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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간편함의 그림자
    간편함의 그림자

    은행 자동화창구 앞에서 한 어르신이 다급한 듯 손짓했다. 이체를 하려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화면을 들여다보니 보이스피싱 방지를 위한 몇 가지 질문 앞에서 멈춰 계셨다. 읽고 답하면 될 것 같지만, 기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 몇 문장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어르신은 버스요금 납부 안내서를 들고 있었다. 교통카드를 깜빡하고 버스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후불 납부 안내장을 건넨 것이다. 현금 없는 버스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현금 이용이 줄면서 수납 비용과 운행 지연, 안전사고 위험을 줄이겠다는 취지로 도입됐고, 일부 지자체는 이미 전면 시행 단계에 들어섰다. 서울에서도 상당수 노선이 현금 없이 운영 중이다. 하지만 어떤 승객에게 그것은 버스를 타는 일보다 더 어려운 사후 처리 절차가 되기도 한다.버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음식점이나 카페의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을 포기하게 된다는 노년의 이야기는 이제 특별한 뉴스 축에 들지 못한다. 복지관과 주민센터에서 어...

    2026.06.10 20:10

  • [숨]어린이답다는 말
    어린이답다는 말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사이, 아직 초등학생이니 자신은 어린이가 맞다고 주장하는 조카를 학원에서 데려오던 길이었다. 용돈으로 어린이날을 축하받았다는 녀석에게 어버이날 준비는 했느냐고 물었다. 학교에서 다 같이 부모님께 드릴 감사 카드를 만들었단다.“고모, 그런데 애들이 편지를 못 쓰더라?” 어깨를 으쓱하는 아이에게 “너는, 잘 썼어?” 물으니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있는 그대로 쓰면 되지! 뭐 어려워?”야무지기가 원! ‘어린이답다’ 하며 볼을 쓰다듬어 주는데, 이내 마음이 켕겼다. 어린이다운 게 뭘까? 편지를 쓰기 어려워했다는 녀석의 친구들은 무엇 때문에 주저했을까? 있는 그대로 쓰면 된다는 조카의 명랑한 확신은 정말 어린이다운 모습인 걸까?아이들이 ‘인정받는’ 어린이다움에는 어른의 기대가 녹아 있다. <제국의 어린이들>에는 이 관계가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책은 1938년과 1939년에 열린 제1·2회 ‘조선총독...

    2026.05.13 20:06

  • [숨]행복한 밥상, 안녕을 확인하는 한 끼
    행복한 밥상, 안녕을 확인하는 한 끼

    최근 전에 없이 주민센터를 자주 드나들고 있다. 목적지가 주민센터는 아니다. 새로 지은 주민센터 2~3층에 도서관이 들어섰고, 그곳에 가려면 1층 민원실을 지나야 한다. 오전 시간엔 어르신들이 많다. 민원실 창구의 ‘쌀 신청’ 안내문 앞에서 정부 양곡을 주문하는 어르신들, 서류 한 통을 떼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어르신들. 웬만한 서류는 인터넷으로 처리할 수 있어 언젠가부터 주민센터는 내게 갈 일이 없는 공간이 됐다. 그런데 그곳에서 간편하다는 온라인이 조금도 간편할 수 없는, 여전히 얼굴을 마주해야 이어갈 수 있는 삶을 만난다.집과 새 주민센터 사이에 있는 옛 건물은 한창 리모델링 중이다. 공사 안내문에는 ‘행복한 밥상 2호점 설치 공사’라고 적혀 있었다. 서대문구가 결식 우려가 있는 만 65세 이상 어르신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제공하고, 맞춤형 여가 프로그램까지 곁들인 ‘어르신 복합문화거점’을 표방하는 복지사업이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의아했다. 1...

    2026.04.22 20:04

  • [숨]강릉 임장기, 집값보다 궁금한 것
    강릉 임장기, 집값보다 궁금한 것

    얼마 전 인스타그램 계정에 ‘강릉 임장’ 소식을 알렸다. “강릉? 갑자기?”를 시작으로 “결혼하니?” “거기 시세는 어때?” “갭투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어디에 사는가’가 개인의 선택이기보다 사회적 위치로 읽히는 구조 속에서 오랫동안 서울에 발붙이고 살던 이가 서울 밖으로 집을 보러 간다는 소식은 곧장 ‘결혼’과 같은 인생의 큰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거나, 혹시 모를 ‘경제적 이익’으로 해석되기 쉽다.소속이 정체성을 대신하는 환경에서 자원과 기회가 집중된 수도 서울은 좀처럼 이탈하기 어려운 견고한 중심이 됐다. 내가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도 서울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세상 물정 모른 선택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결혼이나 투자 목적이 아닌 ‘다른 삶’을 기대하며 이주를 고민 중이다. 그 삶의 모습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부딪쳐야 또렷해질 거라는 감각이 있다.그곳이 어디든, 몇가지 꼭...

