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사장들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

하수정 북유럽연구자

BC(Before Corona) 2년경 그러니까 2018년 즈음, 서울 을지로 세운상가에 맛있는 커피집이 있다고 해서 들렀다. 호랑이 카페. 가게 앞은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무리와 커피잔을 들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유명하다는 호랑이 라테를 시켰다. 라테가 별다를 게 있을까 싶지만 에스프레소 샷은 고소하면서 진하고 우유는 달큼하고 부드러워 한 모금에도 유명한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자

하수정 북유럽연구자

어느 날 한산한 틈을 타 사장님에게 말을 붙였다. “여기는 원두도 좋고 우유도 보통 우유가 아닌 것 같은데 한 잔에 3500원, 정말 좋네요.” 그러자 무덤덤한 답변이 돌아왔다. “저희는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서 입주했기 때문에 좋은 재료를 쓰고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할 수 있어요.” 바로 옆 구움양과집에 물었을 때도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신선했다. 보통 이런 질문을 하면 자신이 얼마나 좋은 재료를 쓰는지, 남다른 맛의 비법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말한다. 그런데 세운상가의 젊은 사장들은 꾸민 듯 겸손하지도 반기듯 친절하지도 않았다. ‘드셔 보시면 압니다’가 다인 양 자신을 특별히 부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공지원의 덕이라며 공을 돌렸다.

아몬드스튜디오라는 브랜드가 있다. 한국, 노르웨이, 핀란드 디자이너 세 명이 모여 창업한 회사로 다양한 생활소품을 만든다. 2년 전 핀란드무역대표부가 주최한 행사에 들렀다가 지갑을 샀다.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에 가볍고 수납공간도 많아 맘에 들었다. 디자이너가 말하길 한 장의 평면으로 자투리 없이 제작해 원단의 낭비를 최대한 줄였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다른 색으로 하나 더 샀다. 보는 이마다 어디서 샀느냐 묻는다. 아직도 흠집 하나 없이 새것 같아 여분으로 사놓은 지갑은 써보지도 못했다. 아몬드스튜디오의 조수아 대표는 세운 기술중개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얼마 전 다시 들러 상가를 한 바퀴 돌았다. 호랑이 커피의 성공이 유인효과를 냈는지 카페가 여러 군데 들어섰다. 못 보던 전시장과 작업실 창 너머 재봉틀을 돌리고 자로 재며 도면을 그리는 모습이 보였다. 한편, 모퉁이를 지나 각종 전자부품 가게 사이에 조금 생뚱맞아 보이는 빈티지 가게나 주제를 알 수 없는 매장도 있었다. 청년창업자와 장인이 상생하는 공간이라고 하기엔 시너지가 날 여지가 없어 보였다. 물리적으로는 공존하고 있지만 화학적 결합은 없는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공간을 정비해서 깨끗해진 것은 좋지만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해서 우리 매출이 느는 것은 아니니까요.” 세운상가의 터줏대감인 다모아컴 이강전 사장이 말했다. “젊은층에 기회를 주는 것은 좋은 일이죠. 가능성 있는 데는 지원해서 키우고 일자리도 만들고요. 한데 잘하는 곳도 많지만 뭐 하는지 모르겠는 곳도 여럿이에요. 지원받아 들어온 것 같은데…. 사이사이에 이질적인 업종이 들어오는 것보다 우리 같은 부품사는 한곳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어야 찾는 사람 쪽에서도 편리하고 좋죠.”

초창기 애플 컴퓨터가 나왔을 때 대만에서 한국으로 들여와 부품을 분해해 비슷하게 만들기도 했다는 이강전 사장에게 만약 그때 지금처럼 청년 창업 지원이 있었다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커피를 한 모금 들고 생각하던 이 사장은 “그땐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우리 때는 다 카피였으니까요. 사업하다 혹시라도 부도가 나면 어쩌나 싶어 도전을 못했어요. 세상이 달라졌죠. 드론이나 앱 같은 것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납니다. 아마 그때 창업 지원이 있었다면 컴퓨터와 관련된 새로운 무언가를 해봤겠죠”라고 했다.

아이디어와 기술은 있지만 밑천이 부족한 청년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다. 대한민국의 창업지원제도는 북유럽과 비교해 손색이 없다. 다만 공공지원금 보부상에 머무르지 않도록 통합적으로 지원하고 궁극에는 그 생태계에서 졸업하도록 관리하고 돕는 것이 창업지원의 마지막 단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업의 목표는 이익추구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000만원이 120억원이 되는 어떤 공공개발 수익자는 당연한 몫이라는 듯 뻔뻔해 다수에게 분노와 좌절을 안겼지만, 공공지원의 고마움을 잊지 않는 청년사장들처럼 차근차근 성장해 마주치는 삶에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곳도 있다.

퇴근길에 세운상가에 들렀다. 호랑이 라테는 여전히 맛이 좋고 가격도 그대로다. 편의점에도 진출했다. 아몬드스튜디오는 코로나19로 소매점 매출이 많이 줄었지만 그사이 소규모나마 일본 시장에 진출했고 새로운 제품을 디자인 중이라고 한다. 부디 가디록 번창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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