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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현실]전쟁과 호미 한 자루
    전쟁과 호미 한 자루

    임진왜란 3년차에 접어든 1594년 음력 2월14일, 오희문은 슬픔을 억누른 채 길을 나서야 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잠시 다른 피란처에 있던 어머니를 뵐 수 있었지만, 여전히 떨어져야 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전쟁은 그렇게 가족을 생이별하게 만들었지만, 그나마 양반이어서 가족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달랐다.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다 금구 땅(지금의 전북 김제 지역)에 이르렀을 때, 오희문은 길가에 거적으로 덮여 있는 시신을 보았다. 전쟁통에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지 못해 길거리에 시신이 나뒹구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옆에서 울고 있는 두 아이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거적에 덮여 있는 시신은 두 아이의 어머니로, 굶주림과 병으로 전날 죽었다고 했다. 전쟁보다 더 잔혹한 겨울은 겨우 넘겼지만, 따뜻한 바람 속에 숨어 온 보릿고개의 초입을 견디지 못해 생명줄을 놓아 버렸다.아이들의 울음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

    2026.04.08 19:47

  • [역사와 현실]공무원의 자격
    공무원의 자격

    1651년 7월, 조정은 최초의 대동법을 충청도에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다양한 반대 세력의 오랜 저항을 극복하고 나온 결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 김육이다.충청도의 대동법 실시 결정 직후 김육이 한 첫 번째 일은 주무 부서 책임자인 호조판서를 교체한 것이었다. 당시 호조판서는 원두표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몇명 안 남은 인조반정 공신이었고, 10년이나 전라도 관찰사, 즉 감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한 도의 감사에 10년이나 재직하는 일은 예외적이었다. 그만큼 왕의 신뢰가 깊었다. 그는 감사를 지내며 궁중에 필요한 물자를 안정적으로 조달했다. 이 물자가 바로 대동법 개혁의 대상인 공물과 진상이다. 전라 감사를 마친 후에 그의 손자가 효종의 딸과 혼인했다. 즉 원두표는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김육은 효종에게 요청해서 호조판서를 원두표에서 이시방으로 교체했다. 당시 조정의 대표적인 재정 관료 두 사람이 원두표와 이시방이었다. 둘 사이가 안 좋은 것...

    2026.04.01 19:52

  • [역사와 현실]후퇴하는 미국 민주주의
    후퇴하는 미국 민주주의

    이란 전쟁은 왜 시작되었는지도 불분명하거니와, 어떻게 끝날지도 짐작할 수 없게 전개되고 있다. 수많은 예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저명한 미국 역사학자가 단연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할 만한 예측을 내놓아 주목을 끈다. 통상 역사학자는 과거를 다루는 사람이니만큼 미래에 대해 말하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예측한다고 해도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상례다. 그런데도 역사학자로서 과감하고도 구체적인 예측을 시도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프랑스 근대사를 전공하고 하버드대 교수를 역임한 로버트 단턴이 최근 이란 전쟁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그가 우려하는 시나리오는 지지율 하락을 겪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중간선거를 중단하거나 연기하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 혼자 선거를 보이콧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예측일 것이다. 그러나 요점은 중간선거가 실제로 중단되거나 연기될지 여부가 아니라 그런 시나리오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트럼프 시대 미국 민주주의의 상황이 ...

    2026.03.25 20:04

  • [역사와 현실]‘폭격’의 본질
    ‘폭격’의 본질

    그날은 날이 맑았다. 지금은 서핑을 하러 많이들 찾는다는 포항 용한리 해변에는 1000명 정도의 피란민이 모여 있었다. 인근 흥안리에서 마을이 폭격당한 후 안전한 곳을 찾아 해변으로 모여든 이들이었다. 당시엔 해변에 모여 있으면 하늘에서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폭격을 피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침 머리 위로 미군 정찰기가 날아왔다. 사람들은 소문대로 흰 천을 흔들며 자신들이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10분 뒤, 미군 폭격기 2대가 갑자기 날아와 수백명에게 기관총을 쏘았다. 기총소사는 1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바다는 핏빛으로 변했다. 어른뿐 아니라 많은 어린아이들이 엄마에게 업혀 있다가 혹은 안겨 있다가 즉사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 1950년 8월27일이었다.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미 공군 제18전폭전단 제39폭격대대 소속 F-51 2대가 ‘근접지원작전’ 과정에서 피란민들에게 기총소사를 했다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

