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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숨]살던 곳에서, 삶의 끝을 돌볼 수 있을까
    살던 곳에서, 삶의 끝을 돌볼 수 있을까

    면 소재지 시골 마을에 살며 재가방문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가 얼마 전 한 할머니와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다행히 돌아가신 것은 아니다. 자식들이 요양기관으로 모신 것도 아니다. 엉뚱하게도 엄마는 도둑으로 몰렸다.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엄마에게 “왜, 뭘 훔쳤다고 하시던데?” 묻자, 돌아오는 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순대! 순대가 없어졌다 안 카나!” 나는 더 묻지도 않고 말했다. “엄마, 순대라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제야 좀 진정되는지 엄마는 “그래, 금붙이라도 없어졌다 캤으면 우얄뻔 했노” 하며 자신을 다독였다.사실 순대가 처음은 아니다. 얼마 전에는 약을 두고 실랑이가 있었다. “약이 없어졌다고예? 다 드신 거 아이라예? 곧 병원 가시잖아예.” 하지만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몸에 좋다면 뭐라도 먹는 게 사람이라며 엄마를 의심했다.결국 노인복지센터에서 할머니댁을 방문해 삼자대면이 이루어졌다. 여러 정황과 할머니의 상태를 살핀 센터장은 진료를 받아...

    2025.11.05 22:22

  • [숨]그깟 공놀이가 그리는 새로운 지형도
    그깟 공놀이가 그리는 새로운 지형도

    갈매기, 곰, 공룡, 독수리, 마법사, 쓱, 영웅 군단, 줄무늬, 푸른 피, 그리고 호랑이. 얼핏 무관해 보이는 이 단어들이 하나로 모여 만들어내는 세계가 있다. 모르는 이들에겐 이상한 암호명 나열처럼 보이겠지만 아는 이들에겐 곧장 도파민이 솟구치는 신호, 프로야구 이야기다.지역 간 갈등과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와는 다른 맥락으로 프로야구는 지역 기반의 확고한 ‘연고 문화’를 바탕으로 몸집을 키웠다. 부산은 롯데, 호남은 기아, 충청은 한화처럼 실로 오랫동안 출신지에 따라 응원 팀이 정해졌고, 그 소속감과 연대가 야구 팬덤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었다.푸른 피로 태어났지만 줄무늬가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1994년 야구를 접한 까닭에 지금까지 줄무늬로 살고 있는 나는 꽤 자주 ‘왜?’라는 되물음과 함께 ‘배신자’라는 눈총을 받았다. 참고로 야구 팬덤에서 푸른 피는 대구 연고의 삼성 라이온즈, 줄무늬는 서울 연고의 LG 트윈스를 가리킨다.여전히 출신지 팀을...

    2025.10.01 22:24

  • [숨]공공디자인, 꾸미기 아닌 문제 해결의 언어
    공공디자인, 꾸미기 아닌 문제 해결의 언어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의 한가운데, 시민들이 그늘막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린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없던 풍경이다. 서울 서초구가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도 재난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 그늘막 설치를 추진했고, 1년여 준비 끝에 2015년 6월 첫선을 보였다. 이제 전국 어디서나 익숙해진 이 시설물은 공공디자인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그늘막뿐만이 아니다. 버스 정류소와 벤치, 가로 화분대, 맨홀과 소화전, 안내표지판과 현수막 게시대, 고속도로 색깔 유도선까지 우리가 무심코 스쳐 지나가며 ‘세상 참 좋아졌다’고 느끼는 요소요소에 공공디자인이 적용돼 있다.‘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 속칭 공공디자인법이 2016년 8월부터 시행 중이다. 공공(public)과 디자인(design)의 합성어인 ‘공공디자인’은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지만 실무자들조차 ‘디자인’이라는 말에 갇혀 공공시설물을 보기 좋게 꾸미는 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공공...

