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의 시편지- 길 위에서. 김영민 기자

이해인 수녀의 시편지- 길 위에서. 김영민 기자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없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길이 된다
내게 잠시
환한 불 밝혀주는
사랑의 말들도
다른 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와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슬픔도
일을 하다 겪게 되는
사소한 갈등과 고민
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
살아갈수록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도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오늘도 몇 번이고
고개 끄덕이면서
빛을 그리워하는 나
어두울수록
눈물 날수록
나는 더 걸음을 빨리한다

- 시집 <작은 위로> 중에서

어제 새로 부임한 우리 수녀원 지도신부님이 오늘 아침 미사에서 은행잎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잎을 다 떨구어 낸 빈 나무의 청빈에 대해서 강론을 하는데 유난히 낮은 그의 음성이 이 계절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

오늘은 금요단식날이라 아침식사 후에 해야 할 공지를 원장수녀님이 미리 하는데 아주 긴 시간의 수술을 해야 하는 어느 수녀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전화기를 여니 지난해에 세상을 떠난 제 오빠의 기일을 기억하는 오빠의 지인과 제자들이 보내온 메시지들이 보입니다. 한 해의 막바지에 들어선 이 계절은 이래저래 기도의 숙제가 많아 한편으론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엊그제는 우리가 몸담고 사는 부산에 대한 이야기를 회의 중에 나누다가 눈물이 앞을 가리는 뜻밖의 경험을 했습니다. 정말로 간절한 기도가 필요할 땐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서울에 다녀온 지난 주간. 며칠 안 되는 시간이지만 움직이는 길 위의 순례자가 되어 새로운 눈과 마음으로 인생공부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마스크를 좀 더 똑바로 쓰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는 승무원의 충고도, ‘무거우면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 어느 승객의 친절함도 그리고 역에서 내려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는 낯설지만 가족처럼 정겨운 이웃의 모습도 모두가 다 아름답게 여겨졌습니다.

집 밖에서 놀다가 집을 못 찾을까 두려워 더 멀리 가진 못하고 서성이던 원남동의 골목길은 새삼 반가웠습니다. 창경초등학교 때 늘 걸어다니던 비원과 창경궁 주변의 플라타너스 길에 긴 터널이 생긴 것을 발견하고 한참 놀라서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풍문여중 시절에 글짓기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빈소에 다녀왔고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파 우울한 자매들을 만나 더 이상 긴 말이 필요 없는 눈물 어린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혼과 사별의 아픔을 겪고 그 후유증으로 상심하는 이들의 하소연을 들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제 모습을 보기도 했지요. 후암시장에서 산 소박한 신발을 신고 ‘콜링북스’라는 작은 서점을 개업한 어느 젊은 작가의 보람 있는 일터도 잠시 방문했습니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길이 되는 삶을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에 감동받고 광안리 바닷가의 수녀원집으로 다시 돌아온 지금, 매일의 길 위에서 길을 떠나며 또 하나의 길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더 꾸준히 기도해야겠다 다짐하며 이렇게 읊어봅니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숨이 찬 세월/ 가는 길 마음 길 둘 다 좁아서/ 발걸음이 생각보단 무척 더디네/ 갈수록 힘에 겨워 내가 무거워/ 어느 숲에 머물다가/ 내가 찾은 새/ 무늬 고운 새를 이고 먼길을 가네” - 이해인 수녀의 시 ‘길’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