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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곶감 건네는 마음
    곶감 건네는 마음

    설 대목을 앞두고 감 말리기에 한창인 곶감 농가에 다녀왔다. 이후 기사를 쓰려 몇 차례 곶감 관련 자료를 검색했더니 SNS에 온갖 곶감 광고가 줄을 잇는다. 평소라면 무심히 넘겼을 광고에 자꾸만 눈이 갔던 것은, 광고 속 곶감이 내가 알고 있던, 또 현장에서 보았던 그것과는 사뭇 달라서다.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했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설화가 남아 있을 만큼 곶감의 역사는 길고도 깊다. 본디 우리 토종 감은 ‘떫은’ 감이라 옛사람들은 생과로 먹을 수 없던 감을 하나하나 껍질 벗겨 볕을 쪼이고 바람 쐬어 말려 곶감으로 만들어 먹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과로 즐기는 단감은 근대에 유입된 품종이다. 가을의 끝자락부터 겨우내 두어 달을 들여 완성하는 곶감은 단순히 입을 달래는 주전부리가 아니라, 먹거리가 넉넉지 않던 시절에 시간과 정성과 지혜로 맺었던 귀한 저장식품이었다.요사이 곶감 농사 풍경이 많이 달라지긴 했다. 곶감은 감이 잘 익을수록 품질이 좋아지지만, 잘 익...

    2026.01.28 20:03

  • [숨]붉은 말의 해에 호랑이를 기다리게 된 연유
    붉은 말의 해에 호랑이를 기다리게 된 연유

    바깥공기가 차가워져 옷깃을 여미게 될 즈음, 당일치기로 경북 영양에 다녀왔다. 인터넷서점 예스24가 기획한 북토크 장소가 ‘육지 속의 섬’이라는 영양이었다. <호랑이는 숲에 살지 않는다>의 저자인 국립생태원 멸종위기종복원센터 임정은 선임연구원의 강연과 함께 멸종위기 동식물의 보금자리를 견학하는 일정. 왕복 이동 시간만 10시간 이상이 예상됐지만, 책을 읽고 그 무모한 기획의 마음이 읽혀 내 마음도 동했다.서울 사당역 인근 주차장에서 출발한 전세버스가 경상도에 진입해 의성과 청송을 지나 영양에 이르는 동안, 창밖으로 검은 산자락이 이어졌다. 지난봄 산불의 흔적이었다. 산불 진화 보도와 함께 관심에서 벗어난 산불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영양에 들어서서야 왜 이곳에 멸종위기종복원센터가 자리 잡았는지 실감했다. 내륙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기초자치단체 영양은 더없이 맑고 청정했다.보전생물학자이자 국내 유일의 ‘현장’ 호랑이 연구자로 알려진 임 연구원은 유난히...

    2025.12.31 19:18

  • [숨]우리가 ‘길’에서 만나야 하는 이유
    우리가 ‘길’에서 만나야 하는 이유

    버스가 정차하고 누구보다 먼저 내린 사람은 기사님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보니 휠체어를 탄 어르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님은 잠시만 기다려달라 하고, 뒷문 쪽 바닥에 설치된 발판 고리를 힘껏 당겼다. 저상버스에는 휠체어가 타고 내릴 수 있도록 바닥에 접이식 발판이 설치되어 있다. 자동으로 작동하는 버스도 있지만 수동으로 고리를 당겨야 하는 버스도 있다.몇번이고 시도해도 바닥 홈에 꽉 낀 고리는 꿈쩍하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뒤져 연필을 꺼냈다. “부러져도 괜찮으니까 이걸로 해볼까요?” 야속하게도 두 번째 시도에서 연필이 뚝 부러졌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정류장에서 다른 버스를 기다리던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와 “이걸로 한번 해보시죠” 하고 휴대용 전동 드라이버를 내밀었다. 두어번 작동하자 ‘탁’ 소리와 함께 고리가 빠졌다.발판이 펼쳐지는 데 걸린 시간은 어림잡아 5분여. 통계적으로 도심 시내버스가 정류장에 머무는 평균 시간이 20초 남짓이라니 제법 길었다...