    2025.09.03 20:57

  • [숨]실패를 다룰 수 있는 감각
    실패를 다룰 수 있는 감각

    실패를 박제한 교실 한 칸짜리 전시 공간에 들어섰다. 이름하여 ‘실패박물관’이다. 굉장하다고 생각했던 아이디어가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가 하면, 인공지능(AI) 기반 프로그램의 힘을 빌려 설계는 해냈지만 재료 수급과 조립 과정에서 막혀버린 프로젝트도 있었다. 친환경 캠페인으로 상품을 기획하고도 플라스틱 포장 용기를 사용해 메시지가 희석됐다는 자기반성도 전시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지난달 22일 코엑스에서 열린 ‘아산 유스프러너 데모데이’의 한 장면이다. 아산 유스프러너는 아산나눔재단이 운영하는 청소년 기업가정신 교육 프로그램이다.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이 직접 수행한 팀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자리로 데모데이가 열렸다. 주요 행사는 뛰어난 성과물을 선보인 전시 부스와 피칭 무대였지만, 그 못지않게 관람객들의 호응을 받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바로 ‘실패박물관’과 실패 사례를 유쾌하게 발표하는 ‘천하제일 망함대회’다.실패박물관 전시 구성을 맡았을 때,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어...

    2025.08.06 21:04

  • [숨]삶을 무르익게 하는 건 전략보다 질문
    삶을 무르익게 하는 건 전략보다 질문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오는 동안 서울시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하는 전원생활교육과 귀농귀촌종합센터에서 수탁운영하는 귀농귀촌교육 기본공통과정, 일종의 ‘생활형 농촌 교육’을 연이어 받았다.경제활동의 토대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편리한 생활·문화 인프라와 촘촘한 사회적 연결감 등 도시를 쉬이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전업 귀농으로 삶을 전환하려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그마하더라도 텃밭과 정원을 가꿀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길 바라고, 그 속에서 거둔 것들로 밥상을 차려내는 생활을 그린 지 제법 오래다.내가 그리는 그 풍경에 적합한 사람일지, 당장은 좀 부족해도 충분히 적응할 수 있을지, 무엇부터 어떻게 준비하면 될지 공부가 필요할 것 같아 서울에서 받을 수 있는 귀농·귀촌 교육 프로그램을 찾았다. 끝내 이루지 못하더라도 모색은 해보고 싶었다.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검색됐지만 대부분 평일 주간에 진행돼 선택의 폭은 몹시 좁았다. 시간 활용이 ...

    2025.07.09 20:48

  • [숨]서리를 기다리며
    서리를 기다리며

    여름이면 봉선화를 따다가 손톱에 꽃물을 들인다. 그 자체로 재미도 있지만 꾸미는 데 서툴러 그런지 홀로 겸연쩍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때 손을 내밀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꽃단장이지” 하고 으스대기에도 그만이랄까. 손끝에 남은 꽃물이 시간을 가늠케 해 보통날에 잠시 여유를 갖게 하는 것도, 그렇게 어깨가 움츠러드는 계절에 이르러 은은히 사라지는 것도 맘에 든다. 여러모로 참 매력적인 계절 풍습이다.여름 공기가 감지될 무렵 내 걸음이 느릿해지는 건 봉선화를 찾아 술래잡기하듯 두리번거리느라 그렇다. 천변이나 동네 자투리땅에 피었던 것이 생각나 부러 찾아가 보기도 하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도심에서 봉선화 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해엔 가을볕이 따가워질 즈음 나주의 한 농가에서 가까스로 봉선화 한 줌을 얻었다.아직 시도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최후의 보루가 있긴 하다. 집에서 걸어 3분 거리의 어린이집. 신록이 짙어가는 이맘때는 아이들이 텃밭 활동을 시작하는...

    2025.06.11 20:56

  • [숨]어디에 발붙이고 사는가
    어디에 발붙이고 사는가

    어린이날과 부처님오신날이 겹친 지난 연휴, 모처럼 엄마와 시간을 보내려 고향 집에 내려갔다. 이튿날, 어린이날 선물을 잔뜩 기대했을 조카로부터 “고모, 우리도 이제 할머니 집으로 출발해요” 하는 전화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엄마의 전화가 울렸다. 외사촌 오빠였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인사라도 하려나 싶어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는 엄마는 내게 곧 큰외삼촌의 부고를 전했다.장례식장에서는 일가친지들이 반갑지만 반가울 수만은 없는 해후를 하고, 고인과의 추억을 하나둘 꺼내 울고 웃으며 놀라고 슬픈 마음을 덜어내려 애를 썼다. 장례를 처음 경험하는 어린 조카들은 통곡을 하다가 뒤돌아 정담을 나누고, 또 한순간 눈물짓는 어른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카들에게 누군가 세상을 떠나 슬픈 것도,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을 회상하며 웃는 것도 모두 자연스럽고 따뜻한 애도의 방식이라 일러주며 나도 어른들 틈에서 큰외삼촌과의 추억을 보탰다.고2 여름방학 시작 무렵...

