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과 공정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1579년 5월, 낙향해 있던 율곡 이이가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낙향한 지 3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자신을 사간원 수장인 대사간에 임명한다는 문서를 받자, 이를 사양하며 올린 상소였다. 조선시대 사간원은 사헌부와 함께 조정 언론을 주도하는 핵심 기관이었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조정에서 이이를 대사간에 임명한 이유는 분명했다. 4년 전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며 시작된 당쟁이 이제 아무도, 심지어 왕조차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이이에게 조정에 나와 급한 불을 꺼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이의 상소문은 길고 간절했다.

“동인과 서인에 대한 논의가 오늘날 큰 문젯거리가 된다고 하니, 이것은 신이 매우 우려하는 점입니다. 국시(國是·오늘날 말로는 정치적 올바름, 혹은 그에 따른 국가 정책)를 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구설(口舌)로써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심(人心)이 다 같이 그렇다고 여기는 것을 공론(公論)이라 하고 공론이 있는 것을 국시라고 하니, 국시란 바로 온 나라 사람들이 의논하지 않고도 옳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익으로 유인하는 것도 아니고 위협으로 두렵게 하는 것도 아니며 삼척동자도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국시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른바 국시라는 것은 이것과 달라서, 다만 논의를 주장하는 자가 스스로 옳다 하면 그 말을 듣는 자 중 어떤 사람은 따르고 어떤 사람은 어기기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시비가 반으로 나뉘어 끝내 하나가 될 기약이 없으니, 어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득하여 억지로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람들의 의혹만 더 불러일으켜 도리어 재앙의 빌미만 만들 뿐입니다.”(<선조수정실록> 권13, 12년 5월1일)

자신의 대사간 임명을 거절했던 이이는 결국 다음해 12월 조정에 나간다. 동인과 서인의 정치적 갈등을 더 이상 멀리서 지켜볼 수만 없었다. 조정에 복귀한 이이는 무엇보다 동인과 서인의 화해와 협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철저히 실패한다. 2년 반 정도가 지나 동인이 장악하고 있던 홍문관에서 이이를 비판하는 길고 격렬한 글을 올렸다.

“애당초 동서(東西)의 설이 있었을 때 그 사이에는 벌써 사정(邪正·사악함과 올바름)과 시비(是非·옳음과 그름)가 있었으므로 사대부의 공론이 모두 동(東)이 정(正)이고 서(西)는 사(邪)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이는 치우쳐 서를 부추기고 동을 억누르는 마음을 하루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선조실록> 권17, 16년 7월21일)

조선은 왕조국가였음에도 국왕이 자기 마음대로 통치할 수는 없는 나라였다. 조선시대에 가장 강력한 정치적 기준은 ‘공론’이었다. 조정에서 공론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곧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이 때문에 공론 획득 자체가 가장 치열한 정치적 전투의 목표였다.

오늘날 조선시대 ‘공론’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는다면 ‘공정’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공정’도 조선시대 ‘공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듯 보인다. 이이는 “온 나라 사람들이 의논하지 않고도 옳게 여기는 것” “이익으로 유인하는 것도 아니고 위협으로 두렵게 하는 것도 아니며 삼척동자라도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공론’을 정의했다. 현실에서 그런 것이 존재할 리 없다. 현실은 늘 의논과 이익과 위협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모든 공정들은 그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공정이다.

공자는 <논어> ‘안연’편에서 정치할 기회가 생기면 무엇부터 하시겠냐는 제자의 질문에 정명(正名), 즉 명칭을 바로잡는 일부터 하겠다고 말한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조리가 없고, 말이 조리가 없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 덧붙였다. 그런데, ‘정명’을 시도하는 일이 또 한 번 논란의 빌미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말로써 말을 종식시킬 수는 없다.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