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야구’와 이재명의 ‘대선’

이기수 논설위원

어느덧 40년, 프로야구엔 ‘왕조’를 일군 명장의 어록이 흘러온다. “일구이무(一球二無). 공 하나에 다시는 없다.” 2007~2010년 SK 와이번스를 한국시리즈로 이끈 ‘야신(野神)’ 김성근의 투혼을 상징하는 말이다.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해태 타이거즈를 9차례 우승시킨 김응용은 게임이 안 풀릴 때 310㎜ 큰 발로 더그아웃 의자를 부숴버린 용장이었다. “전략? 없어요. 있는 투수들로 하면 됩니다.” 올가을엔 두산 베어스 김태형이 오래 기억될 ‘전설’을 더할 듯싶다.

이기수 논설위원

이기수 논설위원

2021년 11월, 두산은 7년째 한국시리즈를 치르고 있다. 정규리그를 4위로 마치고, 상위팀 ‘도장깨기’로 다시 올라선 전인미답의 길이다. 감독에 취임한 2015년부터 올해 플레이오프까지 김태형이 쌓은 가을야구 승률(64.3%)은 ‘단기전의 왕’ 김응용(63.2%)을 넘어섰다. 두산의 가을은 매번 ‘라스트댄스’로 불린다. 자유계약선수(FA)로 팀을 떠난 프랜차이즈 스타들(민병헌·양의지·오재일·최주환·이용찬)의 마지막 무대였다. 올핸 용병 투수도 없이 7연속 한국시리즈에 오른 김태형의 ‘잇몸 야구’가 재평가받는 가을이다.

‘튼동’이라고, ‘곰탈여우’라고 그를 부른다. 2000년 두산 주장 시절, 김태형은 용병 타이론 우즈를 라커룸 구석으로 데려가 커튼을 쳤다. 수훈선수 상금을 동료와 공평하게 나누는 팀 관행을 거부한 우즈에게 김태형은 “앞으로 네 상금은 네가 다 갖는다. 단, 다른 선수들이 상금 타면 너만 빼고 나눈다”고 통첩했다. 훗날 일본에서 이승엽에게 주먹 쥐고 달려든 ‘흑곰’ 우즈가 한국에선 ‘순한 양’이 된 날이다. 튼동은 그 커튼에서 비롯됐다. ‘곰의 탈을 쓴 여우’는 임기응변과 심리전에도 능한 김태형 야구를 압축하는 별칭이다.

야구 이론·친화력에 뛰어난 이는 많다. 그럼에도 당대 우승청부사로는 김태형이 첫손에 꼽힌다. 왕조의 위기를 ‘플랜B’로 돌파한 뚝심과 지략을 보여줬기 때문일 테다. 대선으로 치면, 정권교체 여론이 높고 경선 컨벤션도 야당에 밀린 이재명 캠프가 고비고비 더 참작할 게 많을 김태형 리더십일 수 있다.

①한발 빠른 승부수 = ‘퀵후크’라고 한다. 김태형은 흔들리는 선발투수를 2·3회부터 바꾸고, 구속 빠른 중간투수를 3~4이닝씩 길게 던지게 했다. 승기와 주도권을 쥐려고 승부수를 일찍 띄운 것이다. 선거도 그렇다. 승부는 지지층이 굳어지기 전 걸어야 한다. 이재명이라면, 부동산 종합대책을 먼저 내는 게 맞다. 민심 이반이 컸고, 큰 플랜을 준비 중이라 하고, 경쟁자 윤석열은 부자감세(종부세 폐지)부터 꺼냈으니까. 대장동 특검도 검찰 수사가 미진하면 피할 이유가 없다. 승부가 갈리고 터진 홈런은 무의미하다. 선거에서도 ‘한 방’은 늦을수록 힘이 떨어진다.

②내 장점을 살려라 = 김태형은 선발야구를 해왔다. 퀵후크식 가을야구는 궁여지책이다. “너도 무너지면 끝”이라며 마운드에 올린 투수들이 버티며 승리공식이 생겼다. 가장 공이 좋은 중간투수로 승부처를 옮기고, 위기를 기회로 바꾼 셈이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이재명의 장점은 행정가로 보여준 일머리·추진력과 생활진보·친서민·경제 이미지다. 숙제는 20대·여성·서울에 있다. 추격전은 한 점 더 따고 한 점 덜 주고, 때를 기다리며 뚜벅뚜벅 가야 한다. 사람들은 좋아서, 필요해서, 상대가 싫어서 투표한다. 이재명은 지금 좋아서, 필요해서 찍는 사람을 늘려야 한다. 그 정책과 에너지가 쌓여야 판을 흔드는 큰 승부도 할 수 있다.

③말은 명료하고 짧게 = 두산 더그아웃에선 이따금씩 열중쉬어하고 감독에게 혼나는 선수가 보인다. 1루까지 설렁설렁 뛴 베테랑도, 강타자에게만 더 세게 던지는 투수도 예외 없다. “피곤해 쉬고 싶다”던 중심타자는 2군으로 보내버렸다. 김태형은 팀워크 깨는 행동을 끊었고, 그 말은 직설이되 짧았다. 일사불란한 두산의 ‘가을 DNA’는 그렇게 키워졌는지 모른다. 기울어진 ‘언론운동장’을 탓하기 앞서 대선 후보 화법은 할지 말지 미룰지 진퇴와 비유가 분명해야 한다.

보면 볼수록, 스포츠와 선거는 닮았다. 룰과 표로 싸울 뿐이다. 9차례 공방을 주고받는 야구는 흐름과 반전이 이어진다. 마음만 급하면 경기가 꼬이고, 90분 뛰는 축구와 달리 아웃카운트 27개가 끝나야 승패가 갈린다. 야구 감독과 대선 주자는 길을 뚫어가는 쇄빙선일 수밖에 없다. 김태형은 정규리그 4위팀의 첫 우승을 꿰찰 수 있을까. 이재명은 윤석열과 경쟁하는 첫 1960년대생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야구와 대선을 보면서….


Today`s HOT
틸라피아로 육수 만드는 브라질 주민들 아르메니아 국경 획정 반대 시위 이란 유명 래퍼 사형선고 반대 시위 올림픽 성화 범선 타고 프랑스로 출발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