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언니들

장은교 소통·젠더데스크

언니, 잘 지내고 있나요. 2년 전쯤 언니에게 보낸 편지는 여전히 ‘읽지 않음’으로 돼 있지만 괜찮아요. 어쩌면 그 편지는 순전히 저의 위안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월이 돼서 그런지 요즘 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언니가 있던 곳에서 일어난 좋은 변화를 볼 때 더 그랬습니다. 여성들이 떼로 나와 축구를 하는 예능 프로그램(골 때리는 그녀들)과 여성 댄서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스트릿 우먼 파이터)이 큰 호평과 인기를 얻으며 방송되고 있어요. 앗, 이렇게만 설명하니 조금 걱정되죠? 운동이나 춤과는 상관없이 몸을 관음적으로 훑는 시선이나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편견을 부추기는 악마의 편집은 없어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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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들을 보며 저는 여성의 몸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34-23-36’이어야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몸이 아니라, 운동장을 질주하며 드리블을 해내는 폐활량과 박자를 갖고 놀며 무대 위를 장악하는 근육을 가진 몸에 대해서요. 마음껏 뛰고 솔직하게 경쟁하는 여성들을 보며 저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절감했습니다. 리더십이나 승부, 우정과 같은 단어들은 오랫동안 여성의 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편견이 가득한 세상에서 언니는 많이 외로웠나요.

언니, 최근에 정말 재밌는 표현을 들었어요. 부동산 개발로 엄청난 수익을 거둔 기자 출신 사업가가 수사를 받게 됐는데요. 의심스러운 고문료를 지급한 법조인들에 대해 “좋아하는 형님들”이라고 했어요. 언론에선 사건의 핵심을 보여줄 만한 제목을 찾기 위해 늘 고심하는데요. 이 사건을 이보다 더 잘 압축해줄 표현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요. ‘좋아한다’와 ‘형님’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오염돼 들리는지를 생각하면 실소가 나오다가도 아득해집니다.

그러다 저도 ‘좋아하는 언니들’을 떠올렸어요. 결이 많이 다르지만, 이 언니들이야말로 지금의 제가 잘 먹고 잘 사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언니들이에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버지니아 울프 언니, 강한 투쟁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끈 에멀라인 팽크허스트 언니, 전쟁을 여성의 시선으로 재조명하고 사소한 것으로 묻혔던 많은 목소리들을 끌어내 ‘목소리 문학’을 창시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언니 등. 그리고 지금도 묵묵히 성평등을 위해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많은 언니들이 있습니다.

언니. 설리 언니. 언니가 이 세상의 문을 닫고 다른 곳으로 떠나간 지 곧 2년이 됩니다. 남은 우리는 슬픔과 죄책감과 분노에 아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싸우고 있고 세상은 더디게 바뀌지만, 여성을 향한 폭력적 시선과 규제에 대해 언니가 먼저 말해주었던 많은 것들은 이제 조금 더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여성 창작자 20명이 함께 쓴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에서 정세랑 작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제가 이 편지를 쓰도록 영감을 준 책입니다.)

“혼자 걸을 때에도 함께라는 걸 알고 나자 벽들이 투명해져요. 벽을 짓는 사람들보다 멀리 걸어가기로 해요.”

우리는 언니들과 때로 느슨하게 때로 단단하게 손을 잡고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함께 걷는 마음속에 늘 언니가 있을 겁니다. 부디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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