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으로 느슨한 사회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장대익의 진화]문화적으로 느슨한 사회

싱가포르에 껌을 반입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발각되었을 때 최대 10만달러의 벌금을 물거나 2년간 수감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만한 이 법규를 수용할 만하다고 생각할 이들은 극소수일 것이다. 껌이 뭔 죄가 있단 말인가?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하지만 인구밀도가 극도로 높은 싱가포르에서 사방에 붙어 있는 껌딱지는 국민 모두의 골칫거리였다. 미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시설을 운영하는 데 방해가 될 만큼 심각한 위협이었다고 한다. 이에 싱가포르 당국은 1992년 문제의 근원이라고 여긴 껌을 불허하기에 이른다. 그래도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남아 있다.

물론 우리의 사회적 규범 중에도 외국인의 관점으로는 이상한 것들이 있다. 수년 전 외국 언론의 해외 토픽난에 우리 고등학생들이 소개된 적이 있다. “여기, 아침 7시 반부터 0교시를 시작으로 오후 5시까지 학교 수업을 듣고, 편의점에서 저녁을 때우고는 곧바로 학원에 가서 수업을 또 듣다가 밤 12시에 귀가하는 고등학생들이 있다. 이게 믿어지는가?” 식이었다.

하지만 대학입시 실패가 인생의 실패인 양 인식되는 한국의 교육 문화에서 “우리 애는 학원 뺑뺑이를 돌지 않는다”는 당당함은 조롱받기 십상이다. 자녀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 부모는 학부모 사회에서 집단따돌림의 대상이다. 암묵적 사회적 규범 중 하나인 ‘입시지상주의’는 우리 사회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영향력이다.

한편 유교적 규범의 영향력은 이 땅에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지금도 막강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국인이라면 상대방의 나이에 이상하리만큼 집착한다. 남의 고향과 출신 학교에도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이른바 호구조사는 관계 시작의 필수 관문이다.

대체 사회적 규범의 구속력은 왜 이렇게 문화마다 차이가 날까? 왜 미국과 같은 문화에서는 사회의 규범이 느슨하고 우리 같은 문화에서는 엄격할까? 왜 어디는 동성결혼이나 마리화나까지도 합법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금기인가? 문화적 엄격함이 무엇 때문에 진화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생태적 위협에 빈번하게 노출되었던 집단일수록 사회적 규범에 대한 민감도가 높다. 가령 전쟁, 재해, 전염병 등에 자주 노출된 집단은 개인들이 생존을 위해 더 강한 협력을 해야 했다. 엄격한 사회 규범은 이런 행동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 규범을 어긴 자들을 비난하고 처벌해왔다. 즉 고난이 많았던 집단일수록 엄격한 규범을 만들고 따르는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집단일수록 느슨한 규범을 가진 사회로 진화했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극심한 고난이 우리 사회의 획일성을 설명하긴 한다. 하지만 이 획일성이 우리 사회의 도약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 느슨한 규범을 가진 사회일수록 창의적 혁신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우리는 문화적 엄격함이 큰 도움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문화적 엄격함이 강한 국가일수록 코로나19 희생자 수가 적다. 희생자가 많은 국가들은 문화적으로 느슨한 유럽과 남미에 많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질문은 ‘문화적으로 어느 정도 느슨한 것이 최적인가’일 것이다. 문화적으로 조금 더 느슨한 사회, 더 관용적인 사회가 우리에게 줄 이득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엄격한 사회는 기존 질서와 규범, 가령 남성중심주의를 더욱 공고히 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양성평등에 대한 담론에 남성들이 발끈하는 이유는 그 담론이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생태적 위협만큼이나 심리적 위협은 엄격한 기존 사회 규범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세대 간 갈등의 핵심에도 MZ세대의 거침없는 언행을 위협으로 느끼는 이전 세대의 심리적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이제 큰 고난을 겪었던 기성세대에 밀착된 엄격한 규범을 조금 느슨하게 풀 필요가 있다. 연구를 통해 입증된 것처럼, 문화적 느슨함은 우리에게 자율성, 다양성, 창의성을 선사할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행복과 과학의 공통 지표로서 우리 사회가 진화하는 데 꼭 필요한 덕목들이다. 지금 전 세계가 애타게 찾고 있는 백신을 개발한 주요 국가들이 문화적으로 느슨한 집단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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