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부대에 담아야 할 ‘남북 표준협력’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표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개 KS 마크나 세계 표준을 떠올릴 것이다. 최근에 회자된 세계 표준의 예는 2020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K방역 세계 표준화’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면서 세계 표준을 더 이상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표준을 선점하는 단계에까지 올라섰다. 이제 세계 표준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앞서 세워나가는 ‘기준’이 되었다는 의미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KS 마크와 관련해 우리는 표준을 획일적인 규격으로 종종 오해한다. 기계나 제품의 경우 표준은 일정한 크기와 모양을 규정한 규격이 맞다. 그러나 품질이나 안전 및 환경과 관련된 표준은 규격이 아니라 최소한의 질적 수준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한글맞춤법통일안 같은 인문사회적 표준은 통합을 위해 중요한 기능을 하는 사회 규범의 하나다. 교통 표준 등에서 장애인을 고려한 최소 기준을 정하는 것도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중요한 표준화 활동이다. 돌아보면 우리 생활 곳곳에 표준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이질적인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표준 같은 사회 규범의 통합이 선행되어야 한다. 규범의 통합은 강제적이 아니라 협력과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새 정부도 한반도 분단을 조속히 끝내기를 바랄 것이다. 오랫동안 분리되어 살아온 두 사회의 통합은 주요 사회 규범이자 산업 기준인 표준을 통일하기 위한 교류와 협력을 요구한다. 분단이 길었던 만큼 그 교류와 협력도 주체의 강력한 의지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새 정부의 정책에서 표준은 마땅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총 182쪽에 달하는 ‘110대 국정 과제’에서 표준은 여섯 번 언급되는 데 그쳤다. 그것도 공직 업무 서류, 표준 특허, 서비스 표준화, 디지털 6D 표준 선점과 관련해 각각 한 번 그리고 R&D와 관련해 두 번 언급된 것이 전부다. 이 국정 과제는 국민의힘 20대 대선 공약을 토대로 한 것인데, 총 348쪽에 달하는 공약집에서도 남북 표준 협력과 관련된 내용은 전무하다.

표준 통일 비용이 적어도 전체 통일 비용의 10% 정도를 차지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 독일에서 통일 이후 15년간 지출된 표준 통일 비용은 약 180조원으로 전체 통일 비용의 10%를 차지했다. 분단의 역사가 짧은 데다 평화적인 통일이었다는 점으로 인해 이 비용은 오히려 적은 것이었다. 독일 국토는 1945년에 분단되었지만, 표준이 분단된 것은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1961년이었다. 그로부터 통일이 이루어진 1990년까지 독일 표준 분단의 역사는 29년에 불과했다. 분단 세월이 한 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한반도에서 그 비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언어와 생활 습관까지 달라지고 있다. 통합의 시간과 비용은 분단의 시간과 비용에 비례한다. 교류와 협력을 앞당길수록 통일 이후 지불할 통합의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그런데 남북 표준 협력은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인한 5·24조치 이후 사실상 전면 중단되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정치권의 무관심이다. 득표를 위해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기 때문에 공약에서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이슈가 되기 전에 정책적으로 먼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사안은 적지 않다. 표준도 그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그럼에도 남북 표준 협력을 위한 정치적 노력은 2010년 이후 거의 이루어지지 않다가 2019년 1월 ‘남북 표준·품질 경제협력 방안 토론회’가 민주당의 개별 의원 중심으로 개최된 것이 마지막이다. 대선에 비해 좀 더 다양한 이슈를 다룰 기회가 많은 총선을 겨냥해 반짝 이슈로 다루어지는 정도다.

표준 업무가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는 것도 남북 교류에 적지 않은 지장을 준다. 정보 통신, 농·축산업, 광공업, 측정과 품질 등으로 표준 업무가 각기 다른 부처에서 관장되기 때문에 일관된 표준 정책 추진이 어렵다. 남북 표준 협력에서도 단일한 교섭 창구를 형성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국가 표준화를 총괄하는 국가기술표준원의 위상이 높지 않고 독립성도 보장되어 있지 않아 부처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남측을 대표해 협력을 추진하려면 그만한 위상과 권한을 가져야 한다. 한 세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 분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중요한 한걸음이 될 표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남북 표준 협력도 새 부대에 담아야 할 중요한 사안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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