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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왜란 공신 선정’ 유감
“피로 쓰인 역사를 혀로 덮을 수 없다.”지난 8월15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정부 행사와 별도로 79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여기서 이종찬 광복회장이 했던 말이다. 기념사에서 그는 최근 진실에 대한 왜곡에 대해 광복회가 이 역사적 퇴행과 훼손을 보고 있을 수 없다며, 한 나라의 역사의식과 정체성이 흔들리면 국가의 기조가 흔들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로 쓰인 역사를 혀로 논하는 역사로 덮을 수는 없”고 “자주독립을 위한 선열들의 투쟁과 헌신 그리고 그 자랑스러운 성과를 폄훼하는 일은 국민들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준엄하게 경고한다”고 했다.위 기사를 읽으면서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구글 이미지로 볼 수 있다. 1945년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이 환국을 위해 중국 상하이 공항에 도착한 사진이다. 중앙에 김구 선생이 있고, 오른쪽에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省齋) 이시영 선생(1869~1953)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그리고 김구 선생 앞 ... -
권력붕괴는 내부균열에서부터
도쿠가와 막부 마지막 쇼군(15대)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 관련된 사료를 읽다가 흥미로운 걸 봤다. 요시노부는 당시 교토에서 막부정권을 뒤엎으려는 사쓰마번(薩摩藩), 조슈번(長州藩)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그는 막부를 스스로 해체하고 쇼군(將軍) 자리에서 사임할 것을 선언하며 대권을 천황에게 바쳤다.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년 음력 10월14일)이다. 그런데 약 한 달 전인 음력 9월10일 에도(江戶)의 기이번(紀伊藩) 저택에 한 통의 격문이 날아들었다.(<德川慶喜公傳> 7) 도쿠가와가 은고지사(德川家恩顧之士) 명의로 된 이 투서에는 현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히토쓰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로 지칭하며 극렬히 비방하는 문장이 가득하다. 요시노부는 1년 전 히토쓰바시 가문에 양자로 갔다가 도쿠가와가로 돌아와 쇼군에 즉위했는데,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격문의 작성자는 요시노부가 조슈번을 정벌한다며 전 쇼군(14대) 도쿠가와 이에모치... -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0조
2023년 초, 가족여행으로 일본을 갔다. 코로나19도 웬만큼 지났다 싶어 간만에 마음먹었는데, 이것저것 준비하기도 귀찮고, 돈도 생각해야 해 가장 가까운 동네로 간 것이었다. 늘 그렇듯 일본은 쓴 돈만큼의 서비스와 질을 보장하고, 그럭저럭 익숙하면서도 또 적당히 이국적이라 즐거운 여행지다. 그렇게 3박4일의 일정을 잘 보내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을 때 사건이 발생했다. 그전까지 만나본 일본 택시 기사와는 사뭇 다르게, 이 초로의 기사는 영어로 말을 걸고 공항까지 가는 길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여행지에서 현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 사람의 이야기는 곧 이상한 쪽으로 빠졌다. 한국의 정치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더니, 한국에서 일본에 요구하는 과거사 사죄가 너무 과도하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자신은 전쟁 후에야 태어났는데 도대체 자신 같은 세대가 무슨 책임이 있다고 사과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
1751년, 흥해군수의 ‘고발 사주’
1751년 음력 7월,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권력형 범죄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조사했던 경상감사 조재호는 직권으로 흥해군수 이우평을 파직하고, 그의 죄상을 조정에 보고했다. 그의 범죄행위를 감안할 때, 잠시라도 그를 공적 지위에 머물게 할 수 없었다.이 사건 발단은 전해인 1750년 음력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음력 10월은 한 해 결실을 거두는 시기이다. 당연히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봄에 빌렸던 곡식을 갚아야 하는 시기, 즉 환곡의 계절이기도 했다. 물론 곡식을 갚을 수 있을 정도로 수확이 좋으면야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늘 상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1750년 역시 예약된 흉년이었고,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 어느 해보다 환곡의 부담이 컸다. 관아에서는 주어진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곡식을 받아내야 했고, 결국 미납자들은 속속 관아에 잡혀 올 수밖에 없었다. 서원석의 아내 잉질낭도 미납 책임을 지고 흥해군 관아에 잡혀 왔었다.잉질낭은 흥해군수 이우평의 시... -
뒷것 김민기
2024년 7월21일 김민기가 사망했다. 향년 73세다. 네이버 인물 소개에 따르면 1951년 3월에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고, 공연연출가이자 전 가수이다. 조선시대식이라면 ‘뒷것’은 호처럼 들리지만, 그렇진 않다. 하지만 오늘날 감각이라면 스스로 붙인 ‘자호(自號)’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는 무대에서 관객의 주목을 받으며 연기하고 노래하는 사람을 ‘앞것’, 그들을 키우고 무대 뒤에서 보조하는 사람을 ‘뒷것’이라 했다. 그는 뒷것들의 두목을 자임했다.김민기가 위중하다고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23년 말부터였다. 그가 과거 드물게 했던 인터뷰가 조금씩 들려왔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드러내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사망 이후 유튜브에 그의 과거 인터뷰, 지인들의 회고를 담은 클립이 많이 올라온다. 인쇄매체보다 영상매체가 사람들과 더 많은 접점을 지니고 또, 신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활자와 책으로 그가 평가되리라는 예감이 ... -
서울이라는 도시
