양병원을 하나 운영하고 있었는데, 재활치료실을 방문했을 때 여러 환자들이 편마비가 와도 사용할 수 있는 도마와 칼을 가지고 마비되지 않은 한 손으로 오이를 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쪽의 큰 책상에는 여러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다달학습지의 낱말퀴즈와 퍼즐 같은 것들을 풀고 계셨다. 환자들이 모두 일상복을 입고 계셨기에 나는 “여기는 외래 치료실인가요?”라고 물어보았다. “아니요,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입원 환자분들입니다.” 어, 입원 중이신데 왜 아무도 환자복을 입고 계시지 않지? 나는 다시 통역하시는 분을 통해 물어보았다.

“여기는 병원 전체에 환자복이 아예 없습니다. 재활을 위한 요양병원이니까요. 이곳에서는 모든 일상이 재활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이동해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양치를 하고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까 선택한 후 잠옷을 벗고 오늘 날씨와 활동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는 것, 이런 모든 활동이 재활입니다. 환자복이 있으면 환자분들이 옷을 잘 갈아입지 않습니다. 환자복을 입고 주무시고 그 옷 그대로 낮에도 생활하시니,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지도 않고 어떨 때는 세수나 양치도 잘하지 않고 머리도 손질하지 않으시지요. 이곳은 잠옷에서 일상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씻고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부자리도 정리하게 되고 낮 시간에는 침대에 잘 눕지 않고 다른 활동을 좀 더 하게 되지요. 잘 움직이지 않는 팔과 다리로 끙끙대면서도 주변의 도움을 받아 씻고 옷을 갈아입으시는데, 옷에 팔과 다리를 끼우거나 단추를 채우고 지퍼를 올리는 일들이 모두 사실 우리 재활치료실에서 하는 훈련이거든요. 이런 소중한 재활의 기회들을 흘려보내면 안 되기 때문에 환자복을 없앴습니다.”

일상의 재활이라니! 그 뒤로 그 병원의 디테일 하나하나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저 밖에 서 있는 버스는 뭔가요?”

“그것은 지역의 버스 회사에서 재활치료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용하지 않는 버스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환자분들이 불편한 몸으로 버스를 타고 내리기 힘드시니까, 미리 훈련 차원에서 버스 계단 올라가고 기사와 인사하고 자리에 착석하고 다시 계단 내려오는 걸 연습해보시는 것이죠. 병원 바로 옆 주차장에 세워놓고 버스탑승 재활훈련에 쓰고 있어요.”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중요한 훈련이라 치료실에도 계단이 있긴 하지만 실제 버스를 타는 것에 비해서는 확실히 재미가 없을 터였다. 병원을 드나드는 지역의 자원봉사자와 치료사들이 환자가 다치지 않고 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잡아드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자기 집으로, 살던 지역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병원 치료의 목표인지 알 수 있었다.

옷 갈아입는 횟수를 최대한 늘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병원이라. 우리는 어떻게 치료적 일상을 시작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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