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심에서 열리는 전주영화제

조광희 변호사

경제적 양극화와 저질 정치 등에
이 나라가 포위되어 있지만
극복하고 제 갈 길 가리라 믿는다
그 동력의 가장 큰 부분은
아마 문화적 역량서 나올 것이다

제23회 전주영화제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미디어 법률자문을 호구지책으로 삼고 있다 보니, 한 해에 한두 번은 영화제에 참석하게 된다. 업무나 행사에 직접 관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냥 영화를 관람하거나 가까이 지내는 영화인들을 만날 목적으로 가게 된다. 영화제라는 형식이 한국에서 생소하던 1999년 부산영화제에 참석한 이후 꾸준히 전주영화제, 제천음악영화제 등에 참석했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영화제를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이번 전주영화제는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전환하는 시점에 열리면서, 예전과 같이 풍성하고 화려하게 개최되는 첫 영화제가 되었다.

조광희 변호사

조광희 변호사

KTX를 타고 전주역에 내려 한옥마을 근처의 숙소로 가는데, ‘한국의 꽃심 전주’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보인다. 한국이라는 꽃의 심장부? 어감이 마음에 든다. 몇 년 만에 둘러보는 전주는 더 아름다워진 것 같다. 개막식은 전주돔에서 지난주 목요일에 열렸다. 초청받은 작품의 감독과 배우들이 때로는 화사하게 때로는 자유롭게 레드카펫을 밟고 입장한다. 팬데믹을 견디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에 열린 축제라 모두들 유난히 유쾌하다. 그 와중에 우크라이나 여성 배우 한 분이 입장해서 큰 격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개막식과 개막작 상영을 마치고 열린 리셉션은 전라감영 앞에서 열렸다. 오늘날의 도청에 해당하는 전라감영에는 처음 가 보았는데, 어두운 밤에 조명을 받으며 서 있는 멋스럽고 웅장한 건물은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의 자원을 활용한 리셉션은 외국의 게스트들에게는 더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영화제 기간에는 밤마다 여기저기서 술자리가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영화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지난 회포를 풀고, 오랜만에 해방감을 만끽한다.

다음날은 내가 제작에 관여하고 판사 역할의 단역으로도 출연한 영화를 보러 갔다. 상영 후에는 감독과 주연배우가 무대에 올라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미 컴퓨터 파일로 본 영화였지만, 극장이라는 정식 관람 환경이 제공하는 생생한 느낌은 대체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다. 한국영화 경쟁부문에 오른 아홉 편 중 하나인 이 작품에 멋진 결과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3박4일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노곤해진 몸을 추슬러 집으로 돌아가는데, 기차 안에서 여러 상념이 떠올랐다. 처음 영화제에 참석할 때 느꼈던 어리둥절함과 꿈결 같은 시간들이 벌써 20년도 넘은 일이다. 한국영화가 무서운 기세로 꿈틀거릴 때이기는 했지만, 한국영화가 이 정도의 세계적 위상을 가지리라고는 솔직히 상상하지 못했다. 코로나 때문에 영화의 제작, 투자, 극장 부문이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영화의 위상은 미국 다음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실정인 것이다. 게다가 OTT 플랫폼을 통한 한국 드라마 열풍은 아시다시피 전 지구적인 현상이 되었다. 한국의 영상제작 능력, 스토리텔링 능력, 사회적 인프라, 그리고 뛰어난 인력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흐름은 상당 기간 동안 이어질 것이다.

한 사회의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여러 지표가 있으나, 높은 문화적 역량은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을 이 나라가 성취했다는 것에 우리 모두 구성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문화적 성취는 경제적 성취에 반드시 뒤따르거나 병행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나라들이 경제적 성공을 포함한 여러 분야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러 난제 그리고 계층과 처지에 따라 견뎌야 하는 그늘을 피할 수는 없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러한 난제와 그늘을 숨기거나 도외시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회만이 비로소 문화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그러한 문화적 성숙은 사회 각 부문의 의미 있는 변화로 다시 환류될 것이다. 이 나라가 경제적 양극화, 수준 낮은 정치, 민주주의의 위기 그리고 인구절벽 등에 포위되어 있지만, 결국 모두 극복하고 제 갈 길을 가리라 믿는다. 그 동력의 가장 큰 부분은 아마도 문화적 역량에서 나올 것이다.

아직도 코로나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가 2년 만에 마침내 종착역을 향하고 있다. 지금 봄볕은 따스하고 신록은 눈부시다. 아름다운 5월에 짬을 내서 주말까지 이어지는 전주영화제를 방문해 보시기를. 축제를 즐기며 꽃심의 거리를 걷다 보면, 당신에게 알게 모르게 스며든 코로나블루가 말끔히 씻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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