    2026.03.18 20:06

  • [역사와 현실]역모를 대하는 그들의 방식
    역모를 대하는 그들의 방식

    1616년 새해 벽두부터 과거 시험을 위해 상경했던 김광계는 서울에서 황중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615년 10월 황중윤이 경상도 현풍에서 금부도사에 의해 한양으로 압송된 지 넉 달 만이었다. 역모에 연루돼 목숨을 건지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는데, 건강해 보이기까지 하니 다행도 이런 다행이 없었다.황중윤이 연루된 ‘신경희 옥사’ 역시 대부분의 옥사가 그렇듯 복잡한 정치 상황과 관계돼 있었지만, 그 시작은 의외로 허술했다. 김광계의 기록에 따르면, 이 옥사는 행실이 불량하기로 소문난 소명국의 무고 때문이었다. 소명국은 평소 가까웠던 신경희가 자신을 간통죄로 고발한 것에 반발해 “장령 윤길, 정언 양시진이 신경희와 함께 몰래 반역을 모의하고 능창군을 추대하려 합니다”라고 고변했던 것이다. 자신의 위기를 역모 고변으로 벗어나보려 한 건데, 이게 예상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졌다(김광계, <매원일기>).가짜뉴스였지만, 역모 고변은 왕의 의심병을 도지게 만들...

    2026.03.11 20:13

  • [역사와 현실]메가시티와 대동법
    메가시티와 대동법

    정부가 수도권 일극체제와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행정통합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5극3특(5대 메가시티, 3대 특별자치권역)’ 체제가 그것이다. 5대 메가시티는 수도권, 동남권(부산·울산·경남), 대구·경북, 대전·충남, 전남·광주이고, 3대 특별자치권역은 강원, 전북, 제주이다. 메가시티는 교통망을 연결해 전체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는 것을 목표로, 특별자치권역은 지역 특성에 맞는 산업 육성을 목표로 한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5대 메가시티가 단순히 지역 내 교통망 연결을 최종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학과 직장을 찾아 서울과 수도권으로 가지 않아도 되고, 나고 자란 곳에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짜 목표일 것이다. 정부는 오는 6월3일 선거 전에 행정통합을 완료해 단체장을 선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원활히 추진되는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고 한다. 추진이 잘 안 되는 곳에는 정치인들 간에 존재하는 복...

    2026.03.04 20:09

  • [역사와 현실]헤게모니에서 제국으로
    헤게모니에서 제국으로

    기원전 5세기 전반 페르시아가 수차례에 걸쳐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침공했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인들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뭉쳐 마라톤, 살라미스 등지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쳤다. 위협은 여전했다. 이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대비하여 저마다 함선이나 현금을 추렴했다. 특히 델로스섬에 공동 금고를 마련하여 이를 아테네가 관리했다. 이로써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 즉 오늘날 헤게모니 개념의 어원인 ‘헤게몬(hegemon)’이 되었다.페르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뒤에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유지하려고 했다. 동맹을 탈퇴하려던 타소스도 강제로 무릎 꿇렸다. 그렇게 아테네는 제국이 되었다. 그리고 동맹 기금을 전용하여 자국의 가난한 시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아테네 민주정은 더욱 민주화되었다. 제국이 민주주의를 급진화하고 민주주의가 제국을 필요로 하는 역설적 관계가 성립한 셈이다. 당연히 아테네의 자국 우선주의는 이웃 도시국가들의 반발을 야기했다.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2026.02.25 20:08

