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는 박물관

조운찬 논설위원

불상 위로 은은한 조명이 내려앉는다.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이 두 개의 불상이 놓인 타원의 좌대를 따라 돈다. 작은 보폭으로 천천히 걷는 모습이 탑돌이를 연상케 한다. 관람객들은 움직이면서도 불상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다가가 자세히 살피는 듯하더니, 다시 뒤로 물러서 본다. 누군가 이때다 싶었던지 휴대폰을 꺼낸다. 어떤 이의 손에는 큰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가 들려 있다.

조운찬 논설위원

조운찬 논설위원

전시실 출입구 쪽에는 또 다른 모습도 보인다. 벽 중간에 선 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고 20여m 전방을 응시한다. 그가 보는 게 부처인지, 관람객인지, 부처를 거울 삼아 자신을 보려는 건지 가늠하기 어렵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 또한 휴대폰을 꺼내든다. 피사체는 여백으로 가득한 전시실일까. 아니면 자신의 내면일까.

‘사유의 방’은 반가사유상 두 점을 나란히 배치한 국립중앙박물관 내의 새 전시공간이다. 반가사유상은 오른 다리를 왼 다리 위에 걸치고(반가·半跏),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긴(사유·思惟)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으로 국보 중의 국보이다. 문화재급 유물이 가득한 중앙박물관에 국보 두 점만을 한 장소에 상설전시하는 것은 의미가 각별하다. 루브르의 ‘모나리자’처럼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취지다. 개관 한 달 만에 수만명이 찾았다고 하니, 전시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루브르 관람객들이 까치발 하며 모나리자를 보듯이, ‘사유의 방’을 찾은 이들이 반가상의 조형예술미를 감상하려고 요모조모 뜯어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유물 감상으로 끝난다면 전시 취지의 절반만 이루는 것이다. 반가사유상의 예술성만 보려 한다면 큰 전시실(439㎡)도 소용없고, 넓은 공간을 여백으로 남겨둘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유의 방’은 단순한 유물 전시실이 아니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특별한 공간이다.

현대인은 바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뛸 정도로 바쁘게 살아간다. 빨라야 하고 부지런해야 하고 더 효율적이어야 하고 더 소유해야 한다. 그 덕에 식민지를 겪고도 남보다 빠르게 근대화와 산업화, 민주화를 이뤄냈다. 반면 빠르고 효율적인 시스템은 도리어 삶에 더 큰 그늘을 드리웠다. 심신은 피폐해져 갔고, 삶의 터전은 피로사회, 위험사회, 분노사회로 변해 버렸다. 지금 목도하고 있는 기후위기, 환경재앙 역시 이러한 압축성장이 초래한 엄혹한 대가이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을 뿐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던 것이다(김수영, ‘서시’).

삶은 전투가 아니다. 앞만 보아서도 안 되고, 좌우도 보고, 뒤도 돌아봐야 한다. 낮에 기계소리를 들었다면,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알아야 한다. 옛 동양의 선인들은 낮에 유가의 경전을 읽고, 밤에는 노장의 책을 읽으며 삶의 속도를 조절했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현대의 한나 아렌트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철인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활동적 삶보다 관조적 삶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관조적인 삶이란 사유하고 명상하며, 휴식을 취하면서 나와 공동체를 돌아보는 일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삶을 향락적 삶, 정치적 삶, 관조적 삶 등 셋으로 구분한 뒤 관조적 삶이 가장 행복하다고 설파했다.

‘사유의 방’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지점은 예술작품으로서의 반가상이 아니라 관조적 삶을 지향하는 ‘사유’이다. 돌아보면 박물관에서 생각에 잠기게 하는 곳이 어찌 ‘사유의 방’뿐일까.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수많은 전시실 모두가 ‘사유의 방’이다. 박물관에 가면 나는 어김없이 상설전시관 3층의 불교조각실을 찾는다. 감산사 미륵보살과 아미타불의 좌우로 대형 석물과 철불을 병풍처럼 모신 그곳에 들어서면, 그 순간 다른 세상을 맞이한다. 이뿐만 아니다. 높이 걸린 괘불탱, 이광사의 서예, 김홍도의 그림 앞에만 서 있어도 금세 고요의 세계로 빠져든다. 박물관의 야외도 둘러보시라. 갈항사 삼층석탑, 남계원 칠층석탑 등 불교 조각물이 즐비한 석조물정원은 경주 남산 한 자락을 옮겨놓은 것 같다. 박물관 안팎이 모두 사유의 공간이다.

한때 “나는 공부하러 박물관 간다”는 말이 유행했다. 그러나 박물관이 학습과 교육의 장소일 수만은 없다. ‘사유의 방’ 개관은 박물관이 사색과 치유의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사유하러, 아니 ‘멍 때리러’ 박물관 가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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