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 시인
[詩想과 세상] 염색장

꽃은 피기도 전에 물든다
길과 들판이 노랑 빨강으로 물들고
자주색 연분홍으로 물든다

저 푸른 꽃대
어떻게 붉고 노란
마음을 퍼올렸을까

울면서 거리를 걷는
꽃의 마음 하나쯤 헤아렸다면
나도 낮과 밤의 경계도 없이 흔들렸겠지

그대 눈길 하나만 던져준다면
저녁노을에 놀란 나는
어둠 속에서 퍼올린 물빛으로
시들어가는 꽃의 행적을 필사했을 것이다

이성수(1964~)

시인의 생각에 자연은 거대한 염색 장인이다. 겨울 지나 봄이 오면 “길과 들판”에 각양각색의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데, 이는 그냥 피는 게 아니라 자연이 여러 빛깔로 물들이는 것이다. 물들인다는 것은 빛깔이 옮아서 묻거나 스미게 한다는 말이다. 고유한 빛깔의 수분을 빨아들여 옮겨진 빛깔을 ‘물’이라 하는데, 천연염색이나 실수로 옷에 진 얼룩도 이에 해당한다. 자연은 “푸른 꽃대”를 퍼올려 염색을 한다. 한데 실수로 “붉고 노란/ 마음”까지 퍼올린다.

‘물’을 머금은 ‘마음’은 쉽게 물든다. 염색할 때 미묘하게 다른 빛깔이 태어나듯, 슬픔의 무늬도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고 조심스레 스며들어야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아쉽게도 사랑을 염색하는 장인은 없다. 사랑을 퍼올릴 도구도 없다. 그러니 스스로 사랑에 물들 수밖에. “낮과 밤의 경계”조차 없는 상황에선 홀로 흔들려야 하리. 저녁노을처럼 한순간 화려한 빛깔을 수놓다 저무는 게 인생이다. “꽃의 행적”으로 쓰는 시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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