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곡 김육의 소통법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조선시대에 잠곡 김육(1580~1658)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조선의 조세개혁 정책인 대동법 성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말을 덧붙이면 아마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는 조선의 전형적인 개혁관료였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김육을 언급할 때면 조심스럽다. 그의 성취가 조선왕조의 무능함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는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김육 자신이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가 오랜 세월 유지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사회의 폐단들을 진단하고 해결할 내부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김육 같은 사람들이 많든 적든 끊이지 않고 등장했다. 오늘날 그런 인물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필자 같은 조선시대 연구자들의 책임이 무엇보다 크다. 당쟁과 형이상학에만 전념하는 지배층이 이끄는 나라가 오래 유지될 수는 없다.

김육은 조세개혁을 추진하는 동안 자신과 가문의 정치생명을 내걸어야 했다. 그 스스로 말했듯이 그의 집안은 기묘사화(1519)로 큰 화를 당했다. 그 사건으로 고조할아버지 김식이 조광조와 함께 목숨을 잃었고, 1567년 선조가 즉위할 때까지 이 집안 남자들은 과거를 볼 수 없었다. 말하자면 사회활동을 금지당했다. 김육이 13세일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전쟁 중에 31세의 아버지는 장남인 그에게 집안을 일으켜 세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럼에도 후일 김육은 자신의 주장이 당쟁의 빌미가 되어 자신과 가문이 또다시 화를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개혁을 추진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이 어떻게 되든 자신과 집안의 입신양명만 추구하는 사례가 현실에는 훨씬 흔하다.

효종 즉위(1649) 후 김육이 대동법을 추진하자 김상헌, 김집 같은 사람들이 이 법에 반대했다. 이들이 조정과 재야에서 가졌던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들은 김육은 물론이고 새로 즉위한 효종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오해하면 안 된다. 김상헌과 김집을 역사적 반동세력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과 나이 때문에 민초들의 민생에 둔감해졌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하다. 생각이 삶에 주는 영향보다 삶이 생각에 주는 영향이 강한 법이다. 나이 들수록 더 그렇다.

결론만 말하면 김육과 김집·김상헌의 정치적 충돌에서 김육이 승리했다. 그런데 그 승리가 김육이 두 사람을 제압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이 김육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은 김육의 주장에는 동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육을 신뢰했다. 김집은 김육을 ‘우리 사림(士林) 중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분명한 근거가 있다.

‘약초 캐러 구름 뚫고 산 올라갔고/ 낚시한 뒤 달빛 안고 돌아왔지/ 나무하는 늙은이나 농사꾼들과/ 세월이 오래됨에 사귐 깊었고/ 가을 서리 내리면 추수 서둘고/ 봄비가 내릴 적엔 밭을 갈았지.’ 이 시는 김육이 오늘날 경기도 가평의 잠곡(潛谷)에 낙향하며 10년 동안 살 때 지은 시다. 그는 성균관 학생으로 있다가 광해군 정치에 실망하여 아무 연고가 없는 잠곡에 가족과 함께 낙향했다. 그는 약초 캐고, 낚시하고, 산에서 벤 나무로 숯을 구웠다. 그리고 밤새 걸어, 한양 동대문이 열리면 제일 먼저 들어와 숯을 팔아서 살았다. 그가 갈았던 밭은 남에게 빌린 땅이었다.

김육은 34세에 낙향했다. 10년 뒤 반정을 예상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당대의 정치윤리적 기준으로 보아 가장 정직한 결정을 했다. 아버지의 유언과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결정이었다. 그는 결과가 아닌 가치와 희생을 선택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을 일상의 노동으로 감당했다. 김집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젊어서부터 알던 사이였다. 개혁은 그 내용만 옳아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처신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개혁은 그렇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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