    2026.03.25 19:59

  • [숨]완행버스에서 만난 다르지만 닮은 삶
    완행버스에서 만난 다르지만 닮은 삶

    엄마의 시골집을 오갈 때면, 종종 이(里) 단위 마을 구석구석을 훑는 완행버스를 타게 된다. 하루는 옆자리 한 승객이 읍내에 도착할 즈음 내 손목을 톡톡 쳤다. “네?” 하고 응답했지만 그의 말은 선뜻 알아듣기 어려웠다. 엄마의 시골집이 있는 곳은 과수와 엽채류 농사로 바쁜 지역이다. 그의 차림은 그가 그 어딘가의 일손임을 일러주었다.멋쩍은 듯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를 향해 고쳐 앉았다. 그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을 가리켰다. 근처에 학교가 있는지를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우리 아이 저 학교 다니면 좋아요”라고 말했다.이야기의 골자는, 현재 혼자 한국에서 일하지만 모국에 있는 아이를 데려와 한국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는 이미 학교에 관해 알고 있었고, 가본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학교 위치가 궁금해서, 혹은 어떤 정보를 구하려 말을 건 것이 아니었다. 내년이면 아이를 데려올 수 있을 것 같다는 그의 얼굴에서는 이미 그 소망이 이루어진 ...

    2026.02.25 19:59

  • [숨]곶감 건네는 마음
    곶감 건네는 마음

    설 대목을 앞두고 감 말리기에 한창인 곶감 농가에 다녀왔다. 이후 기사를 쓰려 몇 차례 곶감 관련 자료를 검색했더니 SNS에 온갖 곶감 광고가 줄을 잇는다. 평소라면 무심히 넘겼을 광고에 자꾸만 눈이 갔던 것은, 광고 속 곶감이 내가 알고 있던, 또 현장에서 보았던 그것과는 사뭇 달라서다.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했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설화가 남아 있을 만큼 곶감의 역사는 길고도 깊다. 본디 우리 토종 감은 ‘떫은’ 감이라 옛사람들은 생과로 먹을 수 없던 감을 하나하나 껍질 벗겨 볕을 쪼이고 바람 쐬어 말려 곶감으로 만들어 먹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과로 즐기는 단감은 근대에 유입된 품종이다. 가을의 끝자락부터 겨우내 두어 달을 들여 완성하는 곶감은 단순히 입을 달래는 주전부리가 아니라, 먹거리가 넉넉지 않던 시절에 시간과 정성과 지혜로 맺었던 귀한 저장식품이었다.요사이 곶감 농사 풍경이 많이 달라지긴 했다. 곶감은 감이 잘 익을수록 품질이 좋아지지만, 잘 익...

    2026.01.28 20:03

  • [숨]붉은 말의 해에 호랑이를 기다리게 된 연유
    붉은 말의 해에 호랑이를 기다리게 된 연유

    바깥공기가 차가워져 옷깃을 여미게 될 즈음, 당일치기로 경북 영양에 다녀왔다. 인터넷서점 예스24가 기획한 북토크 장소가 ‘육지 속의 섬’이라는 영양이었다. <호랑이는 숲에 살지 않는다>의 저자인 국립생태원 멸종위기종복원센터 임정은 선임연구원의 강연과 함께 멸종위기 동식물의 보금자리를 견학하는 일정. 왕복 이동 시간만 10시간 이상이 예상됐지만, 책을 읽고 그 무모한 기획의 마음이 읽혀 내 마음도 동했다.서울 사당역 인근 주차장에서 출발한 전세버스가 경상도에 진입해 의성과 청송을 지나 영양에 이르는 동안, 창밖으로 검은 산자락이 이어졌다. 지난봄 산불의 흔적이었다. 산불 진화 보도와 함께 관심에서 벗어난 산불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영양에 들어서서야 왜 이곳에 멸종위기종복원센터가 자리 잡았는지 실감했다. 내륙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기초자치단체 영양은 더없이 맑고 청정했다.보전생물학자이자 국내 유일의 ‘현장’ 호랑이 연구자로 알려진 임 연구원은 유난히...

