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술사학자 이야기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대학 독일어과를 졸업한 뒤 독일로 유학, 미술사로 유서 깊은 대학에서 서양미술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음. 르네상스 미술을 전공하고 그리스 로마 미술을 부전공하며 이탈리아어와 희랍어, 라틴어를 공부했고 고전고고학, 로만어문학 등에도 깊은 통찰을 지님. 대안연구공동체의 강의 공지에 적은 어느 학자의 이력 중 일부입니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1980~1990년대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뒤 귀국했으니 당연히 대학의 문을 두들겼겠지요. 그러나 대학과의 만남은 행복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그가 교수 초빙 면접에서 만난 어느 사학의 이사장은 기념으로 나무 한 그루만 심어달라고 했답니다. 나무 한 그루쯤이야 뭐, 하고 생각했는데 나뭇값으로 1억원을 불렀다고 하더군요.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포기한 그 자리에는 훗날 허위학력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신모씨가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또 어느 대학에서는 아예 1차 서류전형에서 탈락하기도 했답니다. 그가 대학에 제출한 서류는 저서만도 수십 권이었습니다. 책이라도 돌려받아야겠다며 대학을 찾았더니 책은 풀지도 않은 채 제출했을 때 모양 그대로 접수처에 보관돼 있더라고 하더군요. 이에 앞서 어느 대학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할 때는 연구원에게 주어야 할 얼마 되지도 않은 돈을 교수가 챙기는 것에 반발하다 결국 연구소를 나오기도 했습니다.

교수 되기를 포기한 학자에게 남은 것은 쓰는 일이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100권이 넘는 저서 혹은 번역서가 뜹니다. 이 책 가운데 교양서 혹은 어린이나 10대를 위한 책도 있지만 묵직한 책도 많습니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중세 사회 비판서로 괴테의 <파우스트>와 더불어 독일어로 쓰인 가장 중요한 고전이라는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가 한 시절 몰두했던 집필이나 번역도 어느 시기부터 시들해진 듯합니다.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은 세상이 외면하기 일쑤였고 그의 책을 출판한 유명 출판사는 아름다운 건물을 지으면서도 인세는 주지 않았습니다.

대학이나 출판사와 불화한 이유 중 하나가 돈이니 그가 돈에 연연했을 거라고요? 그건 아닌 듯합니다. 몇 년 전 어느 날 그 학자가 제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사례비를 받지 않고 공동체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체에서 몇 달 강의하다 다른 기관의 일 때문에 강의를 중단하게 되자 그는 그 기관에서 받은 사례비를 고스란히 공동체에 내놓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자신의 환갑 기념이라며 100만원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가 재작년부터 최근까지 공동체에서 한 강의도 유료 강의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왕 있었던 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스터디에 참여비를 내고 온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아마추어들의 공부 모임에 전문학자가 왔으니 스터디는 머잖아 강의로 바뀌었지요. 그는 열정적으로 강의를 준비했습니다. 2시간 강의를 위해 거의 5일을 쏟아부으며, 강의마다 200~400쪽의 파워포인트를 준비했습니다. 해당 분야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강의를 위해 공부할 게 많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1950년대 초판이 나온 뒤 미술사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와 인기를 누려온 곰브리치의 책은 지나치게 허점이 많았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 적은 대로 쉽고 폭넓고 친절한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내용의 다수가 지나칠 수 없는 잘못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강의를 시작한 지 2년여, 책을 낱낱이 뜯어보며 고금의 자료를 동원해 서술의 진위나 오류, 오해, 논리의 비약, 잘못된 결론 등등을 들춰내던 그가 며칠 전 이 강의를 그만두었습니다.

결국 공동체도 그가 더 이상 머물 곳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 학자가 지적인 자극을 받으며 길고 행복하게 연구하며 가르치고 쓸 만한 곳은 어디일까요? 그동안 대가를 받지 않은 그의 수고에 감사드리며 맑은 소주나 한잔 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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