파리 올림픽 개회식이 화제다. 센강에 배를 띄워 각국 선수단을 입장시킨 것을 비롯해, 미도(美都) 파리의 매력을 한껏 뽐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파리에 거주한 적 있는 분들을 중심으로, 파리 예찬이 한창이다. 나는 하루 스쳐 지나간 적밖에 없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는 도시를 가진 프랑스가 부럽다. 일본 교토(京都)에 가서도 부러워 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세계문화유산인 건 말할 것도 없고, 헤이안(平安) 시대 이래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 지명 등이 사람들을 시간에 젖게 만든다. ‘지구상에 교토가 남아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한 적이 많다.요통이 지병인 나는 많이 걸으려 노력한다. 다행히 다른 운동보다 걷기는 덜 싫어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걷는다. 마포에 사는데 광화문에서 약속이 있으면 걸어갈 때도 있다. 5호선 마포역에서 광화문역까지는 5㎞로 1시간20분 정도 걸린다. 그냥 걸으면 지루하다. 구한말 역사를 읽다보면 마포가 자주 등장한다. 그 시대... -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8조
조선 명종 2년(1547) 경연 자리에서 특진관 최연은 열셋 어린 나이의 임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도참설(예언)은 모두 근거가 없는 말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여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방해가 됩니다. 우리나라도 건국 초기엔 이런 도참설로 노래를 짓기도 했으나 태종께서 ‘어디 이런 요사스러운 도참설을 숭상하겠느냐’며 없애게 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사람들이 송악산 등지에서 무당들을 데리고 제사를 지냈는데, 태종께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 지내는 제사는 신이 흠향하지 않는다며 혁파했습니다. 또 세종께서는 연말에 산천에서 지내는 치성도 혁파했으며, 성종은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재를, 중종은 불교식으로 지내는 기신재를 혁파했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 왕조의 가법이며 옛일이니 오늘날 모두 본받아야 합니다.” 중종의 아들 명종은 형인 인종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예정에 없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경연에 매진하던 시기, 경연관 최연... -
사심으로 사심을 공격한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자의 핵심 권한은 인사권이다. 그러나 원론적으로 인사(人事)란 권력자-또는 권력을 이양받은 사람-가 업무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자기 권한을 일정 범위 내에서 타인에게 부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업무의 효율적 수행이라는 목적에 부합되는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특정 권한을 부여할 때, 이를 ‘합리적 인사’라고 말한다. 특히 ‘업무의 효율적 수행’이라는 인사의 목표가 국가 차원이 되면, 공적 차원에서 능력 유무를 판단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조선은 꽤 촘촘하고 체계적인 인사 시스템을 가졌다. 그리고 왕의 인사권도 가능하면 이 시스템 내에서 행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모든 인사가 그렇게 이상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1627년 음력 5월11일, 정백창에 대한 인사가 그랬다. 당시 인조는 정해진 인사 시스템을 무시하고 왕의 특명으로 정백창을 이조 참의에 임명했다. 조선의 인사 시스템을 관장하는 이조의 핵심 관료를 임명하면서 ... -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던 나라?
얼마 전 유시민 작가와 조수진 변호사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 북스’를 보았다. 흥미로운 책을 한 권 선정해 그 내용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채널이다. 이번에는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의 최근작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를 소개했다. 책은 모두 10개 주제로 이루어졌는데 나는 4장 ‘식민지 근대화론: 우리 안의 역사 논쟁’이 흥미로웠다.‘식민지 근대화론’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를 겪은 기간에 근대화되고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를 좀 연장하면 오늘날 한국은 식민지 경험 덕에 발전했고, 이 때문에 일본은 침략자지만 동시에 한국 근대화에 기여하기도 했단 결론에 이른다. 저자 박태균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체로 부정적이었다.내가 저자의 설명에 흥미를 느낀 데에는 두 가지 정도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저자가 식민지 근대화론에 비판적이기는 해도 여전히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개인적 생각이라며 임진왜... -
나를 적진에 보내달라!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가 개국을 요구하자 일본은 패닉에 빠졌다. 에도 시민들의 눈길은 미토노공(水戶老公)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에 쏠렸다. 그는 존왕양이의 스타 정치가였지만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번주 자리에서 내려온 인물이다. 당황한 막부는 하는 수 없이 그를 기용했다. 도쿠가와는 개국을 완강히 반대했지만,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대신 자신을 미국에 사절단으로 파견해달라는 것이었다. 요시다 쇼인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미국은 일본을 협박하지 말고, 이번에는 물러나라. 그러면 일본이 캘리포니아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개국을 논의하겠다’는 것이었다. 메이지 정부가 1868년 수립된 후 최대의 과제는 조선과의 수교 문제였다. 청과는 이미 조약을 맺었지만(1871) 조선은 8년 동안 국교 수립을 거절해왔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해외순방 중 정부 운영을 책임지게 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1873년 7월29일 또 한 명의 실력자 이타가키 다이스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