    2025.12.31 19:18

  • [숨]우리가 ‘길’에서 만나야 하는 이유
    우리가 ‘길’에서 만나야 하는 이유

    버스가 정차하고 누구보다 먼저 내린 사람은 기사님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보니 휠체어를 탄 어르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님은 잠시만 기다려달라 하고, 뒷문 쪽 바닥에 설치된 발판 고리를 힘껏 당겼다. 저상버스에는 휠체어가 타고 내릴 수 있도록 바닥에 접이식 발판이 설치되어 있다. 자동으로 작동하는 버스도 있지만 수동으로 고리를 당겨야 하는 버스도 있다.몇번이고 시도해도 바닥 홈에 꽉 낀 고리는 꿈쩍하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뒤져 연필을 꺼냈다. “부러져도 괜찮으니까 이걸로 해볼까요?” 야속하게도 두 번째 시도에서 연필이 뚝 부러졌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정류장에서 다른 버스를 기다리던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와 “이걸로 한번 해보시죠” 하고 휴대용 전동 드라이버를 내밀었다. 두어번 작동하자 ‘탁’ 소리와 함께 고리가 빠졌다.발판이 펼쳐지는 데 걸린 시간은 어림잡아 5분여. 통계적으로 도심 시내버스가 정류장에 머무는 평균 시간이 20초 남짓이라니 제법 길었다...

    2025.12.03 22:07

  • [숨]살던 곳에서, 삶의 끝을 돌볼 수 있을까
    살던 곳에서, 삶의 끝을 돌볼 수 있을까

    면 소재지 시골 마을에 살며 재가방문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가 얼마 전 한 할머니와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다행히 돌아가신 것은 아니다. 자식들이 요양기관으로 모신 것도 아니다. 엉뚱하게도 엄마는 도둑으로 몰렸다.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엄마에게 “왜, 뭘 훔쳤다고 하시던데?” 묻자, 돌아오는 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순대! 순대가 없어졌다 안 카나!” 나는 더 묻지도 않고 말했다. “엄마, 순대라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제야 좀 진정되는지 엄마는 “그래, 금붙이라도 없어졌다 캤으면 우얄뻔 했노” 하며 자신을 다독였다.사실 순대가 처음은 아니다. 얼마 전에는 약을 두고 실랑이가 있었다. “약이 없어졌다고예? 다 드신 거 아이라예? 곧 병원 가시잖아예.” 하지만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몸에 좋다면 뭐라도 먹는 게 사람이라며 엄마를 의심했다.결국 노인복지센터에서 할머니댁을 방문해 삼자대면이 이루어졌다. 여러 정황과 할머니의 상태를 살핀 센터장은 진료를 받아...

    2025.11.05 22:22

  • [숨]그깟 공놀이가 그리는 새로운 지형도
    그깟 공놀이가 그리는 새로운 지형도

    갈매기, 곰, 공룡, 독수리, 마법사, 쓱, 영웅 군단, 줄무늬, 푸른 피, 그리고 호랑이. 얼핏 무관해 보이는 이 단어들이 하나로 모여 만들어내는 세계가 있다. 모르는 이들에겐 이상한 암호명 나열처럼 보이겠지만 아는 이들에겐 곧장 도파민이 솟구치는 신호, 프로야구 이야기다.지역 간 갈등과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와는 다른 맥락으로 프로야구는 지역 기반의 확고한 ‘연고 문화’를 바탕으로 몸집을 키웠다. 부산은 롯데, 호남은 기아, 충청은 한화처럼 실로 오랫동안 출신지에 따라 응원 팀이 정해졌고, 그 소속감과 연대가 야구 팬덤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었다.푸른 피로 태어났지만 줄무늬가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1994년 야구를 접한 까닭에 지금까지 줄무늬로 살고 있는 나는 꽤 자주 ‘왜?’라는 되물음과 함께 ‘배신자’라는 눈총을 받았다. 참고로 야구 팬덤에서 푸른 피는 대구 연고의 삼성 라이온즈, 줄무늬는 서울 연고의 LG 트윈스를 가리킨다.여전히 출신지 팀을...

    2025.10.0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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