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사람이 쌓은 것을 딛고 진전하는 세상

송민령 공학박사
[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 앞사람이 쌓은 것을 딛고 진전하는 세상

자신의 연구를 동료 연구자에게 소개하는 역량과 대중이 잘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소개하는 역량은 다르다. 그래서 뇌과학 연구를 하면서 대중을 위한 저술도 활발히 하는 과학자는 많지 않다. BBC 다큐멘터리 <더 브레인(The brain)>을 제작한 데이비드 이글먼,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릭 캔들, 오랫동안 공포와 불안을 연구해 온 조지프 르두 정도다.

송민령 공학박사

송민령 공학박사

얼마 전 조지프 르두를 줌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EBS에서 교육부와 평생교육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전 세계에 흩어진 각 분야 대가들의 강연을 <위대한 수업>이라는 시리즈로 방영하고 있는데, 그중 조지프 르두 편의 감수를 맡았기 때문이다. 나는 신경과학 연구를 처음 시작하던 2000년대 중반에 르두 교수의 논문을 읽었다. 당시 나는 감정에 관심이 있었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뇌과학에서 감정을 연구한다고 하면 공포를 연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포 회로와 공포 반응은 많은 동물종 사이에 보존돼 있고, 르두 교수 등의 연구를 통해 뇌 회로가 다른 감정에 비해 많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논문을 읽으면서 제목은 감정 회로라고 해놓고 내용은 공포만 다뤄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르두 교수는 대학원 시절에 의식을 연구했다. 특히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 절단된 환자들(분리뇌 환자)을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를 깨닫는다. 첫째, 사물을 시야의 왼쪽에만 보여주면 이 정보는 우뇌로 전해지는데, 분리뇌 환자들은 뇌량이 절단돼 있어 우뇌의 시각정보가 언어 능력을 관장하는 좌뇌로 전해지지 못한다. 그러면 분리뇌 환자들은 보고도 무엇을 봤는지 말하지 못한다. 이로부터 르두 교수는 뇌를 정보 전달의 관점에서 봐야 함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공포학습을 정보 전달 관점에서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쥐에게 ‘삐~’ 소리를 들려준 뒤 발에 전기충격을 주면, 쥐는 나중에 ‘삐~’ 소리만 듣고도 벌벌 떨게 되는데 이를 공포학습이라고 한다. 공포학습을 위해서는 ‘삐~’ 소리를 담은 정보와 전기쇼크에 대한 정보가 만나야 한다. 르두 교수는 이렇게 두 정보가 만나는 지점이 편도체임을 발견함으로써 공포 회로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켰다.

둘째, 분리뇌 환자의 오른쪽 시야에 눈 쌓인 장면을 보여주고 우뇌가 관장하는 왼손으로 그림과 관련된 사물을 짚으라고 하면, 분리뇌 환자들은 (눈 치우기와 관련된) 삽을 고른다. 그리고 왼쪽 시야에 닭발을 보여주고 좌뇌가 관장하는 오른손으로 관련된 사물을 짚으라고 하면 닭을 고른다. 그 뒤 왜 삽을 골랐느냐고 물으면, 닭장을 치우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분리뇌에서는 눈 쌓인 장면에 대한 정보가 우뇌에서 좌뇌로 전해질 수 없고 좌뇌에는 닭에 대한 정보만 있기 때문에, 이 답변은 말이 되도록 지어낸 답변이다. 이로부터 르두 교수는 인간의 의식이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감정에 대한 남다른 관점으로 이어졌다. 르두 교수는 위기 상황에서 일어나는 신체반응(심장 박동의 증가 등)과 ‘무섭다’는 느낌은 별개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흔들다리 효과’처럼 신체반응과 의식적으로 인지되는 감정이 다를 때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포증이나 불안증을 치료할 때, 약물로 지나친 신체반응을 제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감정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완전히 달라 보이는 연구 주제들이 연결되는 것이 흥미로웠다. 르두 교수의 책 <느끼는 뇌>는 내가 의학대학원을 갈까, 뇌과학 연구를 할까 고민할 때 후자로 진로를 정하도록 이끌어주기도 했는데, 르두 교수가 어떻게 뇌과학자가 되었는지 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촬영은 몇 시간이나 지속되었고, 끝날 무렵에는 나까지 피곤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70대 고령인 르두 교수가 끝까지 노력하고 미진하면 다시 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70대인 지금도 저렇다면 젊었을 때는 어땠을까?

르두 교수는 다른 뇌과학자들과 함께 편도체라는 이름의 밴드 활동도 하고 있다. 주로 공포나 불안에 대한 내용을 담은 노래를 작곡해 부른다. 강연이 끝나고 르두 교수가 기타를 치면서 본인이 작곡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10여년 전, 르두 교수의 편도체 밴드를 처음 알았을 때는 재밌다고만 여겼는데 뇌과학 연구가 변해가는 모습을 본 다음에 그 노래를 들으니 묘한 감동과 함께 존경심이 일었다. 잘한 일이든 못한 일이든, 그렇게 앞 사람이 쌓은 것을 딛고 세상이 전진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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