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세대교체는 없다

구혜영 정치에디터

68혁명은 젊은 세대의 분투가 세상을 바꾼 역사다. 이들은 전쟁의 상흔을 잊은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었다. 낮엔 시위로, 밤엔 대항문화로 혁명의 중력을 키웠다. 계급 투쟁만 혁명으로 치부했던 기성세대는 이들을 철부지 취급했다. 세대 갈등은 68혁명의 화두였다. 68세대는 해나 아렌트 같은 당대 거인들과 겨뤘고, 반전과 권위주의 타파라는 시대정신을 실천했고, 전 세계 청년들과 일체감을 이뤘다. 68혁명은 환경, 페미니즘, 소수자 운동 등 전환기 시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구혜영 정치에디터

구혜영 정치에디터

1969년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에 돌입한 뒤 야당인 신민당에서 40대 기수론이 등장했다. 김영삼·김대중·이철승 의원이 주역이었다. 이들은 민주주의 쟁취, 비타협 투쟁, 선명 야당이라는 화살을 당수 유진산에게 겨냥했고, 유진산은 이들을 ‘구상유취’라고 깎아내렸다. 1971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은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8년 평민연을 시작으로 4차에 걸친 외부 인사를 영입하며 야당 정체성을 다졌다. 당시 정치세력이 소홀히 다뤘던 ‘민주화, 인권, 평화통일’ 가치를 강령으로 채택했다. 김대중 정치 자체가 시대정신이었다.

더불어민주당 8·28 전당대회에서 세대교체론이 등장했다. 1990년대 학번, 1970년대생 정치인들이다. 97세대는 다원화한 사회에서 청춘을 보냈고 각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물론 민주당 97세대만의 한계는 아니다. 정치는 사람의 욕망을 다스리고 마음을 모으는 일이다. 욕망과 마음을 10년, 20년 단위로 칼같이 매듭짓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정치의 세대교체가 더딘 까닭이다.

한 세대 내에도 계층과 이념 차가 있듯 기성세대를 기득권으로, 젊은 세대를 희생자로 구분하는 것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정치에서 세대 교체가 강렬한 의미를 갖는 경우도 있다.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다른 길을 제시하는 세력이 ‘다음’ 세대로 나설 때다. “선배들이 틀려서가 아니다. 부족하더라도 우리가 가진 무기로 정치를 나아가게 하겠다”고 할 때다. 그러자면 ‘다음’ 세대들이 합의하는 가치가 있어야 하고, 가치를 사회적으로 승인받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68세대가 ‘인간은 스스로의 힘을 통해 세계를 만들어가는 존재’로 평가된 것도, 86세대가 민주화 주체로 인정받은 것도 이런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97그룹은 전당대회 출사표에서 ‘반목과 분열’ ‘리더십 위기’ ‘계파싸움’을 지적했다. 이들의 앞세대인 86그룹은 공과를 떠나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불리며 30년을 지나왔다. 86세대의 신념 비용을 더 이상 받아줄 곳이 없다 해도, 한 시대를 성찰하는 데 고작 이 정도 반성문으로 역사적 책무를 맡겨달라고 하면 될 일인가. 심지어 86세대 선배의 “결단해달라”는 말에 출마할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다음은 우리”를 외치며 바통터치 차례만 기다렸다는 자백이다. 이들 중엔 계파의 곁불을 쬐며 성장한 정치인도 있다. 전당대회 경선룰 번복 과정에서 선후배들의 짬짜미 연대를 의심케 하는 징후도 보였다.

97세대는 또 ‘새 술은 새 부대에’ ‘새로운 파격’을 강조했다. 2009~2012년은 민주당 노선의 변화기였다.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한반도 평화라는 진보 정체성을 천명했다. 민주당 정치는 그 후 지체와 후퇴를 거듭했다.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은 어떤 가치가 필요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설명하는 주체들이 필요한 시기다. 97세대는 변화를 주장하면서도 스스로의 가치를 설명하지 못했다. 교체란 고인 물을 빼는 작업이 우선이다. 97세대가 교체를 작정하고 나섰다면 68세대, 40대 기수처럼 ‘30년 수준’은 아니더라도 당장의 절박함이라도 보여야 했다. 거대 여야가 권력을 주고받는 카르텔 정당 구조부터 바꾸겠다는 선언 정도는 기대했다. 폐쇄적인 엘리트 순환구조가 여야 공히 직업정치인을 양산해왔고, 결국 이 구조가 기존 정치를 고인 물로 만든 토양이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의 대결에 머물러 있는 정치 대신 구체적인 삶의 균열을 전선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도 없었다. 그저 ‘반이재명 (동맹)’ 구호만 요란할 뿐이다.

숫자적 선언만 있는 세대교체론. 이런 세대교체는 없다. “진보의 미덕은 상황이 변했을 때 그 시대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새로운 천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신동호, ‘파국을 걱정하며’). 97세대가 거친 파도를 넘나들며 스스로 나아가는 물결이 되길 바란다. ‘새로운 천사’에서 ‘역사적 천사’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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