    2025.05.14 20:15

  • [숨]산불 그리고 기후여행자
    산불 그리고 기후여행자

    3월22일 의성군에서 피어오른 불씨가 산자락을 타고 바닷가 영덕군까지 번져 경북 북동부 지역에 크나큰 피해가 발생했다. 산림청 발표에 따르면 순간최대풍속이 초속 27m인 강풍을 타고 시간당 8.2㎞ 속도로 이동한 불길이 928㎞에 달하는 화선을 만들었다. 소실 면적은 4만5157㏊. 이 숫자들의 의미를 하나하나 헤아릴 필요도 없이 ‘최악’ ‘최대’라는 수식과 함께 보도된 산불 현장은 우리의 마음까지 태웠다.진화가 완료됐다는 소식 이후 보름여가 지났다. 그사이에도 여러 지역에서 산불이 일었다 잡히기를 반복했는데, 큰 불길이 잡힌 후로는 산불 관련 뉴스도 빠르게 걷히고 새로운 이슈들이 일상을 에두른다. 하지만 산불 피해 복구는 요원하게만 보이고, 산불은 언제 어디에서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산림 안전보다 개발에 치중한 정책이 도마에 오른 가운데 정부와 각 지자체, 유관기관을 중심으로 산불 피해 복구와 함께 다양한 대책이 논의되고 있다. 여러 전문가들도 의견을 보태고 있다. ...

    2025.04.16 20:09

  • [숨]‘대저토마토’를 아십니까
    ‘대저토마토’를 아십니까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 즈음 김해국제공항 인근의 한 토마토 농가로 명산지 취재를 다녀왔다. 부산 강서구 대저동 일대에서 재배하는 대저토마토, 일명 ‘짭짤이토마토’가 제철맞이를 하는 시기다.농산물 소비의 폭이 좁은 1인 가구라는 것이 변명이 될는지. 들어는 봤어도 먹어본 기억은 없었던 터라 사실 좀 짐작이 안 됐다. 과일은 물론 토마토처럼 열매를 식용으로 하는 과채류도 당도가 주요 품질 기준으로 작용한다. 근래 신선식품 코너에서 ‘○○브릭스 이상’이라는 홍보 문구를 심심찮게 발견하게 되는데, 이 브릭스(brix)가 당도를 백분율로 나타낸 단위다. 품질을 가늠하는 절대 지표는 아니나 브릭스 수치가 높을수록 열매가 맛있게 잘 익었다는 인식이 높다. 많이 사라진 풍경이지만 후식이나 간식으로 얇게 저미듯 썬 토마토에 하얀 설탕을 솔솔 뿌려 먹었던 시절도 있잖은가. 그런데 대놓고 짭짤한 토마토라니.어찌 이 맛을 모르고 사셨냐고 되물은 내 또래 청년 농부가 때깔 좋은 열...

    2025.03.19 21:23

  • [숨]무슨 일 하세요?
    무슨 일 하세요?

    수없이 물었던 말이다. 그만큼 답해야 했던 말이기도 하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말. 한국 사회에서 ‘하는 일’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은 소속과 지위를 확인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니 물을 때였든 답할 때였든 그리 흔쾌했던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기어이 묻고, 들어야 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추진한 현대사 구술채록 사업 가운데 하나로, 역대 대통령을 보좌했거나 이에 관계된 일을 수행했던 이들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는 일을 했다.2022년 갑작스럽게 청와대가 전면 개방됐다. 이후 청와대는 그야말로 ‘핫플레이스’가 됐다. 성역, 구중궁궐에 비유될 만큼 쉬이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던 그곳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대단했다. 다만 제왕적 대통령제를 만든 문제적 공간이라 여긴 탓인지 청와대 개방은 과감함을 넘어 성급하게 진행됐다. 청와대와 그 주변 지역은 몸살을 앓았다. 청와대를 배경으로 그럴듯한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게 된 것 이상으로 우리는 무엇을 더...

    2025.02.19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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