  • [역사와 현실]쿠팡과 미 하원, 뒤바뀐 청문회
    쿠팡과 미 하원, 뒤바뀐 청문회

    2월23일 미 하원 법사위원회가 해럴드 로저스 쿠팡 한국법인 임시대표를 소환하여 한국 정부가 “혁신적인 미국 기업”에 대해 취한 “차별적 조치”에 대한 의견을 청취한다고 한다. 미 하원이 보도자료로 내보낸 공식 소환장을 확인해보니 약 3000명밖에 안 되는, 그것도 “제한적이고 민감하지 않은 정보” 때문에 한국 정부가 벌이는 조사가 과도하다고 보는 듯하다. 경찰이 발표한 유출 규모가 그 만배가 넘는 3300만여명이고, 유출 정보의 내용도 다양한 것을 보면, 지난 몇년간 트럼프 대통령 취임 준비위원회는 물론 워싱턴 정가에 광범위한 로비를 진행했다는 쿠팡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다.한국 문제에 미 하원이 개입한 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50여년 전에도 한국 문제는 여러 차례 미 하원의 도마에 올랐다. 다른 점은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이 주제였다는 것이다. 이번처럼 비공개 증언 녹취(deposition)가 아니라 공개 청문회(hearing)였다는 것도 다른 점이다. 미...

    2026.02.18 19:39

  • [역사와 현실]얼자(孼子)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
    얼자(孼子)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

    영천(경상북도 영주의 옛 지명) 사람 이수에게는 아버지로서 아픈 손가락이 있었다. 젊은 시절 천인(賤人) 신분의 여성을 첩으로 들여 낳은 얼자(孼子) 때문이었다. 조선 역시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지만, 양반들의 경우 정상적으로 혼인한 아내 외에 따로 첩을 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첩은 대체로 양반가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첩의 자녀 신분은 양반인 아버지 신분을 따를 수 없었다. 조선시대 신분은 어머니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첩의 자녀를 통칭해서 ‘서얼(庶孼)’이라 불렀는데, 이는 양인(良人) 신분의 첩이 낳은 ‘서자(庶子)’와 천인 신분의 첩이 낳은 ‘얼자’의 앞 글자를 딴 말이다. 이러니 같은 서출이라 해도, 그 안에서 다시 신분이 갈렸다. 서자는 양인, 얼자는 천인이었다. 양인인 서자는 과거 시험도 칠 수 있었고 일정 정도 사회 활동도 가능했지만, 천인인 얼자는 이마저도 힘들었다. 이수 자신의 신분은 양반이지만 그 자식은 천인이었으니, 아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이...

    2026.02.11 20:07

  • [역사와 현실]19세기 한·중·일 선택의 현재
    19세기 한·중·일 선택의 현재

    19세기 중반을 지나며 중국, 일본, 한국에서 비슷한 내용의 사회 혹은 정치사상이 대두했다.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가 그것이다. 그 내용은 비슷했고, 동시에 당시 각국 상황과 밀접히 관련됐다. 1856년부터 1860년까지 치러진 제2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완패했다. 곧 그들의 본격적인 침략과 약탈이 중국 안에서 가속화될 것이 명백했다. 중체서용은 중국의 전통 가치를 몸통(體)으로 삼고,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청 왕조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근대화 전략이었다. 전통 가치의 핵심은 중국의 사회·정치적 기득권 구조, 즉 권력구조였다.화혼양재는 1868년 시작된 일본 메이지유신의 핵심 가치였다. 일본 고유의 정신(和魂)을 근본으로 서양의 학문과 기술(洋才)을 받아들이자는 사상이다. 영국 해군에서 도입해 일본 육군을 통해 전파된 카레라이스, 서양식 고기 요리를 일본식 반찬처럼 요리한 한바그, 서양 음식인...

    2026.02.0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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