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사유의 도구

신예슬 음악평론가

<케임브리지 서양음악이론의 역사>가 번역·출간됐다. 서양음악 연구자라면 한번은 들춰봤을 이 책은 고대 그리스부터 현재까지의 서양음악이론사를 다루는 핵심 문헌으로, 음악이론가와 음악사가들이 힘을 모아 만든 것이다.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만큼 국문 번역본의 무게도 상당하다. 물성만으로도 그 역사를 체감하게 하는 이 책은 1184쪽, 2250g에 육박한다. 국내 음악학자 아홉 명의 공동 번역으로도 총 5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신예슬 음악평론가

아마도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음악이론’의 첫 경험은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음과 음계를 배우고, 그것들을 이용해 도-미-솔, 파-라-도 등의 화음을 쌓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논의 또한 근본적으로는 이와 같다. 이 책의 중심부에는 음을 다루는 방식과 이를 체계화한 이론이 놓여 있고, 역사서인 만큼 각 시대의 이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엔 보다 흥미로운 논의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데, 그건 바로 다분히 음악 내부의 논리를 다루는 이론이 어떻게 그 바깥 세계와 만나왔는지를 알려주는 부분이다. 예컨대 이런 문장. “물리학, 철학, 심리학에서 운동과 시간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와서, 음악이론가들이 음악적 에너지론과 음악적 운동을 리듬 연구의 중심에 놓게 되었다.” 음을 수직적, 수평적으로 구성하는 일은 음악 안에서 하나의 공간과 시간을 구성하는 일이고, 그것이 공간과 시간에 대한 당대의 인식과 일정 부분 맞닿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외에도 이 책은 인식론과 과학혁명, 수학, 수사학, 에너지 등의 키워드가 특정 시기의 음악적 사유와 어떻게 연결됐는지를 소개한다. 이런 내용은 음악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그 내부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 세계와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케 한다.

한편, 이 책이 알려주는 또 다른 화두는 이 논의가 다분히 서양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지난 4일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원서의 편저자인 토머스 크리스텐슨과 함께하는 출간 기념 세미나가 열렸다. 많은 음악 연구자가 함께한 그 대화의 장에서 중요히 다뤄졌던 이야기 중 하나는 이 책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지역의 역사였다. 크리스텐슨은 이를 서양음악이론이 아닌 ‘음악이론의 역사’로 부르는 일은 비윤리적이라 말했다. 이러한 불균형에 공감하며, 연구자들은 조선시대 이후 한국음악이론의 역사를 어떻게 더 확장해서 사유할 수 있을지, 수많은 전통과 문화가 교차하는 동시대 한국의 음악을 이론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어떤 시각이 필요할지에 대한 의견도 나눴다.

현장의 논의를 들으며, 나는 이 책 옆에 놓아둘 만한 또 다른 미래의 책들을 떠올렸다. 이 책이 대상으로 삼는 서양음악, 그중에서도 악보의 형태로 남아 있는 음악은 인류가 향유해온 그 장대한 음악문화 안에서 극소수에 불과하다. 쓰이지 않은 음악, 기록되지 않은 음악, 아직 이론적 시각으로 접근되지 않은 수많은 음악을 생각하면 이 책이 무언가를 완성하고 끝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넓은 논의를 가능케 하는 시작점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묵직한 책은 내게 얼마나 다양한 사유의 도구가 음악과 연결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알려주는 하나의 증명서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책의 논의를 통해 서양음악이 내재해온 다양한 질서를 배우지만, 동시에 음악은 결코 닫힌 구조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사회문화와 유기적으로 연결돼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과 함께 음악의 질서를 찾는 다양한 방식을 이해하고, 음악과 그 바깥을 연결하는 방법을 배워보고 싶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언젠가는 동시대 음악의 질서를 찾고, 그 음악이 세계와 어떻게 호응하고 변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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