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 시인
[詩想과 세상]베개

자고 일어나니 베개가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 몇가닥이 투명했다. 손으로 쓸어내리자 물이 되어 떨어졌다. 룸메이트는 자면서 자주 잠꼬대를 했다.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전부 사실인데 도대체 무엇이 거짓인가요.” 자고 있는 룸메이트의 베개 끝을 만져보니 그것도 축축했다. 베개들이 전부 축축하고 도무지 쓸 수가 없어서 나는 그녀가 말하는 문장들을 베고 다시 잠이 들었다. 다리가 사과가 되어가는 꿈을 꾸었다. 상하지 말라고 물을 줘도 자꾸만 자꾸만 단 냄새를 풍기며 다리는 착실히 썩어가고 썩어가면 썩어갈수록 단 냄새는 진해지고 룸메이트는 이제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와 같은 말을 점점 더 하지 않고 몇개의 단어만 중얼거리고

베개는 아무리 말려도 건조해지지 않는다.

나는 이제 그런 단어들을 베고 잔다. 강지이(1993~)

시인은 룸메이트와 원룸에서 같이 살고 있다. 시 쓰기 특성상 혼자 사는 게 더 좋겠지만, 룸메이트와의 동거는 아마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일 것이다. 시만 써서 먹고살 수 없으므로 낮에 일하고 새벽에 일어나 시 쓰기를 반복했으리라. 몹시 피곤하던 날, “자고 일어나니 베개가 젖어 있”다. 머리카락이 흥건히 젖을 만큼 식은땀을 흘렸다. 그 순간 룸메이트가 잠꼬대를 한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면서, 제대로 변명조차 못하고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한다.

시인도, 룸메이트도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몸에서 흘러나와 베개를 적신 것은 땀이 아니라 피눈물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칠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져든다. 그런 상황에서 시를 쓰는 건 사치라는 생각에 “그녀가 말하는 문장들을 베고 다시” 잔다. “다리가 사과가 되어가는 꿈”과 “썩어갈수록 단 냄새”가 진해지는 것은 룸메이트의 고통에 대한 감응이면서 공감이다. 내 고통과 타인의 아픔이 하나가 되어 시로 흘러나온다. 시는 나와 타인의 상처를 치유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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