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과 전쟁 고아

채석진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전쟁은 무차별적인 파괴와 더불어 대량살상을 동반하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 고아를 만든다. 미디어가 전쟁의 참혹성을 드러내는 전통적인 방법 중 하나가 고통받는 아이들을 조명하는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보도에서도 민간 시설과 민간인에 대한 폭격, 그리고 피해 아이들의 모습은 러시아의 반인륜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러시아의 비인도적 행태는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무고함을 부각하고, 나아가 권위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 간 도덕적 우월성 논쟁으로 이어진다.

채석진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채석진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지금 우리가 먼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 관한 보도를 보며 전쟁의 참상에 대해 이야기하듯, 70여년 전 한국전쟁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지역에서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간 도덕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역사학자 김태우는 <냉전의 마녀들: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에서 한국전쟁이 냉전 체제의 도덕성 논쟁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상세히 보여준다.

이 책은 소련, 중국, 영국, 덴마크, 독일 등 다양한 국적의 국제민주여성연맹(이후 국제여맹) 회원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가 북한에서 1951년 5월 수행한 현지조사를 기반으로 작성한 보고서에서 출발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소련과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논쟁이 활발했다. 그러나 실제 한국전쟁의 실상에 대한 정보는 크게 부족했다. 이에 국제여맹은 북한의 실태에 대한 현지조사를 수행하고, 그 결과 보고서를 통해서 신의주 등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북한 내 여러 지역에서도 미 공군의 무차별적 폭격과 여성, 노인, 아이를 대상으로 한 대량살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고발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자본주의 진영에서 미국을 비판하기 위한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 선전물로 치부되며 그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국제여맹은 그때까지 쌓아올린 국제적 명성과 지위를 잃게 되었다. 유엔은 당시 세계 최대의 여성단체였던 국제여맹의 유엔 내 공식 지위를 박탈했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미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1월 이후 교전지역이 아닌 북한 지역의 군사시설은 물론 민간시설까지 전면적으로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수행했다. 이는 2000년대 이후 공개된 미 공군 문서에서도 확인되었다. 결국 이들 문서의 내용은 국제여맹이 보고서에서 기술한 상황과 일치한다. 이러한 비교전 지역을 초토화하는 미군의 작전은 수만명의 전쟁 고아를 만들었던 것이다.

북한이 동유럽으로 전쟁 고아를 이송하기 시작한 시점은 이 시기와 맞물린다. 북한은 1951~1954년 1만여명의 전쟁 고아를 소련의 동맹국인 루마니아, 폴란드, 불가리아, 체코 등 동유럽 국가로 보냈다. 이들 전쟁 고아들은 사회주의 형제국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위탁 시설에서 양육되면서 소련의 인류애적 가치와 도덕성을 전시하는 상징으로 재구성되었다. 비슷한 시기, 남한의 전쟁 고아는 미국의 자비심과 인류애를 선전하는 상징으로 만들어졌다.

일레이나 킴이 <Adopted Territory>에서 보여주듯이, 미국 언론은 미군이 한국 전쟁 고아를 정성껏 돌보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전쟁 고아를 미군의 마스코트로 구성하였다. 또한 미국 국내에서도 반공주의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한국전쟁 고아를 입양하는 대대적인 프로젝트가 실행돼 수천명의 전쟁 고아와 미군의 자녀인 혼혈 아동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거대한 한국 해외입양 사업의 출발이었다.

1950년대 남한과 북한의 전쟁 고아들이 유럽과 미국, 두 방향으로 간 사실은 냉전 체제 속 그들의 이중적 위치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냉전 체제에서 전쟁의 참혹한 폭력의 산물이자, 모순되게도 이러한 참혹함을 은폐하는 상징으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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