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얼마 전 바이올리니스트 핀커스 주커만이 한 말이 공분을 샀다. 세계적으로 워낙 비중 있는 연주자라 파장이 적잖았다.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 초청 온라인 공개 강의 중, 그가 쏜 ‘말화살’이 문제였다. 연주자에게 완벽한 연주라고 칭찬하면서도 표현력을 높이라는 주문이었는데,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서 도를 넘고 말았다.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급기야 가시 달린 화살은 한 특정 국가의 과녁에 꽂혔다. “한국인의 DNA에는 노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 이른 해프닝의 전후 맥락과 행간을 짚어보면, 이미 세계 음악계 정상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의 따끔한 지적을 선의의 충고라고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명약은 입에 쓰다고 하지 않던가. 당시 레슨 상대였던 ‘두 자매’ 학생은 이참에 세계 음악계에 엄존한 편견을 딛고 훌륭한 연주자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저 설화(舌禍)에서 ‘노래’는 목청껏 불러대는 노래(song)가 아니다. 기악 연주자에게 노래는 은유일 것이다. 서울대 음대 전상직 교수는 중앙일보 칼럼에서 이를 “정신 ·영혼·열정을 담아 연주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그러니까 “기술적 완벽함을 넘어 음표 이면에 놓인 정서적 측면을 드러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주커만도 분명히 이 점을 지적했다. “바이올린은 단순한 현악기가 아니라 노래하는 악기다. 기술적으로는 아무 문제없다. 때로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의문이 들 때는 그것을 노래해 보아라.”

이 말들을 종합하면, 결국 기술을 넘어 예술을 하라는 주문이다. 비록 기교가 발군이라고 하더라도 정신과 영혼, 열정이 묻어나지 않는 연주는 감동이 덜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논란 과정에서 우리는 어느 거장의 본색을 봤지만, 새길 것 새기며 절차탁마해야 극복 가능성도 열린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주커만의 해프닝이 증폭될 무렵, 발레리나 박세은이 이 기술과 예술의 난제에 대한 명징한 해답을 제시했다. 지난 6월 박세은은 ‘태양왕’ 루이 14세가 만든 352년 역사의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별, 수석무용수(에투알)가 됐다. 발레는 태생도 그렇고 워낙 서양의 역사와 전통이 견고한 분야라 그녀에게 붙은 ‘아시아인 최초’라는 수식어가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의 산물 같진 않다.

박세은의 경향신문 귀국 인터뷰는 꽤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왜 만인이 우러러보는 스타(etoile)가 될 수 있었는지 실마리를 거기서 찾았다.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이 동시에 흠이 될 수 있는 나라가 프랑스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런 기술적 부분이 아니었는데, 그것만 한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워낙 어릴 적부터 익혀야 하는 고난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발레의 테크닉을 집중해서 보려고 한다. 관객의 박수와 갈채도 그때 터져 나오지만, 테크닉에만 몰입하다 보면 발레의 진수를 놓치기 쉽다. 그래서 박세은은 기초부터 프랑스 발레의 표현법을 새로 익혔고, 각고의 노력 끝에 정상에 올랐다. 기술을 바탕으로 예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주커만 이야기로 다시 가보자. 아무래도 DNA 이야기는 많이 거슬린다. 예술에서 DNA는 ‘천부적 혹은 선천적 재능’을 뜻한다. 주커만도 예의 논란에서 천부적 재능을 염두에 두진 않았을 것 같다. 인간은 노력으로 약점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기에 자극을 주려고 다그친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주커만은 두 가지 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흐렸다. 하나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자세다. 노력을 통해 부족함을 극복하도록 돕는 게 선생의 할 일이라는 걸 잊었다. 인종적 편견의 뉘앙스는 더 문제다. 현대사의 어둠을 간직한 유대인으로서 특정 민족을 겨냥한 DNA 운운은 위험천만하다.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는 ‘유전자결정론’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논리대로라면 유전자의 벽 앞에 우리 노력은 설 자리가 없다. 예술도, 예술가도 그저 DNA 탓만 할 수밖에 없겠다. 결코 동의할 수 없어 외친다. 노력을 이기는 유전자는 없다고. 기술이 예술이 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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