    2025.12.03 22:07

  • [숨]살던 곳에서, 삶의 끝을 돌볼 수 있을까
    살던 곳에서, 삶의 끝을 돌볼 수 있을까

    면 소재지 시골 마을에 살며 재가방문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가 얼마 전 한 할머니와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다행히 돌아가신 것은 아니다. 자식들이 요양기관으로 모신 것도 아니다. 엉뚱하게도 엄마는 도둑으로 몰렸다.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엄마에게 “왜, 뭘 훔쳤다고 하시던데?” 묻자, 돌아오는 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순대! 순대가 없어졌다 안 카나!” 나는 더 묻지도 않고 말했다. “엄마, 순대라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제야 좀 진정되는지 엄마는 “그래, 금붙이라도 없어졌다 캤으면 우얄뻔 했노” 하며 자신을 다독였다.사실 순대가 처음은 아니다. 얼마 전에는 약을 두고 실랑이가 있었다. “약이 없어졌다고예? 다 드신 거 아이라예? 곧 병원 가시잖아예.” 하지만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몸에 좋다면 뭐라도 먹는 게 사람이라며 엄마를 의심했다.결국 노인복지센터에서 할머니댁을 방문해 삼자대면이 이루어졌다. 여러 정황과 할머니의 상태를 살핀 센터장은 진료를 받아...

    2025.11.05 22:22

  • [숨]그깟 공놀이가 그리는 새로운 지형도
    그깟 공놀이가 그리는 새로운 지형도

    갈매기, 곰, 공룡, 독수리, 마법사, 쓱, 영웅 군단, 줄무늬, 푸른 피, 그리고 호랑이. 얼핏 무관해 보이는 이 단어들이 하나로 모여 만들어내는 세계가 있다. 모르는 이들에겐 이상한 암호명 나열처럼 보이겠지만 아는 이들에겐 곧장 도파민이 솟구치는 신호, 프로야구 이야기다.지역 간 갈등과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와는 다른 맥락으로 프로야구는 지역 기반의 확고한 ‘연고 문화’를 바탕으로 몸집을 키웠다. 부산은 롯데, 호남은 기아, 충청은 한화처럼 실로 오랫동안 출신지에 따라 응원 팀이 정해졌고, 그 소속감과 연대가 야구 팬덤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었다.푸른 피로 태어났지만 줄무늬가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1994년 야구를 접한 까닭에 지금까지 줄무늬로 살고 있는 나는 꽤 자주 ‘왜?’라는 되물음과 함께 ‘배신자’라는 눈총을 받았다. 참고로 야구 팬덤에서 푸른 피는 대구 연고의 삼성 라이온즈, 줄무늬는 서울 연고의 LG 트윈스를 가리킨다.여전히 출신지 팀을...

    2025.10.01 22:24

  • [숨]공공디자인, 꾸미기 아닌 문제 해결의 언어
    공공디자인, 꾸미기 아닌 문제 해결의 언어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의 한가운데, 시민들이 그늘막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린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없던 풍경이다. 서울 서초구가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도 재난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 그늘막 설치를 추진했고, 1년여 준비 끝에 2015년 6월 첫선을 보였다. 이제 전국 어디서나 익숙해진 이 시설물은 공공디자인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그늘막뿐만이 아니다. 버스 정류소와 벤치, 가로 화분대, 맨홀과 소화전, 안내표지판과 현수막 게시대, 고속도로 색깔 유도선까지 우리가 무심코 스쳐 지나가며 ‘세상 참 좋아졌다’고 느끼는 요소요소에 공공디자인이 적용돼 있다.‘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 속칭 공공디자인법이 2016년 8월부터 시행 중이다. 공공(public)과 디자인(design)의 합성어인 ‘공공디자인’은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지만 실무자들조차 ‘디자인’이라는 말에 갇혀 공공시설물을 보기 좋게 꾸미는 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공공...

    2025.09.03 20:57

  • [숨]실패를 다룰 수 있는 감각
    실패를 다룰 수 있는 감각

    실패를 박제한 교실 한 칸짜리 전시 공간에 들어섰다. 이름하여 ‘실패박물관’이다. 굉장하다고 생각했던 아이디어가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가 하면, 인공지능(AI) 기반 프로그램의 힘을 빌려 설계는 해냈지만 재료 수급과 조립 과정에서 막혀버린 프로젝트도 있었다. 친환경 캠페인으로 상품을 기획하고도 플라스틱 포장 용기를 사용해 메시지가 희석됐다는 자기반성도 전시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지난달 22일 코엑스에서 열린 ‘아산 유스프러너 데모데이’의 한 장면이다. 아산 유스프러너는 아산나눔재단이 운영하는 청소년 기업가정신 교육 프로그램이다.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이 직접 수행한 팀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자리로 데모데이가 열렸다. 주요 행사는 뛰어난 성과물을 선보인 전시 부스와 피칭 무대였지만, 그 못지않게 관람객들의 호응을 받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바로 ‘실패박물관’과 실패 사례를 유쾌하게 발표하는 ‘천하제일 망함대회’다.실패박물관 전시 구성을 맡았을 때,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어...

