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명필름 제공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한 장면. 명필름 제공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가 결정되고 난 후 뉴스는 온통 두 사람 이야기뿐이다. 몇몇 다른 기사라고 해도 또 대선에서 파생된 것들이 대개다. 레거시 미디어라 불리는 지면, 지상파 라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심지어 유튜브에서도 정치이야기가 넘친다. 코로나19를 길들이며 이전의 일상을 회복해가려고 노력 중이지만 여전히 극장가는 한산하다. 이 한산한 극장가에 두 편의 영화가 십시일반의 노력으로 걸렸다. 시간차를 두고 선보인 두 작품은 <노회찬 6411>과 <태일이>이다.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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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은 모두 고인이 된,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한 두 사람의 삶을 다루고 있다. 하나는 다큐멘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애니메이션이지만 실존했던 인물의 삶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져줬다. 현장에서 시작한 노회찬은 국회로 가서 정치적 해결을 모색했고, 현장의 모순을 조금이라도 고쳐보려던 전태일은 결국 가장 강력한 호소로 스스로를 바쳤다.

<노회찬 6411>의 6411은 첫 차를 타고 일하러 가기 위해 떠나는 이 나라의 숱한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에 대한 상징이다. 전태일은 노동법을 공부하다가 법에 있기는 하지만 하나도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불꽃으로 태웠다.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었지만 노동법은 있긴 하되 유명무실한 현실은 세월의 무게만큼 달라지지 않았다.

떠들썩한 정치권 뉴스 사이에서 잠시 고개를 내밀고 뉴스 피드에 밀려 사라진 두 가지 뉴스가 있다. 하나는 과연 이 호명이 옳을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사건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간병살인’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전위적 기업으로 여겨졌던 IT대기업에서 소위 태움을 당하다 극단적 선택을 한 어떤 직원의 죽음이다.

이 두 사건은 우리 현실에서 일과 죽음의 아이러니한 거울 이미지처럼 서 있다. 스물 두 살의 청년은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일을 해야 했으나, 아버지를 돌보느라 일을 할 수 없었다. 젊은 남성의 경우 사회복지의 시선에서 가장 먼저 감춰지는 사각지대이기도 하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20대 남성이니 노동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사회적 방임이 복지의 손길을 더디게 한다. 가족의 간병과 돌봄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 수 없으며 간병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위 돈 버는 일은 불가능하다.

일의 사전적 정의는 ‘생산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이나 정신을 쓰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한편 여가란, 일을 하는 이외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렇게 따지자면 청년에겐 아버지를 돌보는 게 일이며 여가이며 직업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은 주변 사람에게 쌀값을 꾸고, 병원비를 빌릴 수밖에 없었다.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시간을 오롯이 생존을 위해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이버에서 근무했던 그 회사원은 어땠을까? 그는 분명히 생산적인 일을 한다고 그래서 그 일을 통해 월급도 받고, 그럴듯한 명함 덕도 느끼며 살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를 “님”이라 부르는 식의 형식적 수평주의와 조직문화는 소위 꼰대식의 강압보다 더 모멸적이라고 한다. <배신하지 않는 것은 월급뿐이야>의 저자는 그런 직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인데, 그는 이런 강압을 가리켜 패악질이라 부른다. 패악질, “권력자가 머리를 쓰지 않고 일을 굴리는 가장 쉬운 길”이라고 말이다. 저자 박지연은 번아웃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해 생존해냈다.

우리는 산업재해로 인한 죽음마저도 여전히 피해자가 그 연관성을 증명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피로사회를 넘어 과로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과로죽음은 태움과 극단적 선택의 원인으로 확장되고 있다. 결국 마지막 사인이 우울증, 가정불화로 기록되는 역설 속에서 과로는 여전히 정의가 불분명한, 법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언어이다. 법대로 하는 게 공정한 거라면, 노동법도 법대로 잘 지켜지지 못하는 마당에 법적 정의도 갖지 못한 과로 죽음의 공정성은 도대체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많은 전태일을 가져야만, 그런 피해자의 법적 자리를 마련해주고, 일과 죽음의 연관성을 인정할까? 일하지 못해서 죽음을 생각하는 자와 일 때문에 죽고 싶어지는 사람 사이, 그 사이를 메워야 하는 게 바로 정치다. 여전한 미제사건이 되어버린 일과 공정의 균형, 단순한 구호로 멈추지 않고 실질적 행정력으로 현실화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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