    2025.08.06 21:04

  • [숨]삶을 무르익게 하는 건 전략보다 질문
    삶을 무르익게 하는 건 전략보다 질문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오는 동안 서울시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하는 전원생활교육과 귀농귀촌종합센터에서 수탁운영하는 귀농귀촌교육 기본공통과정, 일종의 ‘생활형 농촌 교육’을 연이어 받았다.경제활동의 토대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편리한 생활·문화 인프라와 촘촘한 사회적 연결감 등 도시를 쉬이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전업 귀농으로 삶을 전환하려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그마하더라도 텃밭과 정원을 가꿀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길 바라고, 그 속에서 거둔 것들로 밥상을 차려내는 생활을 그린 지 제법 오래다.내가 그리는 그 풍경에 적합한 사람일지, 당장은 좀 부족해도 충분히 적응할 수 있을지, 무엇부터 어떻게 준비하면 될지 공부가 필요할 것 같아 서울에서 받을 수 있는 귀농·귀촌 교육 프로그램을 찾았다. 끝내 이루지 못하더라도 모색은 해보고 싶었다.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검색됐지만 대부분 평일 주간에 진행돼 선택의 폭은 몹시 좁았다. 시간 활용이 ...

    2025.07.09 20:48

  • [숨]서리를 기다리며
    서리를 기다리며

    여름이면 봉선화를 따다가 손톱에 꽃물을 들인다. 그 자체로 재미도 있지만 꾸미는 데 서툴러 그런지 홀로 겸연쩍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때 손을 내밀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꽃단장이지” 하고 으스대기에도 그만이랄까. 손끝에 남은 꽃물이 시간을 가늠케 해 보통날에 잠시 여유를 갖게 하는 것도, 그렇게 어깨가 움츠러드는 계절에 이르러 은은히 사라지는 것도 맘에 든다. 여러모로 참 매력적인 계절 풍습이다.여름 공기가 감지될 무렵 내 걸음이 느릿해지는 건 봉선화를 찾아 술래잡기하듯 두리번거리느라 그렇다. 천변이나 동네 자투리땅에 피었던 것이 생각나 부러 찾아가 보기도 하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도심에서 봉선화 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해엔 가을볕이 따가워질 즈음 나주의 한 농가에서 가까스로 봉선화 한 줌을 얻었다.아직 시도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최후의 보루가 있긴 하다. 집에서 걸어 3분 거리의 어린이집. 신록이 짙어가는 이맘때는 아이들이 텃밭 활동을 시작하는...

    2025.06.11 20:56

  • [숨]어디에 발붙이고 사는가
    어디에 발붙이고 사는가

    어린이날과 부처님오신날이 겹친 지난 연휴, 모처럼 엄마와 시간을 보내려 고향 집에 내려갔다. 이튿날, 어린이날 선물을 잔뜩 기대했을 조카로부터 “고모, 우리도 이제 할머니 집으로 출발해요” 하는 전화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엄마의 전화가 울렸다. 외사촌 오빠였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인사라도 하려나 싶어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는 엄마는 내게 곧 큰외삼촌의 부고를 전했다.장례식장에서는 일가친지들이 반갑지만 반가울 수만은 없는 해후를 하고, 고인과의 추억을 하나둘 꺼내 울고 웃으며 놀라고 슬픈 마음을 덜어내려 애를 썼다. 장례를 처음 경험하는 어린 조카들은 통곡을 하다가 뒤돌아 정담을 나누고, 또 한순간 눈물짓는 어른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카들에게 누군가 세상을 떠나 슬픈 것도,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을 회상하며 웃는 것도 모두 자연스럽고 따뜻한 애도의 방식이라 일러주며 나도 어른들 틈에서 큰외삼촌과의 추억을 보탰다.고2 여름방학 시작 무렵...

    2025.05.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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